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무용 부토로 묻는다 "우리는 뇌를 지배하는가, 지배받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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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일본 고유의 전위 무용 부토
부토의 '양대 산맥' 다이라쿠다칸
지난달 28일~이달 1일 신작 <뇌> 공연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한 과정 담아
과학적이고도 철학적인 공연
일본 고유의 전위 무용 부토
부토의 '양대 산맥' 다이라쿠다칸
지난달 28일~이달 1일 신작 <뇌> 공연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한 과정 담아
과학적이고도 철학적인 공연
큐피드가 심장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느닷없이 명중한 사람의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한다. 죽는 걸까. 숨을 쉴 수가 없는데. 이 와중에 심장 뛰는 이 소리가 너무 커서 앞에 서 있는 그에게 들릴까봐 어디론가 숨고 싶다. 사랑과 연애의 감정은 큐피드가 던진 장난질인가, 호르몬의 신호전달이 일으키는 농간질인가. 이 감정은 내 몸의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나의 심장인가, 나의 두뇌일까.
도쿄 시부야에서 전철로 두 정거장, 산겐자야에 위치한 세타가야 퍼블릭 시어터. ‘부토(舞踏)’를 이끄는 일본의 중심축, 다이라쿠다칸이 2년 만에 신작 <뇌(Brain)>를 무대에 올렸다(11월 28일~12월 1일). 이 작품은 두뇌 안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고, 과학적으로 확인되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호기심에서 비롯됐다.
무대 바닥에 장착된 인체 모양의 거울, 뉴런과 혈류를 형상화한 무대세트 사이로 뇌의 모습을 표현한 의상을 입은 열일곱 명의 부토 무용수들이 모습이 압도적인 미장센을 자랑하며 등장한다. 모든 무용수는 공연 80분간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 위에서 함께 하며, 신체 각 부위가 되기도 하고, 뇌의 명령어에 순응하며 움직이기도 하다가, 어느 순간 그 명령을 전복하며 몸의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며 질문한다. 뇌와 나의 관계는 무엇일까. 나는 뇌의 지배를 받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일까. 과학적이지만 동시에 철학적인 이 흥미로운 주제에 매몰되다가 눈에 들어온 건 무용수들의 분장이 남다르다는 점이다. 모두 얼굴을 하얗게 칠했고, 남성 무용수들은 대부분 민머리 상태였다. 부토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부토에서는 왜 이런 모습으로 무대에 서는 걸까.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선 부토가 처음 탄생한 1950년대 이후의 일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에서 패망한 일본은 구심점을 잃었다. 모두가 나라와 전쟁을 위해 살았고, 그것을 위해 혼신을 바쳤던 시기이다. 죽음은 그들의 가까이에 있었다. 죽음을 불사한 충성심이 패망이라는 결과를 낳자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뭘 하고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연극, 음악, 무용, 예술가들은 그들의 언어로 정체성과 방향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은 ‘앙그라(언더그라운드) 문화’를 만들어냈다. 부토도 앙그라 문화의 한 축을 담당했다. 종종 포털 검색 사이트에서 부토는 가부키와 노가 현대무용과 만나서 탄생한 장르로 설명되어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가부키와 노 그 자체를 춤에 접목했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찾고자 하는 부토의 움직임 안에 일본의 정서와 문화가 자연스럽게 배어들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이런 점에서 부토는 ‘일본식 현대무용’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는데, 서구권에서는 부토를 ‘동양에서 발생한 유일한 현대춤’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초창기에 부토는 안고쿠부토(암흑부토)라고 불렸다. 죽음과 허무주의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제 일본 내에서 부토의 움직임과 흐름은 상당히 많은 변화를 보인다. 이번 다이라쿠다칸의 <뇌>도 부토의 변화와 확장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다이라쿠다칸의 수장이자 이 작품의 연출, 대본, 안무를 맡은 마로 아카지(1943~)는 청년 시절 앙그라 문화의 중심에 있었다. 원래 배우 출신으로 요즘 그는 TV 드라마와 영화에도 종종 얼굴을 비친다. 매스미디어의 활동을 통해 이미 관객의 마음을 읽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파인아트(순수예술)와 마이크로미디어 영역인 부토에서도 그 역량을 백분 발휘하고 있다.
무거운 옷을 벗고 아기 같은 위트와 장난으로 관객을 맞이했다. 작품 중에 뇌를 향해 무용수들이 직접 노래를 만들어 부르게도 했고, 사람이 두뇌를 사용해 고안해 낸 여러 가지 산물을 한마디씩 말하는 장면에서는 ‘덴푸라(튀김)’라는 단어를 외쳐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600석 규모의 이 공연장이 나흘간 객석을 꽉 채운 건 다이라쿠다칸의 시도가 설득력 있음을 증명하기도 했다. 부토에 대한 서구권의 관심은 여전히 유효해서 객석에서 외국인 관객들을 심심치 않게 마주쳤다.
