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네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속 수도사 조시마가 막내 알료샤 카라마조프에게 건넨 말이다. 인간이기에 필연적으로 마주할 시련에 맞서야 함을 강조한다. 여기 자신의 십자가를 인정하고 나아가는 두 화가가 있다. 근대의 임용련과 현대의 서민정이 펼쳐내는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본다.

나의 십자가를 예고하다
임용련 <십자가>, 1929, 종이에 연필, 37x32.5cm,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임용련 <십자가>, 1929, 종이에 연필, 37x32.5cm,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낯설다. 분명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 자신했다. 성화(聖畵) 속 십자가상을 잘 알고 있다고. 오만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임용련의 연필 드로잉 작 <십자가>에 대해서다. 대학원 시절 한국 근대 미술사 전공 수업이었다.

유아세례를 받았다. 종교적 사연을 말하려는 건 아니다. 자주 접했고 공부했기에 깨달았다. '이 성화는 어딘가 기이하다’ 색을 지운 연필화여서일까. 도판을 자세히 보았다. 몸의 생김새가 특이하다. 그리스도의 몸이 늘어나 있다. 기다랗게. 등장인물들의 감정은 읽히질 않는다. 직접 보고 싶다. 강한 바람이 일었다.

기회가 왔다.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50주년 기념전 <광장: 미술과 사회 1900-2019> 1부를 찾았다. 덕수궁관 제3전시실 보라색 방에 들어섰다. 컬러풀한 유화가 걸린 정면의 벽 가장 왼쪽의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단번에. 흑백임에도 뚜렷하게. 다가섰다. 섬세하다. 살결의 미세한 떨림이 전해질 정도로. 이토록 정교한 연필 드로잉이라니. 다만 도상들은 왜곡된 형태다. 해석하고 싶어 집중할 찰나였다. "왜 나무에 매달려 있어?” 함께 간 친구의 말이다. '무슨 말이지?’ 의아했다. 퍼뜩 빠져나온다. 나만의 감상에서. 예수에 눈을 맞춘다.

그리스도는 못 박히지 않았다. 십자가상은 없다. 친구는 한마디를 던지더니 발걸음을 옮긴다. 따라가지 않았다. 갈 수 없었다. 예수와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몸은 축 늘어져 있다. 힘없이. 기운이 빠져나간다. 알 수 없음이 쌓여간다. 알고 싶다. 세밀한 연필 촉에 새겨진 그의 마음을. 무척이나. 의문은 증폭했다. 임용련의 <십자가>를 직접 마주한 후.

'엘리트’란 단어는 매끈하다. 험한 시대일지라도. 임용련은 지주의 집안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다. 편안함에 안기지 않았다. 배재고등보통학교시절 3·1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수배령이 내려졌다. 임용련에서 ‘임파’가 되었다. 중국인의 이름으로 난징의 금릉대학에 입학했고 이후 미국으로 간다. 쫓기듯 떠나왔다. 붓을 들었다. 그리고 싶었다. 당시 최고의 미술대학인 시카고 미술대학과 예일 대학교를 차례로 졸업했다. 임용련은 '길버트 임’이 되었다. 세 개의 이름이 증명한다. 예술에의 갈망을. 그리고픈 열정을. 모든 과목에서 만점을 받았다. 숨었던 재능이 자유를 만났다.

누구나 타오르는 시절이 있다. 쉬이 스스로에게 취한다. 임용련에게 1929년이란 해가 그러했다. <십자가>는 당시 작품이다. 아픔을 토해낸다. 절망이 흐른다. 그가 고통을 그려낸 이유는 무엇일까. 마음껏 자질을 꽃피우던 날들이었을 텐데. 묻고 싶다. 색을 상실한 채 기도하는 그림 속 인물들에게. 임용련의 마음을 알고 있느냐고. 망국의 한을 드러낸 것이려나. 아니면 전통적 성화의 변주였을까. 예술가로서의 욕심을 동반한. 슬프다. 그는 앞날을 예감했던 걸까.
임용련 <에르블레 풍경>, 1930, 카드 보드에 유채, 24.2x33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출처. 한경DB
임용련 <에르블레 풍경>, 1930, 카드 보드에 유채, 24.2x33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출처. 한경DB
다행이다 싶었다. 따뜻하고 정겹다. <에르블레의 풍경>을 보았을 때 느낌이다. 임용련의 1930년 작품이다. 피어오른다. 몽글몽글한 감정들이.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속으로 옮겨 놓는다. 1년의 시간이 흘렀다. 성적 장학금으로 유럽 연수를 떠났다. 일생의 반려를 만났다. 파리라는 이름조차 낭만적인 곳에서. 신여성, 최초의 파리 유학파 화가인 백남순이다. 늘 깨닫는다. 사랑이란 마법 같음을. 십자가 속 흐린 색들은 밝고 창연한 색채로 바뀌었다. 나무숲이 푸르다. 그 온화함에 안기고 싶다. 붉은색 벽돌에 빛이 새어 나온다. 어울린다. 에르블레와 행복이란 단어가. "색의 조화요, 자유로운 필촉과 솔직한 표현” 같은 해 11월 열린 임용련과 백남순의 귀국 전시회에 대한 평이다. 빛이 쏟아진다.

때론 생각한다. 어떤 예술가에게 비애의 자아는 기질적이라고. <하고>(1930년대)는 제목부터 처연하다. ‘무슨 까닭에’라는 말이다. 나체의 남자는 웅크린 채 얼굴을 숨겼다. 그의 아픔에 전염될 듯하다. <묵상>(1930년대) 속 여인들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깨에 얹은 손에 애절함이 묻어난다. 손을 뻗어본다. 온기를 더하고 싶기에. 예술가는 캔버스 안에 스스로 플롯을 만든다. 임용련은 알았을까. 그의 존재가 사라지게 되리라는 것을. 흔적도 없이. 복선을 숨겨놓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우연이라기에 무척이나 쓰리기에.

