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은평구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세현 개인전 '빛나고 흐르고 영원한 것'.
서울 은평구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세현 개인전 '빛나고 흐르고 영원한 것'.
강렬한 붉은 색 그림들이 미술관을 점령했다. 눈길이 닿는 곳엔 모두 '빨간색' 뿐이다. 빨간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름과 하늘, 산과 바다 등 자연의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새빨간 색으로만 그려낸 산수화인 셈이다. 미술관을 붉은 풍경으로 물들인 작가는 이세현. 그는 '붉은 산수'를 그리는 작가로 해외에서 먼저 이름을 알린 작가다. 그런 이세현이 서울 은평구 사비나미술관에서 개인전을 '빛나고 흐르고 영원한 것'을 열고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붉은 산수'의 세계로 관객을 초대하고 있다.

그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가장 집중한 건 '개인'이다. 지금까지 산수화를 통해 분단과 전쟁 등 역사와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표현해 온 그이지만, 이번 전시를 통해서는 외부에 집중하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성찰을 하고자 한 것이다.
서울 은평구 사비나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작가 이세현.
서울 은평구 사비나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작가 이세현.
전시장에서 만난 이세현은 "드넓은 우주에서 바라본 인간의 모습을 산수 안에 그려넣으며 '우주 속의 나는 어디에 있는가'를 성찰했다"고 했다. 이어 "최근 벌어지는 전쟁 등을 겪으며 인간 삶의 덧없음에 대해 생각했다"는 그는 "우주에서 보면 인간은 먼지에 불과한데 왜 우리는 이토록 잔혹하게 살아가는가에 대한 메시지를 그림에 담았다"고 했다. 시끄러운 인간 세상을 그린 그림에 은하수를 새겨넣기도 했다. 우주의 아름다움과 잔혹한 현실의 대비를 표현하기 위해서다.

이번 전시는 이세현에게 '자아 성찰'의 기회가 됐다. 매일 12시간씩 작업을 한다는 이세현에게 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곧 고통의 시간이었다. 작품을 완성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그를 짓눌렀다. 하지만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본 딸의 모습에 그는 깨달음을 얻었다. 행복하고 즐겁게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왜 나는 생각하고 책임감을 느끼며 작업을 하는가'를 성찰했다고 한다. 이 경험은 그에게 터닝포인트가 됐다. 외부 세상보다는 스스로와 개인에 대해 질문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오로지 빨간색 물감으로만 그린 산수화 ... 이세현의 '붉은 산수 세계'가 열렸다
이세현은 흰 캔버스에 오직 빨간색 물감만 사용해 그림을 그린다. 그림 속 흰 부분은 흰색 물감을 쓰는 대신 물감을 문지르고 닦아내며 표현한다. 색을 덧바르지 않기 때문에 빨간 물감이 마르고 나면 절대 그림을 수정할 수 없다. 그가 그림을 그리기 전 스케치에 많은 시간을 쏟는 이유다. 같은 색만 사용하면서 작품마다 다른 느낌과 구도를 만들어내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다. 매일 변하는 구름과 산의 그림자, 새 집을 보면서 구도에 대한 영감을 얻는다.

이세현을 유명하게 만든 '붉은 산수화'는 그의 영국 유학 막바지에 탄생했다. 1967년생인 그는 늦은 나이인 40세에 영국 유학길을 선택했다. 영어도, 환경도 모두 다른 곳에서 그는 매일 좌절했다. 모두가 그리는 서양화를 따라 그리고 조각을 만들며 자신감은 점점 떨어졌다. 스스로의 그림을 보며 '창피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대학원을 졸업하기 한 달 전, 우연히 이세현은 풍경화에 빠졌다. 붉은 색을 사용해 사실적인 풍경을 그리는 실험에 돌입했다. 자연에 집중하며 '서구 미술의 덧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동양과 서양의 자연이 다르듯 인간들도 모두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며 "서양 미술을 따라가는 스스로가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이세현은 정선의 그림을 공부하며 한국 풍경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세현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은평구 사비나미술관. 해안선 연작이 3층 전시장을 가득 메웠다.
이세현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은평구 사비나미술관. 해안선 연작이 3층 전시장을 가득 메웠다.
3층 전시장엔 같은 크기의 작품들을 같은 높이로 걸어두었다. 그림들로 해안선을 표현한 구성이다. 모든 그림들엔 풍경과 함께 사람들의 얼굴이 그려졌다. 이세현의 인생에 마치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사라지는 사람들을 그린 것이다. 어머니와 동료 작가들, 딸, 그리고 친구들의 얼굴이 캔버스를 채웠다. 중간에 크기가 조금씩 작업들을 설치하며 밀려드는 파도를 표현했다.
이세현, '해안선 연작' (2023-2024).
이세현, '해안선 연작' (2023-2024).
아이들로 가득 찬 그림이 전시의 하이라이트다. 큰 그림 안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배우 탕웨이,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주 등 모두가 다 아는 유명 인물들의 어린 시절을 그려넣었다. 이세현은 "이 사람들도 결국엔 다 아이였다"며 "현재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에 관계없이 모든 아이들은 어릴 때 순수한 꿈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며 이 작품을 그렸다"고 했다. 전시는 내년 1월 18일까지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