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텍사스주 퍼미안 분지 러빙 카운티의 오일탱크  /  사진=Reuters
미국 텍사스주 퍼미안 분지 러빙 카운티의 오일탱크 / 사진=Reuters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석유·가스 생산 규제를 대폭 완화하겠다며, 선거 기간 내내 '드릴 베이비 드릴'(Drill, baby, Drill) 구호를 외치고 다녔다. 석유 기업들이 거액의 선거 기부금을 내며 트럼프의 당선을 바랐고,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주요 기업들은 석유 탐사와 증산에 회의적이다. 트럼프 덕분에 값싼 에너지 가격의 혜택을 기대했으나 미국의 증산으로 인한 유가 하락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신 관세 때문에 미국이 사실상 독점했던 캐나다산 원유가 시장에 풀려 아시아의 에너지 수입국들이 반사이익을 얻을 것이란 기대가 나온다. 트럼프 당선인이 캐나다와 멕시코를 상대로 관세를 부과할 경우 미국의 원유 수입이 급감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트럼프 당선인이 미국 기름값 급등 우려 속에서 관세 부과를 강행할지에 여부에 관심이 쏠린다.

미국이 독점 수입하는 캐나다 원유, 시장에 풀릴까

내년 캐나다·멕시코 원유가 싼값에 시장에 풀릴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트럼프 당선인이 지난 25일 캐나다·멕시코산 수입품에 25%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로이터통신은 최근 "아시아 국가들은 트럼프가 캐나다·멕시코 원유에 관세를 부과할 경우 반사이익을 볼 것"이라고 보도했다.

캐나다·멕시코산 원유를 수입만 할 수 있다면 '횡재'다. 캐나다 서부 원유 가격은 지난 29일 기준 배럴당 56.77달러에 불과하다. 석유가 내륙에서 생산되는 데 수출을 위한 기반 시설이 부족해 미국 외 마땅한 시장을 확보하지 못한 탓이다. 멕시코 원유 역시 평균도 64.31달러로 같은 시기 배럴당 68달러 정도에 거래된 미국 서부텍사스원유(WTI)보다 낮은 수준이다. 캐나다 등에서 나는 고유황 중질유는 아시아의 정유사들의 플랜트에서 사용하기에도 적당하다. 시장조사업체 LSEG의 안 팜 애널리스트는 이를 근거로 "관세가 현실화한다면 많은 양의 원유가 중국과 인도로 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멕시코 국영석유회사 페멕스(PEMEX) / 사진=로이터
멕시코 국영석유회사 페멕스(PEMEX) / 사진=로이터
그러나 미국 정부가 실제 관세를 부과할 가능성은 작다고 전문가들은 내다봤다. 관세를 부과할 경우 미국 내 휘발유 가격이 급등해 여론이 나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관세 예고는 트럼프 당선인 특유의 과장된 위협이란 관측이다.

세계 최대 산유국인 미국은 자국산 저유황 경질유를 유럽과 아시아 등에 비싸게 팔고, 캐나다·멕시코의 고유황 중질유를 헐값에 사서 쓴다. 미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캐나다와 멕시코는 미국 원유 공급국 1·2위로, 각각 미국의 전체 원유 수입의 52%와 11%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해 캐나다는 미국에 1285억달러 규모의 원유를 수출했고, 멕시코 원유 수출액도 382억달러에 달했다. 캐나다 석유생산자협회의 리사 배이턴은 "관세 부과 시 캐나다의 생산이 줄면서 미국 소비자들의 휘발유·에너지 비용은 늘어나고 북미 에너지 안보는 위협받을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 베네수엘라 마두로와 협상하나

트럼프 당선인이 캐나다·멕시코와의 무역 관계를 손보겠다고 위협한 배경에 베네수엘라가 있을지 모른다는 의혹도 나온다. 베네수엘라는 세계 최대 석유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지만 미국의 강력한 제재로 원유 생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독재자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지난 7월 대선에도 출마해 승리를 선언했으나, 바이든 정부는 부정 선거를 이유로 마두로를 당선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트럼프 정부 안팎에선 마두로와 협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트럼프 당선인의 자택을 자주 드나드는 에너지 재벌이자 공화당 큰손 기부자 해리 사전트 3세와 등 석유 사업가들과 채권 투자자들이 이런 요구를 전달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산 원유 수입을 재개하면 미국이 캐나다와 멕시코 원유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진다. 경제 파탄 상태인 베네수엘라인들이 끊임없이 미국에 불법 입국하는 것도 부담이다. 베네수엘라 내부에선 제재만 풀어주면 불법 체류자를 추방하는 미국발 항공편을 받아주겠다는 의견이 나오는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이 베네수엘라산 석유를 수입해줄 경우 베네수엘라산 석유가 중국에 할인 판매되는 것도 막을 수 있어 일석 이조다. 마두로 역시 최근 "트럼프 1기 행정부 때는 관계가 좋지 않았지만 이제는 새로운 시작"이라며 관계 개선 의지를 드러냈다.
캘리포니아주의 필립스66 윌밍턴 정유소  / 사진=AFP
캘리포니아주의 필립스66 윌밍턴 정유소 / 사진=AFP

미국 석유 기업들 증산 전망은 어두워

한편 미국 석유 기업의 증산으로 인한 유가 하락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평가된다.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 지명자는 현재 사상 최고인 일일 1330만배럴 수준의 미국의 석유 생산량을 하루 300만배럴 더 늘리는 이른바 '3-3-3 계획을' 내놓기도 했다. 연방정부 소유 토지에서의 원유 생산을 대폭 허용하는 등의 규제 완화를 공언했다.

그러나 미국 최대 석유기업 엑슨모빌의 자원탐사·개발 부문(엑손 업스트림) 리암 말론 대표는 지난 26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에너지 인텔리전스 포럼'에서 "규제가 완화되면 경제성이 확보되는 한 더 많이 원유를 시추할 수 있다"면서도 "실제로 '드릴 베이비 드릴' 모드에 돌입한 사람을 볼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말론 대표가 미국 석유기업들의 생산 증가에 회의적인 것은 모두가 유가 하락을 우려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는 "대부분, 아니 모든 사람이 주로 자신이 하는 일의 경제적 측면에만 집중한다"고 말했다. 프랑스 토탈에너지의 패트릭 푸야네 최고경영자(CEO)도 같은 자리에서 “그(트럼프)는 미친 듯이 시추하도록 유도할 수 있는 마법의 레시피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미국의 원유 생산량은 정치인들의 결정에 좌우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OPEC은 또 '삐그덕'

국제유가는 단기적으로는 OPEC과 러시아 등의 카르텔인 OPEC+의 감산 해제 여부가 관건이다. OPEC+는 당초 1일 열릴 예정이던 OPEC+ 카르텔의 회의를 오는 5일로 미뤘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카자흐스탄이 텡기스 평원에 새로 개발한 유전 생산을 감안해 할당량을 늘려달라고 요청하면서 마찰이 빚어지고 있다.

작년 아프리카 2위 산유국인 앙골라가 할당량을 놓고 다툼을 벌인 끝에 OPEC을 탈퇴했고, 이라크가 불만을 제기하기도 했다. 당초 예상대로 OPEC+ 회원국들이 현재 감산 수준을 최소 몇 달 더 연장하는 데 합의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