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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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투자 자금이 미국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다. 반도체, 배터리, 석유화학 등 한국 경제를 지탱해온 주력산업이 흔들리는 가운데 정치적 대혼란까지 이어지자 외국인에 이어 국내 자산가들까지 ‘탈(脫)한국 러시’에 나서는 분위기다.

5일 한국예탁결제원과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지난달 미국 주식형 펀드에 순유입된 국내 투자금은 1조9814억원이었다. 월간 기준 역대 최대 규모다. 이 분위기는 이달에도 이어져 지난 1주일 사이 4315억원 증가했다. 국내 투자자가 주식을 직접 사들이는 경우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서학 개미들의 미국 주식 보유 규모는 연일 역대 최대치를 경신해 이달 3일엔 1070억4735만달러(약 151조4200억원)에 달했다. 지난해 말 680억달러에서 57% 급증했다.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대선 승리와 최근 국내 정국의 혼란은 국장 엑소더스에 불을 붙였다. 3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서울 강남 프라이빗뱅킹(PB) 센터에는 자산을 미국 펀드로 옮기려는 고객 문의가 빗발쳤다. 한 PB는 “올해 상장사 실적 부진, 금융투자소득세 논란 등에 이어 계엄에 따른 혼란까지 불거지자 자산가들의 인내가 바닥났다”며 “금융 투자 자산을 대부분 미국 주식과 펀드로 바꾸겠다는 고객이 많다”고 전했다.

국내 증시 수급엔 비상이 걸렸다. 거래 대기자금인 투자자 예탁금은 이날 49조8987억원으로 8월 이후 10조원 넘게 급감했다. 외국인이 유가증권시장에서 최근 6개월간 12조원어치를 순매도하는 등 유동성이 말라붙는 분위기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금융산업실장은 “시장에 유동성이 제대로 공급되지 못하면 기업이 연구개발(R&D)에 뒤처지고 증시는 하락하는 악순환에 빠진다”며 “정부와 국회가 증시를 부양할 대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액 투자자 "美 주식비중 100%로 해달라"
계엄사태 후 PB에 문의 폭주…脫한국 가속화로 증시 수급 비상

계엄 사태 후 "미장으로 싹 옮겨 주세요"…역대급 '엑소더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다음 날인 지난 4일 서울 강남 프라이빗뱅커(PB) 센터에는 이른 아침부터 자산가들의 문의가 빗발쳤다. 강남의 한 대형 증권사 PB는 “안 그래도 국내 증시 매력이 떨어지는 가운데 비상계엄 선포라는 초유의 사태까지 터지자 투자자들이 국내 투자 비중을 줄이고 있다”며 “반면 달러 강세와 미국 증시 고공행진이 이어지자 달러 자산을 확대하겠다는 요청이 급증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투자자의 미국 증시 이민은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본격화했다. 2019년 말 기준 국내 투자자의 미국 주식 보유금액은 84억달러에 불과했지만 코로나19 기간을 거치면서 지난해 680억달러로 8배 이상 늘어났다.

미국 대선 직후인 지난달 7일 1000억달러를 처음 돌파했고,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70억달러(약 9조9000억원)가 다시 불어나는 등 가속도가 붙는 분위기다.

반면 대외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관세 전쟁’ 위협과 반도체·2차전지에 대한 각종 보조금 철폐 압박 등에 직격탄을 맞았다. 여기에 내수 부진과 예상치 못한 윤 대통령의 계엄령 파동이 더해지며 국내 증시 이탈 움직임이 더 강화되는 모양새다.

이건규 르네상스자산운용 대표는 “한국은 정·재계가 힘을 합쳐 혁신의 흐름을 쫓아가기도 바쁜 상황에서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고 있으니 투자자들이 외면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식시장 수급이 무너지면서 한국 증시와 다른 주요국 증시 간 간극은 더 벌어지고 있다. 4일(현지시간) 다우존스30산업평균지수, S&P500지수, 나스닥지수 등 미국 뉴욕증시의 주요 지수가 나란히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지만 코스피지수는 5일 전 거래일 대비 0.90% 떨어진 2441.85에 마감했다.

트럼프 당선인이 대선 승리를 확정한 지난달 5일 이후 코스피지수는 5.24% 떨어졌다. 미국 ‘관세 폭탄’의 표적으로 지목된 중국(-0.54%)보다 하락 폭이 더 컸다. 같은 기간 S&P500지수는 5.25% 올랐으며 일본(2.39%), 영국(2.0%), 대만(0.70%) 등 다른 주요국 지수도 대부분 상승했다.

최만수/양현주 기자 beb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