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하나 그리지 않고도 '삶'을 담아낸 에드워드 호퍼와 마에다 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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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신지혜의 영화와 영감
일상의 풍경에 투영된 개인적 형태와 방식
일본 홋카이도 비에이의 풍경에 매료되어
갤러리 설립한 사진가 마에다 신조(1922–1998)
사람을 담지 않고도 그곳이
일상의 터전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조의 작품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과 닮아있어
영화 '에드워드 호퍼'와
마에다 신조의 작품으로 보는
일상의 재구성
일상의 풍경에 투영된 개인적 형태와 방식
일본 홋카이도 비에이의 풍경에 매료되어
갤러리 설립한 사진가 마에다 신조(1922–1998)
사람을 담지 않고도 그곳이
일상의 터전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조의 작품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과 닮아있어
영화 '에드워드 호퍼'와
마에다 신조의 작품으로 보는
일상의 재구성
홋카이도 비에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갤러리 탁신관이 있다. 자작나무 숲길과 함께 고요하고 다정한 정취를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폐교된 작은 초등학교를 개조해서 만든 이 작은 공간은 큰 감동으로 채워져 있다.
탁신관 갤러리를 이야기하려면 비에이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낸 사진작가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사진작가의 이름은 마에다 신조다. 1971년 마에다 신조는 비에이의 가미후라노 언덕의 풍경과 만나 매료되었다. 가고시마에서 홋카이도에 이르는 일본 열도 종단 촬영을 마친 그는 비에이 언덕과의 만남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마에다 신조의 그림 같은 사진을 보면서 떠오르는 풍경이 있었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 말이다. 마에다 신조의 사진에는 사람이 없다. 고요하고 평온하게 펼쳐진 홋카이도의 사계만이 담겨 있을 뿐이다. 강렬하고 아름다운 색채로 사계를 지나는 홋카이도의 풍경은 그러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터전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일깨워 주면서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전달한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도 사람이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어쩌다 한 사람, 어쩌다 두 사람··· 실내의 풍경을 그린 작품은 그러하지만, 당대의 풍경을 그려낸 일련의 작품들은 글자 그대로 풍경만이 담겨 있다. <애덤의 집>, <하스켈의 집>, <맨사드 지붕>, <앤더슨의 집>, <오전 7시>, <철길의 석양>, <맨해튼 다리> 등을 떠올려 보라.
게다가 에드워드 호퍼의 공간은 도무지 들어가고 나갈 방법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의 대표작으로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 그 예가 된다. 풀리지 않는 요소가 가득한 이 그림은 그래서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미궁에 빠진다. 전문가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작품에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오전 7시>도 그렇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오전의 햇빛이 온기를 주고 있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갈 방도를 찾지 못한다.
카페에 홀로 앉은 여자를 그린 <일요일>도 타인으로부터 고립된 한 사람을 보여준다. <이른 일요일 아침> 또한 늘어선 상점가를 거니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영화 '나는 전설이다'를 보면서 느끼는 공포 중 하나는 아마도 홀로 남겨졌다는 것이 아닐까. 바이러스에 감염된 변종인류가 만연하고 그 가운데 홀로 남겨진 인류 최후의 생존자인 로버트 네빌. 기르던 개와 함께 변종인류가 돌아다니지 않는 낮 시간 동안 뉴욕의 거리를 헤매며 혹시 있을지 모르는 생존자를 찾는다. 네빌의 도시, 뉴욕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변종인류는 해가 져야 등장할 것이고 아무도 없는 텅 빈 거리의 도시는 적막하고 애잔하다.
리처드 매드슨의 소설 <나는 전설이다>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이전에 찰톤 헤스톤 주연의 '오메가 맨'으로, 이탈리아에서는 '지상 최후의 남자'로 영화화 되기도 했는데 호모 사피엔스의 마지막 생존자로서 다른 종의 인류가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그의 고립과 고독이 인적 없는 적막한 도시에 스며들어 깊은 감상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로버트 네빌의 도시와 에드워드 호퍼의 도시는 표면적으로는 비슷하게 보인다. 사람이 없다는 것. 그러나 이 두 도시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네빌의 도시는 정말로 사람이 없어 텅 빈 것이지만 호퍼의 도시는 그 비어 보이는 풍경 안에, 그 공간 안에 사람이 있고 사람들의 일상이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호퍼의 공간, 호퍼의 도시는 그 시대를 큼직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의 시공간은 역사의·시대의 한 부분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뉴욕의 영화관>은 호퍼가 살던 당시, 그가 동시대적 순간과 장소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찹 수이>의 두 여자는 여성들이 스스로 독립적인 존재로 변화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마에다 신조의 사진도 그런 면에서 호퍼의 그림과 많이 닮아있다. 자신이 딛고 서 있는 시공간의 일상과 인간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표면적으로 그들의 사진과 그림에 사람이 드러나 있지 않다고 해도 두 사람의 작품에는 사람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것도 꽤 큰 존재감을 가지고 말이다. 에드워드 호퍼는 자기 작품에 당대 미국의 평범한 삶을 담아내고자 노력했다. 다른 작가들이 고려하지 않던 평범한 일상에 주목한 것이다. 그 평범한 일상, 평범한 삶이 호퍼에게는 고려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다가왔고 그는 그 세밀한 속삭임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 빛과 패턴에 주목했다. 단순히 풍경을 그려낸 것이 아니라 건물과 빛과 패턴이 만들어내는 독창적인 인상을 알아차렸고 그것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그려냈다.