현재 다이라쿠다칸과 산카이주쿠는 부토를 이끄는 양대산맥이다. 공연장 로비에서 마주친 일본 연극계의 한 인사는 “산카이주쿠의 작품은 신비하고 미적이고, 다아라쿠다칸은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살려 재밌는 작품을 선보인다”는 의견을 건넸다. 마로 아카지는 부토를 부토 안에 갇혀 바라보지 않고, 컨템포러리 예술 안에서 다양한 가능성과 변화의 영역을 구체화하고 있었다. 부토 1세대들이 점점 영면에 들어가고 있는 지금, 마로 아카지 이후 부토는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질문이 떠오르는 시점이기도 하다. 부토에서 얼굴을 하얗게 칠하고, 머리를 밀고, 때로는 나체로 등장하는 건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해 우선 빈 몸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다. 부토에서 말하는 ‘빈 몸’에 대해서는 이번 작품을 통해 확실히 알게 된 점이 있다. 다이라쿠다칸에는 우리나라 양종예 무용수가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원래 한국무용을 전공했던 그가 일본에서 탄생한 춤을 추고 있기 때문에 그 경계선은 어떻게 발현될지 궁금해졌다.
그런데 무대 위에서 이 무용수의 움직임과 호흡에는 한국무용의 자태가 흐르고, 무용수 양종예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다시 보니 무대 위에 있는 부토 무용수 각자의 몸과 움직임 안에 자신만의 역사가 담겨있는 걸 발견했다. 부토에서 개별성을 지우고 빈 몸을 만드는 과정은 획일성을 끌어낸다는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개별성을 지운 그곳에 개별성은 살아있었다.
그 비워진 몸에는 이미 각자의 살아온 몸성과 몸의 역사가 골격으로 존재하고, 골격 안에 어지럽게 쌓아져 있는 자기 자신을 비우고 다시 자기 자신을 채워 넣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마로노부토이기도 하고 동시에 종예노부토이기도 하고 무대에 올라선 각자의 부토이기도 했다. 작품의 후반에서는 한 부토 무용수가 손바닥에 조명을 넣어 빛을 깜빡깜빡 켜면서 움직이는 무용수들 사이사이에 개입한다. 미지의 깜빡거림, 그 빛에 반응하며 몸은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것은 부토가 처음 세상에 등장하고, 다아라쿠다칸이 처음 세워질 때 앙그라 문화가 갖던 정신이 아니었을까.
정해진 명령에 의문을 품고 기꺼이 미지의 세계로 몸을 던졌을 때 예술의 새로운 일면을 만나게 되고, 미처 내가 몰랐던 나를 만나게 된다. 할 수 있는 모든 시도와 실험이 컨템포러리 예술 안에 들어가고 있는 현재, 부토가 부토로 남는 이유는 그 실험이 ‘나를 찾는다’에서 시작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미지의 세계는 자기 자신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작품 <뇌>에서 말하고자 한 것도, 부토의 근원인 빈 몸을 만드는 과정도 결국 자기 탐색의 현장일 것이다. 이단비 무용칼럼니스트
도쿄 시부야에서 전철로 두 정거장, 산겐자야에 위치한 세타가야 퍼블릭 시어터. ‘부토(舞踏)’를 이끄는 일본의 중심축, 다이라쿠다칸이 2년 만에 신작 <뇌(Brain)>를 무대에 올렸다(11월 28일~12월 1일). 이 작품은 두뇌 안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고, 과학적으로 확인되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호기심에서 비롯됐다.
무대 바닥에 장착된 인체 모양의 거울, 뉴런과 혈류를 형상화한 무대세트 사이로 뇌의 모습을 표현한 의상을 입은 열일곱 명의 부토 무용수들이 모습이 압도적인 미장센을 자랑하며 등장한다. 모든 무용수는 공연 80분간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 위에서 함께 하며, 신체 각 부위가 되기도 하고, 뇌의 명령어에 순응하며 움직이기도 하다가, 어느 순간 그 명령을 전복하며 몸의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며 질문한다. 뇌와 나의 관계는 무엇일까. 나는 뇌의 지배를 받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일까. 과학적이지만 동시에 철학적인 이 흥미로운 주제에 매몰되다가 눈에 들어온 건 무용수들의 분장이 남다르다는 점이다. 모두 얼굴을 하얗게 칠했고, 남성 무용수들은 대부분 민머리 상태였다. 부토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부토에서는 왜 이런 모습으로 무대에 서는 걸까.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선 부토가 처음 탄생한 1950년대 이후의 일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에서 패망한 일본은 구심점을 잃었다. 모두가 나라와 전쟁을 위해 살았고, 그것을 위해 혼신을 바쳤던 시기이다. 죽음은 그들의 가까이에 있었다. 죽음을 불사한 충성심이 패망이라는 결과를 낳자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뭘 하고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연극, 음악, 무용, 예술가들은 그들의 언어로 정체성과 방향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은 ‘앙그라(언더그라운드) 문화’를 만들어냈다. 부토도 앙그라 문화의 한 축을 담당했다. 종종 포털 검색 사이트에서 부토는 가부키와 노가 현대무용과 만나서 탄생한 장르로 설명되어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가부키와 노 그 자체를 춤에 접목했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찾고자 하는 부토의 움직임 안에 일본의 정서와 문화가 자연스럽게 배어들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이런 점에서 부토는 ‘일본식 현대무용’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는데, 서구권에서는 부토를 ‘동양에서 발생한 유일한 현대춤’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초창기에 부토는 안고쿠부토(암흑부토)라고 불렸다. 죽음과 허무주의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제 일본 내에서 부토의 움직임과 흐름은 상당히 많은 변화를 보인다. 이번 다이라쿠다칸의 <뇌>도 부토의 변화와 확장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다이라쿠다칸의 수장이자 이 작품의 연출, 대본, 안무를 맡은 마로 아카지(1943~)는 청년 시절 앙그라 문화의 중심에 있었다. 원래 배우 출신으로 요즘 그는 TV 드라마와 영화에도 종종 얼굴을 비친다. 매스미디어의 활동을 통해 이미 관객의 마음을 읽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파인아트(순수예술)와 마이크로미디어 영역인 부토에서도 그 역량을 백분 발휘하고 있다.
