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미 볼펜으로 40년간 그려서 지우고, 지우며 그린 빛나는 '호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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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한국신사 유람일기
인당뮤지엄 <최병소 초대전___now here>
인당뮤지엄 <최병소 초대전___now here>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고 정성들여 짓던 시절의 한자 이름들은 작명자의 바람이 담겨 한 사람의 인생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름들은 당사자들의 가슴에 새겨져 어린 시절부터 인생을 조타하는 방향키가 되어 줄곧 삶의 지도가 되어준다. 때로는 그 이름값에 대해 큰 고민 없이 살아온 누군가에게 인생의 뒤안길에서 '아 이래서 그랬구나~’ 무릎을 탁 치고 그 의미를 되짚어보게 만들기도 한다.
최병소!
그는 미술 애호가뿐 아니라 작가들 사이에서도 한결같은 진지함으로 작가 정신의 대명사로 통하는 작가이다. 그의 이름의 한자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제는 이름을 한자와 함께 병기하는 일이 드문 까닭에, 수없이 많은 그의 전시와 작업에 대한 소개, 그리고 기사들을 찾고 읽은 후에야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그가 호작질(경상도 방언으로 낙서, 혹은 쓸데없는 장난을 이른다)이라고 겸허하게 부르던 그의 작업, 즉 신문지에 담긴 내용을 모나미 볼펜(그는 40년간 줄곧, 가장 흔하고 구하기 쉬운 모나미 볼펜으로 작업해 왔다)으로 지우듯 그리고, 또 지우고 그리는 작업에 그가 왜 매달릴 수밖에 없었는지 가늠하게도, 또 고개를 끄덕이게도 만든다. 잡을 병(秉) 밝을 소(昭) : 빛을 잡다, 밝음을 꼭 쥐다.
이름에 담긴 뜻 그대로 그는 지혜로 치환된 빛을 그러쥐기 위해 그렇게 그리면서 지우고, 지우면서 그려왔었나 보다. 집요한 반복 작업을 하다 지치기도 하고, 아마도 잠시 길을 잃은 기분이기도 했으리라. 그는 이 고된 호작질을 한동안 그만두기도 했었지만 결국은 그 과정에서 기쁨을 찾고 희열을 얻어 철인(哲人: 어질고 사리에 밝은 사람)의 경지에 도달한 것 같다. 그는 40년 넘게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서두르지 않고 이어온 그 작업을 통해 그의 이름이 설명하는 그대로 ‘밝음을 그러쥔 사람’이 된 것이다.
작가의 고향이면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온 대구에 위치한 인당뮤지엄에서 최병소 작가의 회고전 'now here'가 진행 중이다. 그저 전시 하나를 보기 위해 달려가기엔 가깝지만은 않은 거리였다. 그러나 내 삶의 군데군데 이정표처럼 나타나 '묵묵히 하던 일을 하라, 무소의 뿔처럼 가던 길을 꾸준히 가라'는 교훈을 던져주던 그 검고 거칠고 오묘한 작품의 주인공, 오랫동안 흠모해온 최병소 작가의 초기작들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에 주저 없이 기차표를 예매했었다. 호기심을 안고 들어간 익숙한 공간에는 도저히 호작질이라고 폄훼할 수는 없을, 길고 거대한 작품이 자리했다. 대표작인 놀라운 길이의 검정색 작품은 물론 아무것도 인쇄되지 않은 신문지에 다 쓴 볼펜으로 긋고 또 그어 작업한 백지 작품도, 보는 이의 마음을 겸허하게 그리고 차분히 자중하게 만든다. 흔히 그를 개념미술의 주요 작가로 언급하는 이유도, 호방한 젊은 시절에 어떠했는지 돌아보면서 결국 그가 '지우기/그리기 혹은 칠하기'를 선택한 이유도 이 전시를 보면 가늠해볼 수 있다. 특히 대표작에 가려져 소개되지 않았던 다양한 시도의 작품들을 통해 그의 필력과 미적 감성을 확인할 수 있으며, 좀처럼 만나기 힘들던 귀한 자료들이 여러 점 자리하여 연대기적 조망이 가능하다. 오프닝 행사장에서 만난 작가는 다른 작가들의 축하와 환영 속에서 환한 웃음을 지으며 전시장 떠나기를 한동안 주저했다. 노환으로 몸이 전 같지 않지만 여전히 예의 지우기/그리기를 멈추지 않던 그는, 지나간 시절의 다양한 작업들이 거대한 공간에 소개된 모습을 보며 그만큼 큰 여운을 느꼈으리라. 