그 인상을 구현하기 위해서 호퍼가 취했던 또 다른 작업은 계획이다. 그는 절대 즉흥적으로 작업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늘과 구름처럼 보여지도록 둔 여백까지도 희미한 연필 자국으로 인해 그가 마음 내키는 대로 붓질을 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구도를 짜고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는 정밀함을 가지고 작업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어쨌거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슬쩍 보면 그가 살아갔던 시대상이 반영된 풍경을 그렸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풍경 안에서 자기 삶을 건실하게 살아갔던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시대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또한 관람자들로 하여금 오래 작품을 들여다보게 함으로써 호퍼가, 관람객이 스스로의 질문에 답을 얻기를 바랐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 '에드워드 호퍼'는 괴테의 말을 인용하는 호퍼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모든 문학 활동의 시작과 끝은 나를 둘러싼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고 그것은 내 안에 있는 세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모든 것이 이해되고 연관되고 재창조되고 만들어지고 재구성된다. 개인적인 형태와 독창적인 방식으로.”
▶▶▶[관련 리뷰] 극장에서 보는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의 그림’…아트멘터리 ‘에드워드 호퍼’
에드워드 호퍼는 이에 크게 동의하면서 자신에게 이 말은 회화에도 적용된다고 말한다. 어디 회화뿐일까. 작가들의 작품은 작가의 시선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드러나고 표출된다. 그래서 작가 본인만의 스타일과 작풍이 생겨나고 그렇게 창조되고 구성된 세계로부터 우리는 감동할 수 있는 것이다. 신지혜 칼럼니스트·작가
탁신관 갤러리를 이야기하려면 비에이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낸 사진작가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사진작가의 이름은 마에다 신조다. 1971년 마에다 신조는 비에이의 가미후라노 언덕의 풍경과 만나 매료되었다. 가고시마에서 홋카이도에 이르는 일본 열도 종단 촬영을 마친 그는 비에이 언덕과의 만남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상쾌한 초여름의 바람이 기분 좋게 언덕을 뚫고 있었다. 근처에 이르면 새하얀 감자의 꽃밭이 있다. 완만한 언덕은 적당한 기상을 유지하면서 끝없이 계속된다. 하늘은 빠져들 듯 파랗다. 아까부터 나는 너무 크고 아름다운 눈앞의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과거 이만큼 오랫동안 마음에 접하는 풍경을 만난 적이 있었을까. 이 언덕과의 첫 만남이다.'그렇게 비에이의 풍경과 마주친 마에다 신조는 그 매력에서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오랜 세월에 걸쳐 비에이의 풍경을 사진에 담아낸다. 그리고 세계적인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인 윌리엄 아커만(William Ackerman)이 마에다 신조의 ‘보리밭의 길’을 자신의 앨범 'Imaginary Roads' 재킷에 사용하고 이후 두어 차례 마에다 신조 작품이 윌리엄 아커만의 앨범 재킷에 등장하면서 음악과 사진이라는 두 세계가 어우러져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 마에다 신조, <탁신관> 홈페이지에서 발췌
마에다 신조의 그림 같은 사진을 보면서 떠오르는 풍경이 있었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 말이다. 마에다 신조의 사진에는 사람이 없다. 고요하고 평온하게 펼쳐진 홋카이도의 사계만이 담겨 있을 뿐이다. 강렬하고 아름다운 색채로 사계를 지나는 홋카이도의 풍경은 그러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터전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일깨워 주면서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전달한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도 사람이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어쩌다 한 사람, 어쩌다 두 사람··· 실내의 풍경을 그린 작품은 그러하지만, 당대의 풍경을 그려낸 일련의 작품들은 글자 그대로 풍경만이 담겨 있다. <애덤의 집>, <하스켈의 집>, <맨사드 지붕>, <앤더슨의 집>, <오전 7시>, <철길의 석양>, <맨해튼 다리> 등을 떠올려 보라.
