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이 ‘산업의 쌀’이라면 에틸렌은 ‘석유화학제품의 쌀’로 통한다. 페트병 등 각종 플라스틱 제품과 비닐 등의 원재료가 에틸렌이기 때문이다. 현재 에틸렌을 가장 싸게 만드는 곳은 중국이다. 현지에서 만든 에틸렌을 한국 업체보다 30% 싸게 내놓다보니 롯데케미칼 LG화학 등 국내 기초유분 제조업체들이 당해낼 재간이 없다.

2~3년 뒤부터는 중국산보다 훨씬 저렴한 중동산 저가 에틸렌이 쏟아진다.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가 짓고 있는 8개 정유·석유화학 통합 공장(COTC)이 2027년부터 순차적으로 가동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에틸렌을 비롯한 한국산 기초유분은 이제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자조 섞인 한숨이 석유화학업계에서 나오는 이유다.
"중국보다 더 위험하다"…이대로면 한국 기업들 '치명타'

중동발 공급 과잉에 떠는 업계

“석유화학 분야에서도 세계 1위가 되겠다”는 아람코의 자신감은 COTC 공법에서 나온다. 아람코는 사우디아라비아(3개)와 중국(4개), 한국(1개)에서 짓고 있는 8개 석유화학 공장에 모두 COTC 설비를 들여놓기로 했다. 여기에서 생산하는 에틸렌만 연 1150만t에 달한다. 국내 1위 LG화학(연 330만t)과 같은 회사가 3~4개 더 생기는 셈이다.

COTC의 유일한 단점은 투자비가 많이 드는 것인데, 자금력이 풍부한 아람코엔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람코는 작년에만 169조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COTC는 비싼 만큼 제 몫을 한다. 일반 석유화학회사는 원유를 정제해 휘발유 경유 등유와 함께 화학제품 원료인 나프타를 만든다. 또 나프타를 다시 분해해 에틸렌 프로필렌 같은 기초유분을 생산한다. COTC는 중간 과정 없이 원유에서 바로 기초유분을 뽑아낸다. 생산비가 낮을 수밖에 없다.

원유에서 기초유분을 생산하는 비율도 점점 끌어올리고 있다. 옛 공법을 쓰는 국내 석유화학업체는 원유 10t에서 기초유분을 잘해야 1t 정도 만드는데, 아람코는 4~5t을 뽑을 수 있는 기술을 확보했다. 아람코의 목표는 이 비율을 80%까지 끌어올리는 것이다.

원재료인 원유를 직접 조달하니 원가 경쟁력은 비교불가다. 원유 운송비도 안 든다. 전문가들은 아람코의 에틸렌 생산 손익분기점이 t당 100달러대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 t당 300달러 안팎인 한국의 절반 이하다.

중국도 아람코와 손잡아

에틸렌 생산 세계 1위인 중국은 중동발(發) 물량 공세에 발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이들은 아람코와 미국 엑슨모빌, 독일 바스프 등과 손잡고 COTC 설비를 확충하고 있다. 중국 장저우에 짓고 있는 푸젠성 석유화학 기지가 대표적이다. 푸젠에너지석유화학은 아람코, 시노펙 등과 손잡고 8조원짜리 COTC 시설을 짓고 있다. 연 150만t의 에틸렌을 생산할 수 있다. 푸젠에너지석유화학은 푸젠성 석유화학기지 인근에 아람코와 연 110만t의 COTC 시설을 하나 더 짓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중국은 이미 6개 COTC 설비를 가동 중이다. 이들 설비에서 생산하는 에틸렌은 연 1030만t이다. 여기에 아람코와 합작하는 공장까지 합치면 10여 개 COTC 공장이 수년 안에 가동될 전망이다.

한국 기업들의 시름은 더욱 깊어질 전망이다. 원가 경쟁력으로 보나 자본력으로 보나 아람코와 중국에 모두 밀리기 때문이다. “아람코의 자회사인 에쓰오일을 뺀 나머지 국내 석유화학업체들이 살 길은 하루빨리 기초유분 사업을 접고 스페셜티(고부가가치 제품)에 올인하는 것뿐”이란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업계에선 중동에서 생산한 기초유분이 시장에 풀리는 2~3년 안에 국내 기업들의 수익성은 더욱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경쟁업체가 두손 들 때까지 가격 인하 경쟁을 벌이는 ‘치킨게임’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서다. 업계 관계자는 “아람코는 COTC 시설을 통해 안정적인 원유 수요처만 확보하면 수익이 안 나도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며 “국내 석유화학기업들이 보다 발빠르게 구조조정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우섭/오현우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