최병소 작가가 서울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 그로부터 큰 배움을 얻었다는 한 중견작가는 그의 작품을 ‘반복적인 노동의 과정을 통해 물질을 정신으로 치환한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던 신문지에 흔하디흔한 모나미 볼펜과 연필심을 재료로 하여, 끝없는 노동으로 갈아 넣으며 지우듯 그려낸 그의 작품을 설명하기엔 그만한 표현도 없어 보였다. 오래된 나뭇등걸 같기도 하고, 수백 년 탄화된 화석 같기도 한 그의 작품은 수천수만의 몸짓으로 이미 종이와 잉크, 흑연의 구성 요소를 탈피해 전혀 다른 분자 구조 그 무엇이 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시대에 항거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택한 지우기/칠하기를 통해 이룬 세계는 어쩌면 가장 가치 있고 진정한 민중 미술의 형태이면서, 일관되게 추구해온 개념 작업의 귀결이라는 의미에서 미술사적으로도 심도 있는 연구와 분석이 더 필요해 보인다. 민초들과 함께 숨 쉬어온 시대 정신의 과정, 대표작을 이루기 위해 거쳐야 했던 여정의 작품들, 특히 그의 1980년대 작품들이 여러 점 소개된 이 전시는 그리고 지우고, 지우면서 그리는 작업으로 대표작에 도달하기까지의 다양한 시도와 생각들을 빼곡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예술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일까? 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을 자꾸만 되뇌게 하는 최병소 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수십 년 호작질로 이뤄낸 그만의 세계, 앞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그 우주가 궁금해졌다. 앞서 스승의 작업을 설명해주었던 한 후배이자 제자인 중견작가가 던진 작별 인사가 아직도 귓전에 스친다. “다음 전시에 뵙겠습니다.” 지금 여기(now here)에 선 그는 그곳에서 또 어떤 미래를 그려줄 것인지…… 전시를 보고 함께 궁금해해 보자.
한국신사 이헌 칼럼니스트
• 전 시 명 : 최병소 기획초대전 [now here], 무료전시
• 전시기간 : 2024년 10월 23일(수) ~ 2025년 1월 15일(수), 매주 일요일 휴관
• 전시장소 : 대구보건대학교 인당뮤지엄 전관
• 전시작품 : 설치 작품 4점, 드로잉 22점, 평면작품 38점(총 64점)
• 문의 : 053-320-1857(학예실)
최병소!
그는 미술 애호가뿐 아니라 작가들 사이에서도 한결같은 진지함으로 작가 정신의 대명사로 통하는 작가이다. 그의 이름의 한자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제는 이름을 한자와 함께 병기하는 일이 드문 까닭에, 수없이 많은 그의 전시와 작업에 대한 소개, 그리고 기사들을 찾고 읽은 후에야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그가 호작질(경상도 방언으로 낙서, 혹은 쓸데없는 장난을 이른다)이라고 겸허하게 부르던 그의 작업, 즉 신문지에 담긴 내용을 모나미 볼펜(그는 40년간 줄곧, 가장 흔하고 구하기 쉬운 모나미 볼펜으로 작업해 왔다)으로 지우듯 그리고, 또 지우고 그리는 작업에 그가 왜 매달릴 수밖에 없었는지 가늠하게도, 또 고개를 끄덕이게도 만든다. 잡을 병(秉) 밝을 소(昭) : 빛을 잡다, 밝음을 꼭 쥐다.
이름에 담긴 뜻 그대로 그는 지혜로 치환된 빛을 그러쥐기 위해 그렇게 그리면서 지우고, 지우면서 그려왔었나 보다. 집요한 반복 작업을 하다 지치기도 하고, 아마도 잠시 길을 잃은 기분이기도 했으리라. 그는 이 고된 호작질을 한동안 그만두기도 했었지만 결국은 그 과정에서 기쁨을 찾고 희열을 얻어 철인(哲人: 어질고 사리에 밝은 사람)의 경지에 도달한 것 같다. 그는 40년 넘게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서두르지 않고 이어온 그 작업을 통해 그의 이름이 설명하는 그대로 ‘밝음을 그러쥔 사람’이 된 것이다.
