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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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투기 세력은 한국의 '양털 깎기'를 진행했다."

2007년 6월. 중국인 금융전문가 쑹훙빙(宋鴻兵)은 '화폐전쟁'이라는 저서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그는 1997년 외환위기도 이 같은 '양털 깎기'의 사례라고 주장했다. 양털 깎기란 국제 투기자본이 유동성을 넣었다가 빼는 형태로 신흥국 자산가치를 끌어내린 뒤, 헐값에 신흥국의 부를 약탈한다는 이론이다. 음모론이라는 비판이 있는 양털 깎기 이론은 최근 계엄 사태로 재주목받고 있다.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가면서 한국 기업과 시장이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져서다.

박상현 iM증권 이코노미스트는 9일 발간한 '코리아 디스카운트와 양털 깎기'라는 보고서에서 이 같은 우려를 오롯이 담았다. 양털 깎기 이론은 양털을 수북하게 키우듯 신흥국 자산 가치를 끌어올린 뒤 이를 양털 깎듯 헐값에 쓸어 담는 투기 자본의 행태를 가리킨다.

박 이코노미스트는 "한국 증시가 이미 ‘외톨이 증시’ 현상으로 외국인 투자자금은 물론 국내 투자자들한테도 외면받고 있다"며 "계엄 사태를 비롯한 정국 불안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넘어 양털 깎기를 불러올 가능성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가뜩이나 미국 경제 예외주의 현상 심화와 트럼프 2.0 리스크가 국제 자금의 달러 자산 선호 현상을 강화하는 분위기"라며 "국내 정국 불안 장기화로 인해 국내 금융시장과 경제가 ‘양털 깎기’ 대상이 될 잠재적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우려가 깊어지면서 이날 원·달러 환율은 17원 80전 오른 1437원에 마감했다. 종가 환율 기준으로 2022년 10월 24일(1439원 70전) 이후 2년 1개월 만에 가장 높았다. 치솟는 환율은 기업의 실적과 재무구조에 타격을 줄 전망이다.

‘환율 상승=수출 기업 호재’라는 기계적 도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평가도 있다. 2021년 한국은행이 발간한 ‘우리나라의 경상수지 흑자 요인 분석’ 보고서와 2022년 산업연구원이 발표한 '원화 환율의 수출 영향 감소와 시사점' 보고서는 “환율을 비롯한 금융 요인이 수출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고 지적했다.

복잡하게 얽힌 공급망 구조다. 해외에서 조달하는 원재료를 들여와 재가공해 수출하는 방식이 국내 제조 기업 사이에서 자리 잡으면서 원화의 영향력이 뚝 떨어졌다는 얘기다. 원화 가치가 떨어지면 비싼 돈을 주고 원자재 등을 사와야 한다. 그만큼 실적과 채산성은 훼손된다. 여기에 원화가치 하락으로 외화차입금 이자비용은 더 커진다.

한국은행 국제투자대조표에 따르면 올 9월 말 한국의 비금융기업(기업) 대외채무 합계는 1761억5060만달러로 집계됐다. 이날 환율 종가를 적용하면 253조원을 넘어선다. 역대 최대 규모로 지난해 말에 비해 55억5650만달러 증가했다. 대외채무란 기업이 갚아야 하는 달러·유로화를 비롯한 외화 빚(외화차입금 외화사채 유전스 등)을 뜻한다.

환율이 뜀박질하면서 원화로 환산한 외화차입금의 이자 비용과 원금 상환 부담도 커질 전망이다. 외화부채가 13조6400억원을 보유한 SK하이닉스는 원·달러 환율이 10% 상승할 때 순이익이 5919억원가량 감소할 것으로 추산됐다. SK이노베이션도 환율이 10% 뜀박질할 때 순이익이 2818억원가량 깎일 것으로 나타났다. 순외화부채가 33억달러에 달하는 대한항공은 환율이 10원가량 뛸 때 순이익이 330억원가량 증발할 것으로 추산됐다.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들도 비상 상황이다. 만기 3개월의 유전스(Usance)를 쓰는 기업을 중심으로 무더기 환손실 우려가 커졌다. 이들 기업은 통상 해외에서 원자재를 사들이는 경우가 많다. 유전스는 은행이 수입대금이 필요한 기업에 실행하는 일종의 단기 무역 대출이다. 통상 달러로 돈이 나간다. 하지만 환율이 뜀박질할 경우 유전스를 상환할 시점에는 더 많은 원화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기업들은 상당한 환손실을 입게 된다. 한 무역업체 트레이딩팀 관계자는 "오르는 환율 탓에 피가 마르는 분위기"라며 "회사 규모가 작아 환손실로 연간 실적이 상당폭 훼손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