유리로 만든 관 속에 공허한 표정을 한 인형들이 누워 있다. 텅 빈 눈동자에 얼어붙은 듯한 인형들은 모두 어린이나 청소년처럼 보인다. 폭력에 익숙해진 무력감을 떠올리게 하는 표정의 인형들을 내려다보며 과연 우리는 어떻게 폭력을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이른다.
'Gisèle Vienne. TRAVAUX 2003–2021' 전시 전경, Musée d’Art Moderne de Paris, 2021 / 사진. ⓒMartin Argyroglo
'Gisèle Vienne. TRAVAUX 2003–2021' 전시 전경, Musée d’Art Moderne de Paris, 2021 / 사진. ⓒMartin Argyroglo
프랑스-오스트리아 출신의 지젤 비엔느(Gisèle Vienne, b. 1976)는 조각가이자 인형 제작자, 음악가, 안무가, 철학자로 활동하는 다재다능한 아티스트로서 11세부터 인형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비엔느에게 인형은 신체를 사유하게 하는 형식적 도구이고, 이를 통해 권력관계 및 사회적 인지 시스템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특히 그는 사회에서 발생하는 폭력에 관심을 두고 폭력의 메커니즘을 분석하려 한다.

“저는 폭력이 어떻게 발생하고, 파시즘이나 인종차별,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나타나고 표현되는지 이해하고자 폭력을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This causes consciousness to fracture' 전시 전경 / 사진. ⓒHyunjoo Byeon
'This causes consciousness to fracture' 전시 전경 / 사진. ⓒHyunjoo Byeon
지젤 비엔느 <This causes consciousness to fracture>(2024) / 사진. ⓒEstelle Hanania, VG Bild-Kunst, Bonn 2024
지젤 비엔느 <This causes consciousness to fracture>(2024) / 사진. ⓒEstelle Hanania, VG Bild-Kunst, Bonn 2024
예술은 사회의 인지 시스템과 이를 다루는 방식에 책임이 있다고 발언하는 비엔느의 작품이 지난 9월부터 2025년 3월까지 베를린의 3개의 기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간학제적 예술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의 후원을 받아 베를린 남서쪽에 위치한 하우스 암 발트제(Haus am Waldsee), 서쪽에 위치한 게오르크 콜베 미술관(Georg Kolbe Museum), 공연 및 퍼포먼스를 위한 장소인 소피엔젤레(Sophiensaele)에서 조각, 설치, 사진, 퍼포먼스, 필름 등 여러 매체를 아우르는 그의 작업 세계를 다각도로 선보인다.