작가의 고향이면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온 대구에 위치한 인당뮤지엄에서 최병소 작가의 회고전 'now here'가 진행 중이다. 그저 전시 하나를 보기 위해 달려가기엔 가깝지만은 않은 거리였다. 그러나 내 삶의 군데군데 이정표처럼 나타나 '묵묵히 하던 일을 하라, 무소의 뿔처럼 가던 길을 꾸준히 가라'는 교훈을 던져주던 그 검고 거칠고 오묘한 작품의 주인공, 오랫동안 흠모해온 최병소 작가의 초기작들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에 주저 없이 기차표를 예매했었다. 호기심을 안고 들어간 익숙한 공간에는 도저히 호작질이라고 폄훼할 수는 없을, 길고 거대한 작품이 자리했다. 대표작인 놀라운 길이의 검정색 작품은 물론 아무것도 인쇄되지 않은 신문지에 다 쓴 볼펜으로 긋고 또 그어 작업한 백지 작품도, 보는 이의 마음을 겸허하게 그리고 차분히 자중하게 만든다. 흔히 그를 개념미술의 주요 작가로 언급하는 이유도, 호방한 젊은 시절에 어떠했는지 돌아보면서 결국 그가 '지우기/그리기 혹은 칠하기'를 선택한 이유도 이 전시를 보면 가늠해볼 수 있다. 특히 대표작에 가려져 소개되지 않았던 다양한 시도의 작품들을 통해 그의 필력과 미적 감성을 확인할 수 있으며, 좀처럼 만나기 힘들던 귀한 자료들이 여러 점 자리하여 연대기적 조망이 가능하다. 오프닝 행사장에서 만난 작가는 다른 작가들의 축하와 환영 속에서 환한 웃음을 지으며 전시장 떠나기를 한동안 주저했다. 노환으로 몸이 전 같지 않지만 여전히 예의 지우기/그리기를 멈추지 않던 그는, 지나간 시절의 다양한 작업들이 거대한 공간에 소개된 모습을 보며 그만큼 큰 여운을 느꼈으리라. 최병소 작가가 서울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 그로부터 큰 배움을 얻었다는 한 중견작가는 그의 작품을 ‘반복적인 노동의 과정을 통해 물질을 정신으로 치환한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던 신문지에 흔하디흔한 모나미 볼펜과 연필심을 재료로 하여, 끝없는 노동으로 갈아 넣으며 지우듯 그려낸 그의 작품을 설명하기엔 그만한 표현도 없어 보였다. 오래된 나뭇등걸 같기도 하고, 수백 년 탄화된 화석 같기도 한 그의 작품은 수천수만의 몸짓으로 이미 종이와 잉크, 흑연의 구성 요소를 탈피해 전혀 다른 분자 구조 그 무엇이 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시대에 항거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택한 지우기/칠하기를 통해 이룬 세계는 어쩌면 가장 가치 있고 진정한 민중 미술의 형태이면서, 일관되게 추구해온 개념 작업의 귀결이라는 의미에서 미술사적으로도 심도 있는 연구와 분석이 더 필요해 보인다. 민초들과 함께 숨 쉬어온 시대 정신의 과정, 대표작을 이루기 위해 거쳐야 했던 여정의 작품들, 특히 그의 1980년대 작품들이 여러 점 소개된 이 전시는 그리고 지우고, 지우면서 그리는 작업으로 대표작에 도달하기까지의 다양한 시도와 생각들을 빼곡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예술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일까? 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을 자꾸만 되뇌게 하는 최병소 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수십 년 호작질로 이뤄낸 그만의 세계, 앞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그 우주가 궁금해졌다. 앞서 스승의 작업을 설명해주었던 한 후배이자 제자인 중견작가가 던진 작별 인사가 아직도 귓전에 스친다. “다음 전시에 뵙겠습니다.” 지금 여기(now here)에 선 그는 그곳에서 또 어떤 미래를 그려줄 것인지…… 전시를 보고 함께 궁금해해 보자.
한국신사 이헌 칼럼니스트
• 전 시 명 : 최병소 기획초대전 [now here], 무료전시
• 전시기간 : 2024년 10월 23일(수) ~ 2025년 1월 15일(수), 매주 일요일 휴관
• 전시장소 : 대구보건대학교 인당뮤지엄 전관
• 전시작품 : 설치 작품 4점, 드로잉 22점, 평면작품 38점(총 64점)
• 문의 : 053-320-1857(학예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