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당신의 PC, 안녕하십니까
어린이 1만3319명, 여성 7216명. 원치 않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희생자들. 또 하나의 전쟁, 사상자 110만 명. 이념과 체제는 아무 상관 없었다. 전쟁 속에서도 민간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제네바협약’과 ‘로마규정’은 지켜지지 않았다.

야만의 시대, 민주주의가 도전받고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는 후퇴하고 있다.

2022년 이탈리아에서 극우정당 이탈리아형제들이 정권을 접수한 데 이어 올여름에는 프랑스에서 극우 국민연합(RN)이 의회 제1당을 차지할 뻔했다. 최근엔 나치즘을 추종하는 오스트리아 자유당이 권력을 잡았다. 유럽이 20세기 초로 회귀하고 있다.

천 명에겐 천 개의 정의가 있다

이들은 반이민, 반이슬람, 민족주의를 내세워 대중을 사로잡았다. 결국 민주주의의 적(敵)은 ‘밥줄’이었다. 굶주린 시민에겐 공격할 대상이 필요하다. 반이민, 반이슬람은 포퓰리즘의 어깨에 올라탔다. 이제 ‘관용’이라는 유럽의 전통은 쓰레기통에서나 찾아야 할 판이다. ‘내 몫’이라는 포기할 수 없는 이기심 앞에 민주주의는 너무나 허약했다.

모두 “그건 원래 내 것이었어”라고 외친다. 정당한 자기 몫이 약탈당했다고 핏대를 세운다. 정말 그런가? 한국 의사들은 파업(?) 중이다. 3억~4억원에 달하는 연봉을 줄이려는 정부를 못 참겠다고 들고일어났다. 다른 이유는 곁가지다. 면허로 독점 연봉을 국가가 보장한 것은 잊은 모양이다. 그 권한을 위임한 이가 국민이라는 것도. 그래도 계엄은 당치 않다.

내 몫을 다 차지하고 다른 이의 이익을 보장하기는 어렵다. PC는 민주주의의 옆얼굴이다. 다수와 다른 별종도 자기 존엄을 지킬 권리가 있다. PC는 다수가 별종에게 주는 ‘배려’가 아니다. 상식을 지키고 야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 자기를 경계할 뿐.

나의 정의만 올바른 것은 아냐

미국 연방 대법원은 여성의 낙태를 부정했고, 대학의 소수인종 우대를 위헌으로 판결했다. 반세기를 지속해 온 ‘올바름’은 백래시 당했다. 반동은 각 분야로 확산하고 있다. 주인공을 흑인으로 바꾼 디즈니 실사영화 ‘인어공주’는 폭망했고, 애거사 크리스티 작품에서 인종차별 표현을 삭제하고 수정한 출판사 하퍼콜린스는 격렬한 비판에 직면했다. 끊임없이 요구하는 PC에 대한 피로가 비등점에 이른 결과다.

물론 <심청전>에서 ‘심봉사’ 캐릭터를 바꿀 순 없는 노릇이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척추장애인이 쏘아올린 작은 공>으로 고칠 수 없는 것처럼. 언어는 자기 몸피와 그림자가 있다. 스스로 역사를 기술한다. ‘사팔뜨기’를 ‘시각장애인’으로 바꿔 쓸 수 있으나 오롯한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는 것은 그래서다. 그런데도 바꿔 쓴다고? 그렇다. 할 수 있는 것은 하자. 그러나 도서관에서 차별 서적을 금서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말자. 청소년 소설을 많이 쓴 이금이 작가는 대표작 네 편을 고쳐 썼다.

인류는 도덕과 윤리를 발명해 진화했다. 자기 몫 이상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몫조차 다른 이에게 내줬다. 문명은 그렇게 꽃피었다. 은퇴를 번복하고 돌아온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묻는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한국경제신문은 ‘꿀 먹은 벙어리’를 ‘꿀 먹은 흥부’로 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