하우스 암 발트제에서는 유리관에 누워 있는 인형 13점을 포함해 지난 25여년간 작가가 제작하고 무대에서 배우들과 함께 사용했던 인형 조각, 설치 작업 및 사진 등을 전시하고 있다. 어린이나 청소년으로 보이는 인형들은 피부 위에 상처를 드러내기도 하며 이들에게 가해진 폭력을 연상케 한다. 더불어 전시는 ‘인형극’이란 제목을 하고 있으나 움직임과 소리를 기대하고 온 관객의 기대를 뒤집으며 ‘침묵’과 ‘움직이지 않음’으로 더 큰 목소리를 내고, 부조리하고 잔혹한 힘을 견뎌낼 수밖에 없는 어린이와 청소년의 모습을 한 인형으로 사회와의 불균형을 뚜렷하게 나타낸다.
베를린 하우스 암 발트제에서 진행하고 있는 '이것은 의식의 균열을 초래한다-인형극' 전시 전경 / 사진. ⓒ변현주
베를린 하우스 암 발트제에서 진행하고 있는 '이것은 의식의 균열을 초래한다-인형극' 전시 전경 / 사진. ⓒ변현주
지젤 비엔느, Series PORTRAITS 45/63, 2024 / 사진. ⓒGisèle Vienne
지젤 비엔느, Series PORTRAITS 45/63, 2024 / 사진. ⓒGisèle Vienne
한편, 게오르크 콜베 미술관에서는 정교하게 배치된 인형들과 함께 과거 여성주의 아방가르드 작가인 한나 회흐(Hannah Höch), 소피 타에버-아르프(Sophie Taeuber-Arp), 에미 헤닝스(Emmy Hennings)의 꼭두각시 인형 작업을 전시하며 역사를 뛰어넘는 여성 작가들 간의 대화, 억압적 사회에서 인형이란 객체화된 대상을 통해 예술적 자유를 찾고자 한 이들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여성주의 아방가르드 작가의 인형 작업을 볼 수 있는 베를린 게오르크 콜베 미술관 전시 전경 / 사진. ⓒEnric Duch
여성주의 아방가르드 작가의 인형 작업을 볼 수 있는 베를린 게오르크 콜베 미술관 전시 전경 / 사진. ⓒEnric Duch
20세기 초에 활동한 타에버-아르프가 인간의 형태를 벗어나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형태의 인형으로 예술 표현의 범주를 실험하며 신체와 정체성,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면, 21세기의 비엔느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인형을 단순히 한계를 극복하는 대상이 아니라 독립적이기에 더욱 명징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매체로 사용한다.
소피 타에버-아르프 <König Hirsch: König Deramo>(1918), 게오르규 콜베 미술관에서의 전시 전경, 2024 / 사진. ⓒEnric Duch
소피 타에버-아르프 <König Hirsch: König Deramo>(1918), 게오르규 콜베 미술관에서의 전시 전경, 2024 / 사진. ⓒEnric Duch
이 외에도 음악가이자 안무가로서도 활동하는 지젤 비엔느의 필름과 퍼포먼스가 베를린 중심지에 위치한 소피엔젤레에서 펼쳐졌다. 지난 9월 작가의 필름 <Jerk>를 상영하며 아티스트 토크를 개최했고, 11월 퍼포먼스 <군중(Crowd)>이 공연되었다. <군중>은 테크노 음악의 강렬하고 반복적인 비트로 감각적 경험을 극대화하며 스스로를 군중의 일원으로 위치시키는 개인의 정체성, 그리고 사회적·심리적 억압에 대한 탐구를 전개하였다. 이 시대의 폭력을 일종의 엔터테인먼트로 다루는 수많은 작품과 비엔느의 작품이 차별화되는 지점은, 우리에게 단순히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고조시키며 어떠한 시선으로 폭력과 그 가해자와 피해자를 바라보는지 재고하게 한다는 점이다.
지젤 비엔느의 퍼포먼스 작품 <군중(Crowd)>(2017) 속 한 장면 / 작품. ©DACM/Gisèle Vienne, 사진. ©Estelle Hanania/VG Bild-Kunst
지젤 비엔느의 퍼포먼스 작품 <군중(Crowd)>(2017) 속 한 장면 / 작품. ©DACM/Gisèle Vienne, 사진. ©Estelle Hanania/VG Bild-Kunst
공허한 눈빛을 지닌 인형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무관심한 우리의 시선이 이들에게 폭력이 행사될 수 있게 하고 폭력에 길들여 지게 만든 것은 아닌가. 우리 역시 이들처럼 소외되고 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잊고 있는 건 아닐까. 스스로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하는 지젤 비엔느의 3부작 전시는 우리가 소외된 존재와 공동체를 돌아봐야 함을 상기시킨다.

지난 11월 미국의 47대 대통령에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는 선거 캠페인 동안 230여 년 전 제정된 적성국국민법(Alien Enemies Act of 1798)에 따라 불법 이민자를 추방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아이러니한 점은 트럼프의 조부 프리드리히 트럼프도 1885년 독일에서 미국으로 불법 이민했다는 사실이다.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발생하는 우경화의 상황에서 나타나는 소외화 현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전쟁 중인 가자와 레바논에서 2023년 10월 이후 전쟁으로 사망한 어린이의 수는 15,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며 타자와 약자·소외된 이들을 배척하고, 부도덕함에 더 이상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예술은 깨어있기를 끊임없이 종용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국민이 부여한 권력을 악용해 국민을 소외시키고 폭력으로 겁박하려는 계엄령이 발동되기도 했다. 우리는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며 타자와 약자를 배척하고 소외된 이들을 외면하며 부도덕함에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지젤 비엔느의 작업은, 예술은, 폭력에 대한 무관심을 버리고 깨어 있기를 끊임없이 종용한다.

변현주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