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프란스
정지용

옮겨다 심은 종려나무 밑에
비뚜로 선 장명등(長明燈).
카페 프란스에 가자.

이놈은 루바쉬카.
또 한 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비쩍 마른 놈이 앞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먼트에 흐느끼는 불빛
카페 프란스에 가자.

이놈의 머리는 비뚜른 능금.
또 한 놈의 심장은 벌레 먹은 장미.
제비처럼 젖은 놈이 뛰어간다.

“오오 패롯[鸚鵡] 서방! 굳 이브닝!”
“굳 이브닝!”(이 친구 어떠하시오?)

울금향(鬱金香) 아가씨는 이 밤에도
경사(更紗) 커튼 밑에서 조시는구료!

나는 자작(子爵)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이 슬프구나!

오오, 이국종(異國種) 강아지야.
내 발을 빨아다오.
내 발을 빨아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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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이 교토 카페에서 쓴 시 [고두현의 아침 시편]
정지용 시인이 일본 유학 중에 발표한 시입니다. 1926년 6월 유학생 잡지 <학조(學潮)>에 실렸고, 일본 문예지에도 소개됐습니다. 그는 1923년부터 1929년까지 6년 동안 교토(京都)의 도시샤(同志社)대 영문과에서 공부했습니다. 모교인 휘문고보 교비 장학생으로 선발돼 가서 18세기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전공했지요.

영문학도인 그의 시에 초기 모더니즘적 경향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 시에도 이국적인 이미지와 낯선 외국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이전 시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단어도 즐비합니다.

카페는 1920년대 중반부터 일부 지식인과 문인 사이에 인기를 얻던 문화 공간입니다. 포장된 도로를 의미하는 페이브먼트는 일제의 도로 정비사업으로 생긴 ‘신작로’, 패롯은 앵무새, 울금향은 튤립, 루바쉬카는 그 시절 대학생 사이에 유행한 러시아풍의 품이 넓은 남자 블라우스를 말합니다.

‘비뚜른 능금’ ‘벌레 먹은 장미’ ‘제비처럼 젖은 놈’으로 묘사된 세 사람도 하나같이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지요. 비 오는 밤 ‘뱀눈처럼 가는’ 밤비를 맞으며 이들은 카페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여급으로 보이는 ‘울금향 아가씨’에게 별로 환영받지 못합니다. 귀족의 아들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며, 나라도 집도 없는 식민지 청년일 뿐이니까요.

그래서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이 슬프구나!’라는 구절이 더 서럽게 다가오고, 이국종 강아지를 불러 비애의 감정을 안으로 다스리는 모습이 한층 애잔하게 느껴집니다.

이 시는 발표 당시 젊은이들에게 널리 애송됐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향수’는 오히려 당대인에게 그다지 호응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너무 지겨워서 벗어나고 싶은 궁핍의 현실이 겹쳐졌기 때문이겠지요.

충북 옥천 산골에서 태어난 그가 대한해협을 건너 가난한 유학 생활을 하면서 시름에 젖던 카페 프란스의 흔적을 찾아봤지만 남아 있지 않습니다. 도시샤대 인근 시조(四條) 거리에 이름이 비슷한 ‘카페 프랑수아즈’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1930년에 문을 열었으니 이미 정지용이 교토를 떠난 뒤에 생겼지요. 다만 지금까지 실내 장식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하니, 그가 이와 비슷한 분위기의 카페에서 ‘흐느끼는 불빛’ 아래 이 시를 썼구나 하고 짐작할 뿐입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