무거운 옷을 벗고 아기 같은 위트와 장난으로 관객을 맞이했다. 작품 중에 뇌를 향해 무용수들이 직접 노래를 만들어 부르게도 했고, 사람이 두뇌를 사용해 고안해 낸 여러 가지 산물을 한마디씩 말하는 장면에서는 ‘덴푸라(튀김)’라는 단어를 외쳐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600석 규모의 이 공연장이 나흘간 객석을 꽉 채운 건 다이라쿠다칸의 시도가 설득력 있음을 증명하기도 했다. 부토에 대한 서구권의 관심은 여전히 유효해서 객석에서 외국인 관객들을 심심치 않게 마주쳤다.
현재 다이라쿠다칸과 산카이주쿠는 부토를 이끄는 양대산맥이다. 공연장 로비에서 마주친 일본 연극계의 한 인사는 “산카이주쿠의 작품은 신비하고 미적이고, 다아라쿠다칸은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살려 재밌는 작품을 선보인다”는 의견을 건넸다. 마로 아카지는 부토를 부토 안에 갇혀 바라보지 않고, 컨템포러리 예술 안에서 다양한 가능성과 변화의 영역을 구체화하고 있었다. 부토 1세대들이 점점 영면에 들어가고 있는 지금, 마로 아카지 이후 부토는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질문이 떠오르는 시점이기도 하다. 부토에서 얼굴을 하얗게 칠하고, 머리를 밀고, 때로는 나체로 등장하는 건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해 우선 빈 몸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다. 부토에서 말하는 ‘빈 몸’에 대해서는 이번 작품을 통해 확실히 알게 된 점이 있다. 다이라쿠다칸에는 우리나라 양종예 무용수가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원래 한국무용을 전공했던 그가 일본에서 탄생한 춤을 추고 있기 때문에 그 경계선은 어떻게 발현될지 궁금해졌다.
그런데 무대 위에서 이 무용수의 움직임과 호흡에는 한국무용의 자태가 흐르고, 무용수 양종예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다시 보니 무대 위에 있는 부토 무용수 각자의 몸과 움직임 안에 자신만의 역사가 담겨있는 걸 발견했다. 부토에서 개별성을 지우고 빈 몸을 만드는 과정은 획일성을 끌어낸다는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개별성을 지운 그곳에 개별성은 살아있었다.
그 비워진 몸에는 이미 각자의 살아온 몸성과 몸의 역사가 골격으로 존재하고, 골격 안에 어지럽게 쌓아져 있는 자기 자신을 비우고 다시 자기 자신을 채워 넣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마로노부토이기도 하고 동시에 종예노부토이기도 하고 무대에 올라선 각자의 부토이기도 했다. 작품의 후반에서는 한 부토 무용수가 손바닥에 조명을 넣어 빛을 깜빡깜빡 켜면서 움직이는 무용수들 사이사이에 개입한다. 미지의 깜빡거림, 그 빛에 반응하며 몸은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것은 부토가 처음 세상에 등장하고, 다아라쿠다칸이 처음 세워질 때 앙그라 문화가 갖던 정신이 아니었을까.
정해진 명령에 의문을 품고 기꺼이 미지의 세계로 몸을 던졌을 때 예술의 새로운 일면을 만나게 되고, 미처 내가 몰랐던 나를 만나게 된다. 할 수 있는 모든 시도와 실험이 컨템포러리 예술 안에 들어가고 있는 현재, 부토가 부토로 남는 이유는 그 실험이 ‘나를 찾는다’에서 시작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미지의 세계는 자기 자신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작품 <뇌>에서 말하고자 한 것도, 부토의 근원인 빈 몸을 만드는 과정도 결국 자기 탐색의 현장일 것이다. 이단비 무용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