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산 직전 옷가게를 살려내 것은 매뉴얼이 아니라 다정함 [서평]
제임스 리가 미국의 플러스사이즈 흑인 여성 의류업체 애슐리스튜어트의 최고경영자(CEO)로 왔을 때 회사는 파산 직전이었다. 원래 그의 역할은 투자자들을 위해 회사 자산을 적절히 팔아치우는 일이었지만 침몰하는 회사를 살려내보기로 결심했다. 제임스 리는 3년만에 2000만 달러의 흑자 전환에 성공했고, 6개월로 예상했던 CEO 임기는 7년 동안 이어졌다.

제임스는 미국으로 이민 온 한국인 가정에서 태어난 이민 2세다. 미국 하버드대와 같은 학교 로스쿨을 졸업한 뒤 투자은행과 사모펀드 회사 등에서 일했다.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아 온 그가, 망해가는 흑인 여성 의류업체의 경영을 맡아 회사의 체질과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데 성공한 과정이 자서전 <레드 헬리콥터>에 담겨 있다. 레드 헬리콥터는 어린 시절 받았던 선물 가운데 하나다.

애슐리스튜어트에 가자마자 제임스는 사장실을 없애고 미국 전역의 매장을 돌아다녔다. 사무실엔 직원들과 수시로 소통할 수 있도록 낮은 칸막이를 뒀다. 그 옆에 놓은 저렴한 합판 소재의 작은 타원형 탁자가 임원 회의실이었다. 제임스는 낡은 닛산 세단을 타고 매일 뉴욕, 뉴저지, 필라델피아와 그 주변 매장들을 방문했다. 비행기를 타고 댈러스, 애틀랜타, 디트로이트 등의 매장도 돌았다.

매장에서 제임스는 애슐리스튜어트가 가진 무형자산을 발견했다. 그건 바로 '다정함'. 애슐리스튜어트 매장은 지역 사회 흑인 여성들의 커뮤니티센터이자 사랑방 역할을 했다. 점장들은 대개 그들의 고객과 마찬가지로 흑인 여성이었는데, 그들은 매장을 찾는 손님을 소비자가 아닌 친구로 대했다. 많은 고객이 꼭 쇼핑하지 않아도 일주일에 두세 번씩 매장을 방문했다.

매장을 돌고 온 제임스는 회사의 혁신 방향을 '다정함'으로 정했다. 본사와 매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회사를 사랑하고 주체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그 중 하나가 두꺼운 매장 운영 매뉴얼을 간소화한 것. 말이 되지 않거나 권위적인 규칙은 없애고, 꼭 필요한 운영 절차만 골라 표준화했다. 회사의 다정함은 직원들의, 나아가 고객들의 호의를 불러일으켰다.

다정한 경영은 숫자로도 성과를 냈다. 매장 직원의 안전에 최우선으로 투자한 결과 애슐리스튜어트는 산재보험사로부터 최고 수준의 안전 등급을 받았다. 보험 청구율과 사고율은 과거 심각하게 높은 수준에서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져 보험료가 줄었다. 보험료를 아낀 돈으로 점장들에게 성과금을 줬다. 이는 다시 매출 상승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줬다.
파산 직전 옷가게를 살려내 것은 매뉴얼이 아니라 다정함 [서평]
제임스는 경영 효율화를 위해 미국에 있는 115개 매장 중 쇼핑몰에 입점해 있던 매장들 대부분을 폐점시켰다. 대형 쇼핑몰은 해당 지역 사회에 대한 뿌리가 약했기 때문이다. 지역과 지역 주민에 잘 녹아 든 매장에 선택과 집중을 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당시 소매업계 전반의 대세였던 무료 반품이나 무제한 무료 배송 전략도 거부했다. 무분별한 소비를 부추기는 대신 회사의 비용과 매장 일자리를 보호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코로나19로 인한 경기침체에도 회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다.

제임스는 "사회자본에 대한 투자는 보람 있을뿐 아니라 초대형 재정 수익으로 이어진다"면서도 "다만 수학, 회계, 운영 또한 그런 다정함과 보조를 맞춰야 한다"고 강조한다.

제임스에게 다정함은 그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한국인의 '정'과 맥락이 같다. 제목의 레드 헬리콥터는 그가 다섯살에 유치원 같은 반 친구 아버지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아내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 점심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자기 아이에게 매번 도시락을 나눠줘 고맙다는 표시였다. 레드 헬리콥터에 대해서 알게 된 날 제임스의 부모님은 그 어느 때보다 아들을 크게 칭찬했고, 그날의 기억은 제임스의 마음 속에 평생의 자산으로 남았다. 애슐리스튜어트의 다정함을 자산으로 발견하고 극대화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레드 헬리콥터 때문이라고, 제임스는 말한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