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인 청자 사자모양 향로.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국보인 청자 사자모양 향로.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반만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인기 있는 ‘메이드 인 코리아’ 상품은 무엇일까. 반도체가 등장하기 전까지 정답은 고려청자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던 건 사람과 동식물의 모양을 본따 만든 상형(象形)청자. 당대 세계 최고 부국(富國)이자 문화 강국으로 콧대 높았던 북송(960~1127) 사람들도 고려청자만큼은 입이 마르게 칭찬했다.

12세기 북송에서 온 사신, 서긍이 남긴 기록이 대표적이다. 그는 까다로운 성격이었다. 고려의 전통차를 대접받고는 면전에서 “떫고 쓰다”고 혹평할 정도였다. 하지만 사자 모양 청자를 보고는 이렇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그릇 가운데 가장 정교하고 빼어나다. 우리나라 황실의 도자기에 견줄 만하다.”

중국 사신의 끝없는 자부심도 꺾을 만큼 탁월한 예술품이었던 고려의 상형청자.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푸른 세상을 빚다, 고려 상형청자’는 그 정수를 한 자리에서 보여주는 전시다. 출품된 작품은 274점에 달한다. 국보 11점, 보물 9점을 비롯해 미국·일본·중국에서 빌려온 걸작 청자 등 작품의 면면도 화려하다.

고려청자의 비밀은 ‘투명도’

가장 먼저 전시 1부에서 관람객들을 맞는건 삼국시대 흙을 빚어 만든 상형토기다. 서유리 학예사는 “상형청자의 뿌리는 흙으로 모양을 빚어 ‘예술적인 그릇’을 만드는 삼국시대의 전통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DNA’가 청자로 꽃피우기 시작한 건 고려시대인 10세기 무렵 중국에서 도자기 제작 기술을 수입하면서부터다.
국보인 청자 참외모양 병.
국보인 청자 참외모양 병.
전시 2부 ‘제작에서 향유까지’는 상형청자의 등장 배경과 특징을 살핀다. 모든 예술과 기술이 그렇듯 고려청자도 시작은 모방이었다. 전시장에 나와 있는 북송 청자와 초기 고려청자의 모습이 비슷하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고려 도공들은 곧 독창적인 걸작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청자 참외모양 병’이 대표적인 사례다. 북송의 비슷한 병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나팔처럼 벌어진 입, 긴 목, 골이 파이고 양감이 있는 몸체, 주름치마 같은 굽이 만들어내는 유려한 곡선에 고려만의 미감을 그대로 담았다는 평가다.

고려청자만의 매력을 만들어내는 비결은 ‘투명도’다. 고려 도공들이 개발한 기법 덕분에 고려청자는 원재료가 흙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투명함과 은은한 회청색을 갖출 수 있었다. 불투명한 북송 도자기와 달리 고려청자에서 섬세한 세부 묘사와 정교한 입체감이 돋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청자 원숭이 석류모양 연적.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청자 원숭이 석류모양 연적.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어떤 탁월한 예술이든 홀로 우뚝 설 수는 없는 법. 다른 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문물을 받아들이고 경쟁할 때 걸작이 나온다. 고려청자의 발전에는 고려 특유의 개방성이 한 몫 했다. 수도인 개경(지금의 개성)은 국제적인 도시였고, 인근의 벽란도는 중국·동남아시아·아랍 상인들이 도자기 등을 수출입하는 무역 기지였다. 외국 도자기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고려 도공들의 시행착오가 담겨 있는 청자 조각들, 침몰한 무역선에서 발굴한 국내외 명품 청자 등이 함께 나와 있다.

청자로 만나는 1000년 전 고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3부 ‘생명력 넘치는 형상들’이다. 사방을 유리로 만든 쇼케이스들 속에 고려 상형청자를 대표하는 걸작이 각각 들어있다. 국보 ‘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는 고려청자 기술의 결정체다. 향을 태우는 몸체, 연기가 나가는 뚜껑 부분, 받침을 각각 만들어 붙이고 몸체에는 연꽃잎을 하나하나 붙여 아름다운 모양을 만들어냈다. 음각과 양각, 투각(구멍을 뚫는 기법)과 첩화(덧붙여서 무늬를 만드는 기법) 등 온갖 기술이 집약된 결과물이다.
청자 원앙모양 향로뚜껑.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청자 원앙모양 향로뚜껑.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런 작품들에는 당대 고려인들의 생활상과 생각이 그대로 담겨 있다. 예컨대 전시장에 나온 작품 중 상당수는 향을 피우는 향로다. 박물관 관계자는 “고려인들은 향을 즐겨 사용했고, 옷에 향을 쐬어 향수처럼 쓰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장원급제를 상징하는 오리를 비롯해 원숭이, 복숭아, 석류, 연꽃, 죽순 등 고려 사람들이 좋아해 가까이 두고 싶어 했던 동식물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다.

마지막 4부 ‘신앙으로 확장된 세상’에는 도교와 불교에 관한 청자 유물들이 나와 있다. 도교 인물을 형상화한 ‘청자 사람모양 주자’,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맞서던 13세기 제작된 불교 수행자상 ‘청자 나한상’등을 주목할 만하다.
국보인 청자 사람모양 주자.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국보인 청자 사람모양 주자.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년간 연구성과 한눈에

김재홍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지난 25일 열린 개막 기자간담회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의 역량을 결집한 전시”라고 자신했다. 이유가 있다. 지난 20년간 국립중앙박물관을 중심으로 진행된 상형청자 연구 결과가 이번 전시에 담겨있다는 설명이다.

예컨대 3D 스캔, CT 촬영, 3차원 형상 데이터 등 첨단 기술을 동원한 박물관의 연구 덕분에 수백 년간 베일에 가려졌던 상형 청자의 제작 과정과 내부 구조 등을 알 수 있게 됐다. 예컨대 ‘청자 사자모양 향로’의 몸체는 몸통과 얼굴, 다리를 각기 만들어 붙인 뒤 꼬리를 끼워 완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전시장에 설치된 인터랙티브 영상을 통해 연구 결과와 주요 상형청자들의 내부 구조를 자유롭게 살펴볼 수 있다.
국보인 청자 어룡모양 주자.
국보인 청자 어룡모양 주자.
올해 하반기 최고의 고미술 전시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박물관 관계자는 “건너편 기획전시실에서 오는 30일 개막하는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이 해외 미술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전시라면, 상형청자 전시는 한국 미술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전시”라며 “두 블록버스터전을 연달아 관람한다면 각별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3월 3일까지. 성수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