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견습 중인 것으로 보이는 소년의 팔에는 파스와 밴드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소년의 작은 몸체 주변에는 온통 굉음을 내는 기계들과 그 기계들이 뱉어내는 불똥들이 난무한다. 시간이 흐르고, 지칠 대로 지친 소년의 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그가 간신히 쥐고 있는 그라인더가 불안하게 흔들리지만, 소년은 감기는 눈을 주체하기 힘들다.
영화 '3학년 2학기' 스틸컷 / 사진출처. 서울독립영화제 YouTube 캡처
영화 '3학년 2학기' 스틸컷 / 사진출처. 서울독립영화제 YouTube 캡처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3관왕을 수상했던 <3학년 2학기>는 직업고등학교를 다니는 ‘창우’가 3학년 2학기를 맞으며 겪는 인생 수난을 기록하는 영화다. 분명 이야기는 진로 선택을 앞둔 10대 소년의 여정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영화는 좌충우돌 성장영화도, 상큼발랄한 청춘영화도 아니다. 대신 <3학년 2학기>는 어린 소년의 눈으로 바라본 한국 사회의 병폐와 취약점을 신랄하게 기록하는 노동자의 비극이자, 르포타주이다.

직업계 고등학교 3학년인 ‘창우(유이하)’ 는 담임의 추천에 따라 취업보조금과 대학 입학, 그리고 병역특례까지 받을 수 있다는 꿈 같은 중소기업에 지원한다. 처음으로 방문한 ‘꿈의 직장’에는 창우와 친구들을 친절하게 맞아주는 주임까지 있다. 그는 연신 싱글벙글한 미소로 아이들에게 간식을 권하고 이곳이 그들에게 얼마나 안락하고 유익한 직장이 될 수 있는지 일장연설을 늘어놓는다.
영화 '3학년 2학기' 스틸컷 / 사진출처. ⓒ 서울독립영화제 SEOUL INDEPENDENT FILM FESTIVAL
영화 '3학년 2학기' 스틸컷 / 사진출처. ⓒ 서울독립영화제 SEOUL INDEPENDENT FILM FESTIVAL
창우는 늘 생활비에 쪼들리는 엄마를 생각해서 바로 현장실습을 시작한다. 그리고 실습의 첫날, 창우의 지옥살이가 시작된다. 그의 사수, 송대리는 일이 익숙지 않은 창우와 그의 단짝, 우재에게 인신공격을 퍼붓기 시작하고, 안전하다는 공장은 경계조차 없는 난간과 보호 장갑 하나 주어지지 않은 작업으로 아이들은 하루하루를 실습의 성과가 아닌, 생존을 위해 버텨야 한다.

계속되는 언어 학대를 참지 못하고 떠나버린 우재와는 달리 창우는 버틴다. 엄마가 사다 주는 싸구려 시장 통닭이 아닌 허니 콤보를 먹고 싶다는 동생을 위해서, 방 세 개짜리 집으로 이사를 하고 싶다는 가족을 위해서 그는 졸음을 참고, 베인 부상을 감추고, 조사를 나온 노무사에게 거짓말을 하며 버티고 또 버틴다.
영화 '3학년 2학기' 스틸컷 / 사진출처. ⓒ 서울독립영화제 SEOUL INDEPENDENT FILM FESTIVAL
영화 '3학년 2학기' 스틸컷 / 사진출처. ⓒ 서울독립영화제 SEOUL INDEPENDENT FILM FESTIVAL
<3학년 2학기>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콜 센터로 실습을 나갔다가 극악한 노동환경을 버티지 못하고 자살한 ‘소희’의 이야기를 다룬 <다음 소희>를 떠올리게 한다. 특히 실업계 아이들이 학교와 기업의 공생 관계 사이에서 얼마나 위험천만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지, 그리고 위험에 처한 아이들이 궁극적으로 희생자가 되었을 때 사회는 얼마나 무자비하고 무력한지에 대해 두 작품은 극도의 리얼리즘적 접근을 통해 전한다.
영화 '다음 소희'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다음 소희'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다만, <다음 소희>가 소희가 죽고 나서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의 눈으로 그녀의 생전 일상을 추적하는 방식, 즉 소희의 잔혹했던 노동 일상을 그리는 것을 중심으로 했다면 <3학년 2학기>는 창우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실업계 고등학생의 노동 일과와 동시에 (수능을 보지 않는 집단으로서의) 제도권 밖의 삶에 방점을 둔다. 예컨대 영화는 전반에 걸쳐 이들의 일상을 수능을 응원하거나 수능을 보도하는 뉴스들과 병치한다.

수능 시즌이 되면 전국을 도배하는 응원 플래카드의 문구, “이 나라의 미래는 당신입니다”를 보며 창우와 그의 직업계 친구들은 늘 부러움과 소외감을 동시에 토로한다. 온 나라가 응원하는 당신의 삶이란 궁극적으로 인문계를 나와서 수능을 보고 대학에 가는 제도 내의 삶인 것이다. 악의 없이 이어져 오는 뉴스와 응원 문구들은 오랫동안 이들을 이미 사회에 나가기도 전부터 암묵적인 소외와 차별의 대상으로 각인시켜 왔는지도 모른다.

장기 투쟁을 하던 해고 노동자가 7일의 휴가를 받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전작 <휴가>로 그 능력을 인정받았던 이란희 감독은 이번 <3학년 2학기>를 통해서 노동자의 고된 삶에 대한 첨예한 기록을 이어 나가고 있다. 다만 이번 작품이 특별한 것은 노동 환경과 노동자 인권의 열악함을 고발하는데 더 해 이들을 바라보는 혹은 이들을 바라보지 않으려 하는 세속적이고도 제도적인 차별에 무게를 둔다는 점이다.
영화 '3학년 2학기' 스틸컷 / 사진출처. ⓒ 서울독립영화제 SEOUL INDEPENDENT FILM FESTIVAL
영화 '3학년 2학기' 스틸컷 / 사진출처. ⓒ 서울독립영화제 SEOUL INDEPENDENT FILM FESTIVAL
영화의 말미에서 창우는 어쨌거나 버텨내어 목표했던 모든 일, 즉 대학교도 가고 병역 특례까지 받아낸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평일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학교에서 종일 수업을 받아야 하는, 또래와는 다른 삶을 산다. 그리고 이후로도 그는 직업계 출신의 노동자로 기회를 얻지 못해 축출당하거나 당연한 차별에 시달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창우의 미래에 대해서 아무런 힌트를 주지 않지만, 이 사회의 미래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희미한 단서는 남기는 듯하다. 그것은 이 나라의 미래는 (수능을 보는) 당신만이 아닌, 노동 현장에 있는, 국적과 나이, 학력과 성별과 무관한 이 세상 모든 노동자라는 사실이다.
영화 '3학년 2학기' 스틸컷 / 사진출처. ⓒ 서울독립영화제 SEOUL INDEPENDENT FILM FESTIVAL
영화 '3학년 2학기' 스틸컷 / 사진출처. ⓒ 서울독립영화제 SEOUL INDEPENDENT FILM FESTIVAL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