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아세안과 'AI 거버넌스'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회원국들은 올해 상반기 ‘역내 인공지능(AI) 거버넌스와 윤리 지침’에 서명했다. 열 개 동남아시아 국가가 모인 아세안이 신속하게 지역 내 디지털 전환(DX)에 중요한 한 획을 그은 것이다. 아세안의 의사결정 방식이 만장일치제인 까닭에 10개국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느라 의견의 일치에 도달하는 일이 그동안 쉽지 않았음을 상기해 보면 대단히 고무적인 사건이다. 사정을 구체적으로 파악해 보면 더욱 흥미롭다. 회원국 중 4개 국가는 AI에 대한 국가 정책이 없다. 구속력이 없다지만 역내 공동체에 상위 규범의 제정을 일임한 것이다. 역내 공동체에 대한 신뢰와는 별도로 AI 거버넌스와 윤리가 아세안 국가들에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아세안 회원국이 모여 있는 동남아는 전 세계에서 전자상거래가 가장 빠르게 증가하는 지역이다. 주요국 인구가 정체·감소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인구가 크게 늘어나는 아세안 회원국이 다수다. 국가별 정보기술 정책에 따르면 비(非) 디지털 시대에는 전형적인 ‘추격자’(follower)였으나 디지털 전환이라는 새로운 기회를 성장의 계기로 삼으려고 디지털 인프라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오프라인 거래가 온라인, 특히 모바일 상거래로 전환되면서 거래가 쉬워져 플랫폼을 중심으로 전자상거래가 고속 성장하고 있다. AI를 적용하면서 고객 맞춤형 마케팅이나 챗봇 등 AI 서비스가 다양하게 도입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했고 아세안도 유럽연합(EU) 등 다른 지역처럼 ‘역내 인공지능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자 결정했다. 그런데 생성형 AI가 인기를 얻으면서 ‘느린’ 아세안이 ‘급속도로 빠르게’ 이 이슈를 처리했다.

생성형 AI의 등장으로 딥페이크, 가짜 정보의 전달이 가능해지자 아세안 국가들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브루나이와 싱가포르를 제외하면 다른 나라들은 개발도상국이다. 브루나이는 왕정이다. 싱가포르는 경제 발전 수준은 높지만 정치적 측면에서 보자면 ‘민주화 지수’가 높지 않다. 아세안 국가들은 AI가 다가오는 시대에 성장을 견인할 잠재성이 대단히 큰 것으로 평가했으나 한편으로는 AI가 정부에 관해 잘못된 정보를 유포하거나 반정부적으로 활용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이에 따라 신속하게 AI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함으로써 신기술의 위험을 최대한 줄이고자 했다.

아세안의 AI 거버넌스와 윤리 가이드라인이 제시하는 원칙들 그 자체는 EU의 가이드라인이나 국내적으로 인공지능 거버넌스와 윤리 가이드라인을 마련한 국가의 내용과 비슷하다. 원칙은 일곱 가지로 투명성과 설명 가능성, 공정성과 평등, 안전성, 인간 중심, 사생활 보호와 데이터 거버넌스, 책임성과 통합성, 강건성과 신뢰성이다. 원칙은 비슷하지만 원칙을 이행하는 데는 아세안 특유의 방식이 있다. 그중 하나는 만장일치 의사결정 방식처럼 이 가이드라인의 국내 이행을 철저히 회원국 자율에 맡기는 것이다. 그러면 회원국의 규제 환경과 조율하고 또 회원국의 기업 경영을 저해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런 유연한 이행에도 불구하고 국내 이행을 주도할 AI 분야에 종사하는 기술 인력의 규모가 국가 간에 차이가 너무나 크게 나는 것이 문제다. 바람직하고 효율적인 제도는 갖췄지만 이런 제도를 활용할 ‘실력’은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이에 따라 아세안 국가들이 인공지능을 활용할 때 각종 거버넌스와 윤리 규정을 본연의 취지대로 준수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