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 중앙은행(SAMA)이 보유 해외 자산에서 미국 국채 비중을 4년9개월 만에 최고 수준으로 높였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하던 사우디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의 부상과 함께 다시 미국에 밀착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달러패권' 흔들던 사우디…트럼프 뜨자 미국채 샀다
1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사우디 중앙은행은 지난해 4분기부터 미국 국채를 빠르게 사들여 지난 10월 말 기준 보유액을 1439억달러까지 늘렸다. 4년 만에 가장 많은 수준이며 작년 8월 약 1100억달러에 비해 300억달러 이상 늘어난 규모다. 사우디 중앙은행이 보유한 총 외환보유액 가운데 미국 국채 비중은 35%에 달해 2020년 2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사우디 중앙은행은 2020년 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금융시장 쇼크가 발생하자 보유하고 있던 1850억달러 규모 미국 국채 중 3분의 1에 가까운 600억달러어치가량을 수개월 사이에 매각했다. 사우디 정부는 공황에 빠진 증시에 약 400억달러를 투입했고, 유가 폭락으로 인한 재정적자도 메꿔야 했다. 사우디 전체 외환보유액은 2020년 초 약 5000억달러에서 10월 말 약 4110억달러로 감소했다. 이듬해 유가 급반등으로 사우디의 외화 수급이 안정을 되찾았음에도 사우디 중앙은행은 지난해 중반까지 미국 국채 보유량을 복구하지 않았다.

사우디가 수년간 평소보다 적은 수준의 미국 국채를 보유한 것은 2021년 들어선 조 바이든 행정부와의 마찰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2018년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가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자말 카슈끄지를 암살하자 빈살만 왕세자를 ‘살인자’라고 직격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임기 초반까지 빈살만 왕세자와 만남을 피하는 등 거리를 두기도 했다.

사우디는 석유 자원 힘으로 대항하며 러시아, 중국 등에 접근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급등한 유가 때문에 바이든 대통령이 자존심을 굽히고 리야드를 방문하는 등 여러 차례 원유 증산을 요청했지만, 사우디는 러시아 등과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비OPEC 산유국 협의체 OPEC+를 이끌고 감산에 들어갔다.

사우디가 미국 국채를 사들이기 시작한 시기는 트럼프 당선인 지지율이 바이든 대통령을 앞선 시기와 대략 일치한다. 블룸버그통신은 “사우디의 국채 증가는 11월 미국 대선 전에 이뤄졌지만, 이는 향후 트럼프 차기 행정부와의 관계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해석했다. 빈살만 왕세자는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미국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