게다가 에드워드 호퍼의 공간은 도무지 들어가고 나갈 방법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의 대표작으로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 그 예가 된다. 풀리지 않는 요소가 가득한 이 그림은 그래서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미궁에 빠진다. 전문가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작품에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오전 7시>도 그렇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오전의 햇빛이 온기를 주고 있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갈 방도를 찾지 못한다.
카페에 홀로 앉은 여자를 그린 <일요일>도 타인으로부터 고립된 한 사람을 보여준다. <이른 일요일 아침> 또한 늘어선 상점가를 거니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영화 '나는 전설이다'를 보면서 느끼는 공포 중 하나는 아마도 홀로 남겨졌다는 것이 아닐까. 바이러스에 감염된 변종인류가 만연하고 그 가운데 홀로 남겨진 인류 최후의 생존자인 로버트 네빌. 기르던 개와 함께 변종인류가 돌아다니지 않는 낮 시간 동안 뉴욕의 거리를 헤매며 혹시 있을지 모르는 생존자를 찾는다. 네빌의 도시, 뉴욕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변종인류는 해가 져야 등장할 것이고 아무도 없는 텅 빈 거리의 도시는 적막하고 애잔하다.
리처드 매드슨의 소설 <나는 전설이다>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이전에 찰톤 헤스톤 주연의 '오메가 맨'으로, 이탈리아에서는 '지상 최후의 남자'로 영화화 되기도 했는데 호모 사피엔스의 마지막 생존자로서 다른 종의 인류가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그의 고립과 고독이 인적 없는 적막한 도시에 스며들어 깊은 감상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로버트 네빌의 도시와 에드워드 호퍼의 도시는 표면적으로는 비슷하게 보인다. 사람이 없다는 것. 그러나 이 두 도시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네빌의 도시는 정말로 사람이 없어 텅 빈 것이지만 호퍼의 도시는 그 비어 보이는 풍경 안에, 그 공간 안에 사람이 있고 사람들의 일상이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호퍼의 공간, 호퍼의 도시는 그 시대를 큼직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의 시공간은 역사의·시대의 한 부분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뉴욕의 영화관>은 호퍼가 살던 당시, 그가 동시대적 순간과 장소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찹 수이>의 두 여자는 여성들이 스스로 독립적인 존재로 변화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마에다 신조의 사진도 그런 면에서 호퍼의 그림과 많이 닮아있다. 자신이 딛고 서 있는 시공간의 일상과 인간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표면적으로 그들의 사진과 그림에 사람이 드러나 있지 않다고 해도 두 사람의 작품에는 사람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것도 꽤 큰 존재감을 가지고 말이다. 에드워드 호퍼는 자기 작품에 당대 미국의 평범한 삶을 담아내고자 노력했다. 다른 작가들이 고려하지 않던 평범한 일상에 주목한 것이다. 그 평범한 일상, 평범한 삶이 호퍼에게는 고려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다가왔고 그는 그 세밀한 속삭임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 빛과 패턴에 주목했다. 단순히 풍경을 그려낸 것이 아니라 건물과 빛과 패턴이 만들어내는 독창적인 인상을 알아차렸고 그것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그려냈다.
그 인상을 구현하기 위해서 호퍼가 취했던 또 다른 작업은 계획이다. 그는 절대 즉흥적으로 작업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늘과 구름처럼 보여지도록 둔 여백까지도 희미한 연필 자국으로 인해 그가 마음 내키는 대로 붓질을 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구도를 짜고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는 정밀함을 가지고 작업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어쨌거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슬쩍 보면 그가 살아갔던 시대상이 반영된 풍경을 그렸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풍경 안에서 자기 삶을 건실하게 살아갔던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시대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또한 관람자들로 하여금 오래 작품을 들여다보게 함으로써 호퍼가, 관람객이 스스로의 질문에 답을 얻기를 바랐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 '에드워드 호퍼'는 괴테의 말을 인용하는 호퍼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모든 문학 활동의 시작과 끝은 나를 둘러싼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고 그것은 내 안에 있는 세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모든 것이 이해되고 연관되고 재창조되고 만들어지고 재구성된다. 개인적인 형태와 독창적인 방식으로.”
▶▶▶[관련 리뷰] 극장에서 보는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의 그림’…아트멘터리 ‘에드워드 호퍼’
에드워드 호퍼는 이에 크게 동의하면서 자신에게 이 말은 회화에도 적용된다고 말한다. 어디 회화뿐일까. 작가들의 작품은 작가의 시선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드러나고 표출된다. 그래서 작가 본인만의 스타일과 작풍이 생겨나고 그렇게 창조되고 구성된 세계로부터 우리는 감동할 수 있는 것이다. 신지혜 칼럼니스트·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