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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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예금 사랑은 좀처럼 식지 않는다. 지난해 기준 가계자산에서 현금과 예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52.6%로 절반을 넘는다. 자산 관리 선진국인 미국(12%)은 물론이고 한국(46.3%)과 비교해도 예금 비중이 높다. 자타 공인 ‘예금 바보(預金バカ)’의 나라다.
"'예금바보' 일본인들, 퇴직연금 만큼은…" 돌변한 이유
연금을 운용할 때는 다르다. 한국보다 더 적극적으로 위험자산에 투자한다. 퇴직연금 유형 가운데 개인이 직접 관리하는 확정기여(DC)형에서 원리금 보장형에 투자하는 비중은 일본(40.2%)이 한국(81.9%)의 절반밖에 안 된다. 나머지는 미래에 높은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는 실적 배당형에 투자한다. 정부가 퇴직연금 자금을 실적 배당형으로 유도하기 위한 정책을 끊임없이 내놓은 덕분이다.

○日에 뒤처진 한국

일본이 처음부터 퇴직연금 수익률 개선에 적극적이었던 건 아니다. 일본 연금 구조는 크게 3개 층으로 이뤄져 있다. 기초연금 격인 국민연금, 회사원이 가입하는 후생연금보험이 공적연금으로 첫 2개 층을 이룬다. DC형과 확정급여(DB)형을 포함한 기업형퇴직연금, 한국의 개인형퇴직연금(IRP) 격인 iDeCo가 3층에 사적연금으로 쌓이는 구조다.

일본 경제가 호황을 맞고 인구가 빠르게 늘어난 1980년대까지는 연금 수익률에 주목할 이유가 없었다. 자산의 절반 이상은 안전자산에 투자해야 한다는 강력한 규제에도 주식시장에 낀 거품 덕에 국민은 날로 부자가 됐다.

상황이 바뀐 건 2000년대 초반부터다. 거품 경제가 붕괴되면서 퇴직연금 수익률이 급격히 나빠지고 퇴직연금을 폐지하는 기업이 속출했다. 일본 정부는 2001년 DC형 연금법을, 2002년에는 DB형 연금법을 도입해 퇴직연금 제도의 기초를 다졌다.

2016년에는 DC형 연금법을 개정해 근로자들이 퇴직연금 관련 교육을 받고, 퇴직연금을 쉽게 운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예를 들어 일본 퇴직연금 사업자는 운용 상품을 최대 35개까지만 제공할 수 있다. 지나치게 많은 상품을 늘어놓으면 근로자들이 뭘 골라야 할지 몰라 운용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어서다. 통상 금융사에서는 기업별로 20개 안팎의 상품을 제공한다. 한국은 이런 제한이 없다. 한 금융사에서 많게는 1000개에 가까운 상품을 제안하고 있다.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수석연구원을 지낸 류재광 일본 간다외국어대 교수는 “일본은 2018년 DB형 연금에서 자산 운용 기본 방침을 의무화하고 기본 포트폴리오를 설정하도록 강제했다”며 “한국은 2년 전에야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계획서(IPS) 도입이 의무화되는 등 퇴직연금 관련 규제가 한발 뒤처져 있다”고 분석했다.

○디폴트옵션 원리금 보장은 한계

일본 연금제도의 한계도 분명하다. 퇴직연금 디폴트옵션(사정 지정 운용제)은 일본 제도를 국내로 잘못 도입한 사례로 꼽힌다. 일본은 한국보다 8년 앞선 2014년 DC형 퇴직연금에 디폴트옵션을 도입했다. 하지만 도입 강제성이 없고 예금 등 원금 보장형도 디폴트옵션에 포함됐다. 2022년 기준 디폴트옵션을 도입한 기업은 40%에 그쳤고, 이 중에서도 원리금 보장형을 선택한 기업이 65%에 달했다.

한국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정부는 디폴트옵션 제도를 2022년 7월부터 시범 운영한 뒤 지난해 7월 정식 도입했다. 올해 2분기 말 기준 디폴트옵션 가입자는 지난해 말보다 18% 늘어난 565만 명으로 집계됐지만, 전체 가입자의 87%가 원리금이 보장되는 ‘초저위험형’에 몰렸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펀드연금실장 연구위원은 “저위험 및 중위험 포트폴리오를 감안하면 디폴트옵션에서 원리금 보장 상품 비중은 94%까지 높아진다”며 “원리금 보장형에 묶인 개인 연금자산의 분산을 의도한 도입 목적과 거리가 멀어졌다”고 설명했다.

도쿄=나수지 기자 suj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