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에타가 왜 뭔가를 발견하는 줄 알아요? 자기 일만 하지 않거든. 왜냐하면 남들이 누리는 기회의 끄트머리만 손에 겨우 쥘 수 있으니까. 우리는 남자들만 만질 수 있는 망원경을 쓸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인류의 정신에는 성별이란 게 없고, 저 하늘도 성별을 안 가린다고요."

지난 29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서 개막한 국립극단 연극 <사일런트 스카이>는 20세기 초 천문학자 헨리에타 레빗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브라운관에서 이름을 알린 배우 안은진이 7년만에 주인공으로 연극무대에 복귀한 것으로 화제를 모았다.
'찬밥 신세' 여성 천문학자, 은하 넘어의 은하를 증명하다 [리뷰]
헨리에타는 미국 위스콘신의 농장에서 벗어나, 꿈에 그리던 하버드대학교 천문대에서 일하게 된다. '대형굴절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찰하고 싶었던 바람과 달리, 그는 윌러미나와 애니 등 여성동료와 함께 계산원으로 일한다. 남자 동료 피터 쇼는 여성들을 '컴퓨터'라고 칭하며 남자들이 촬영한 별의 좌표 기록을 성실하게 담당해야 한다고 말한다.
'찬밥 신세' 여성 천문학자, 은하 넘어의 은하를 증명하다 [리뷰]
"이 일 할 수 있겠어요, 미스 레빗? 이 일에는 일관성이 필요해요. 창의성이 아니라."(애니 캐넌)

헨리에타는 하버드 천문대에서 낮에는 별의 좌표를 기록하고, 밤에는 시간에 따라 밝기를 달리하는 세페이드 변광성의 변화를 기록하는 자신만의 연구를 시작한다. 연구실의 동료 애니와 윌러미나도 점차 그녀의 열정에 동화되고 오만했던 피터 쇼도 헨리에타를 향한 연정을 품게 된다. 연구를 지속하기에 여러가지 어려움이 닥치지만 헨리에타는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연구를 발전시켜 나간다. 동생 마거릿의 피아노 연주로 별들의 밝기와 음계의 유사성을 터득한 그녀는 마침내 변광성의 밝기로, 멀리 떨어져 있는 은하까지 거리를 측정하는 방법을 세계 최초로 발견해낸다.

<사일런트 스카이>는 여성 캐릭터들을 중심으로 하늘의 시(詩)인 천체물리학과 땅 위의 인간들의 시인 음악을 통해 탄탄한 서사를 마련했다. 절제된 연출 속에서도 무대 단차를 사용해 3가지 공간을 보여준 점도 탁월했다. 바닥은 '천문학 연구실' 중간 층은 '헨리에타의 집' 그리고 가장 윗 쪽은 '여객선'이라는 공간으로 활용됐다. 5명의 등장인물이 이 세 가지 무대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채워갔다. 조명이 사라져도 무대위 별들이 빛나는 연출도 눈길을 사로잡는 요소였다.
'찬밥 신세' 여성 천문학자, 은하 넘어의 은하를 증명하다 [리뷰]
윌러미나 역의 박지아와 애니 역의 조승연은 또렷한 대사 전달과 연기력으로 작중 인물 그자체였다. 웃음을 유발하는 유머 섞인 대사도 자연스러웠다. 음향이 작은 편이라 아쉬운 와중에도 이들의 연기와 움직임은 뒷자리까지 잘 전달됐다. 주인공 역할의 안은진도 무난한 연기력을 보여줬다. 다만 길게 이어지는 대사에도 강약의 완급 조절이 부족해보였다. 첫 공연의 떨림 때문일까 목소리는 작았고 지속적인 떨림이 묻어났다. 대사를 다시 말하는 부분도 종종 있었다.

무대 양 옆 한글 자막이 뜨는 화면은 몰입을 어렵게하는 요소였다. 배우들의 연기에 집중하다가도 한글이 있다보니 저절로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배우들이 자신만의 표현으로 대사를 바꾸는 부분을 발견하는 기쁨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엔 대사를 제대로 읊었는지를 신경쓰게 돼 배우들에 오롯이 집중하지 못한 아쉬움도 생겨났다.
'찬밥 신세' 여성 천문학자, 은하 넘어의 은하를 증명하다 [리뷰]
연극은 별 속에 파묻히는 듯한 연출로 마무리된다. 헨리에타의 발견과 그의 치열한 인생에 대해 깊은 여운을 남기는 대목이다. 헨리에타의 발견 전까지, 학계는 다른 은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발견으로 우주는 밝혀진 것보다 광활하단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 은하 경계 너머에도 우주가 존재하며 우리 은하계는 우주라는 바다 위를 떠도는 작은 섬 중 하나였다는 것. 지구와 태양조차 수많은 별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에 이어, 인류가 몸담은 우주조차 마찬가지 였다는 냉정한 사실은, 찰나의 순간을 살다 사라지는 인간이 써내려간 불굴의 도전과 대조돼 묘한 감동을 준다. 공연은 12월 28일까지 한 달의 여정을 이어간다.

이해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