야속하다. 슬픈 예감은 왜 틀리지 않을까. 임용련은 6·25 한국전쟁 중 행방불명이 된다. 인민군에게 납치당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사라졌다. 세 개의 이름이 흩어진다. '임용련’ '임파’ '길버트 임’ 혹독한 근대였다. 그가 이중섭이라는 시대의 화가를 길러냈음을 위로로 삼아본다. 애달프다.

알고 있다. 누구나 각자의 십자가가 있음을. 그 무게를 잴 수 있는 이는 오직 나뿐이다. "임파는 주관적이고 상징적인 기운이 농후하다” 소설가 이광수의 임용련에 대한 평가다. 알 거 같다. 이제야. 고전에서 벗어나 성화를 재창조한 이유를. “네가 걷는 가시밭길을 알고 있다" 십자가가 아닌 나무에 매달린 예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28살의 임용련은 말하려는 할까. 다가올 운명에 순응하겠다고. 시선을 옮겨본다. 하늘을 향해 예수를 붙잡은 곧게 뻗어낸 두 팔은 저항한다. '부디 나의 십자가를 거두어 달라’고. 섬세하게 살려낸 <십자가> 속 인물들의 힘줄이 꿈틀거린다. 손목이 저리다. 위태롭게 들고 있던 나의 십자가를 떨어뜨렸다.

감히 짐작할 수 없다. 남겨진 자의 남은 삶은. 아내 백남순은 절필했다. 다시 붓을 들기까지 40여년을 보내야 했다. 궁금하다. 신은 누구에게 더 가혹했을까. 강제로 떠나야 했던 이와 억지로 이별을 당한 두 사람 중에. 가만히 따라해 본다. <십자가> 속 여인들이 가지런히 모은 손을.

기도한다. 임용련이 십자가를 내려놓았기를. 지상에서의 삶보다 조금 더 행복하기를. 그의 연필 소리가 귀에 스친다. 사각사각.

남겨진 자의 십자가에 대하여 – 상실을 마주하고 나아가다

무더웠다. 올해 가을은 유난히도. 더위에 밥맛을 잃어 점심을 걸렀다. 직장 옆 미술관에 들렀다. (필자의 직장도 미술관이다). 금호미술관에서 <지금의 화면 And Afterwards>란 제목의 전시였다. 2층으로 향했다. 들어섰다. 열이 식었다. 단번에. 에어컨의 냉기 때문만은 아니다.
서민정 <너와 나1>, 2023, 장지에 먹, 주묵, 분채, 193.9x130.3cm, 서민정 제공
서민정 <너와 나1>, 2023, 장지에 먹, 주묵, 분채, 193.9x130.3cm, 서민정 제공
몰려온다. 붉은색이. 온통. 어둡다. 따뜻하지 않다. 서민정의 그림은 붉음을 머금었다. 색의 속성을 따라가지 않는다. 뜨겁기보다 차다. 몇 개의 그림들을 스쳤다. 뒷모습의 여성이 보인다. '오늘 내 옷차림과 비슷하네’ 단순한 이유였다. 가까이 가본다. 서민정의 <너와 나1>과 마주했다. 반팔에 청바지, 아무렇게나 묶은 머리까지. 비슷하다. 평소의 나와. 묘한 반가움이 인다. 풀숲이다. 빼곡하다. 숨이 막힌다. 그 밀도에. 틈이 보이지 않는다. 들풀 속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아무도 들어오지 마’라는 낮은음이다. 나지막이. 경고하는 것일까. 사늘한 캔버스를 바라보다 떠올렸다. 붉음이 가득했던 영화를. ‘바그다드 카페’다.

황량하다. 사막에 카페가 있다. 덩그러니 붉은 석양 속에. 버려졌다. 누군가에게. 지나갔다. 화려한 시절이. 짓눌려있다. 짊어진 삶의 무게에. ‘바그다드 카페’에 모인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상처는 겹겹이 쌓여 굳어졌다. 이들의 얼굴엔 표정이 없다. 차마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는다. 여행자 야스민은 모래 바람을 따라 걷다 바그다드 카페의 문을 연다. 그녀도 남겨진 사람이었다. 야스민은 비집고 들어간다. 틈이 넓어진다. 뒷모습만을 보이던 사람이 몸을 돌린다. 반갑다. 무표정에 생기가 돈다. 떠올리곤 한다. 붉음이 드리운 바그다드 카페를. 매일의 나날 속 버거움에 짓눌릴 때에는. 그래도 살아갈 수 있다고.

들어가고 싶어졌다. <너와 나1> 속 빽빽한 수풀 속으로. 다시 보니 색들은 어우러져 있다. 초록이 스며있다. 생기를 끌어오듯이. 구겨졌던 마음이 펴진다. 작가가 토해낸 슬픔에 다가설 용기가 난다. 더 가까이 눈을 맞춘다. 알아차렸다. 화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숲 속 사이사이 하얀 풀들과 초록의 결들이 존재함을.

"최근 몇 년 동안 가족과 지인의 연이은 죽음을 경험했다” 서민정은 고백한다. 아려온다. 무성한 풀과 꽃이 적막을 품은 이유였다. 고개를 든다. 위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을 쫓는다. 발견했다. 올빼미가 있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우거진 수풀 속 빼꼼 몸을 내밀었다. 다행이다. 그녀가 혼자가 아니어서. 이내 슬퍼진다. 캔버스 속 그녀가 어둠 속 깨어있었음을 알았기에.

잘 알고 있다. 잠들지 못하는 밤과 새벽이 얼마나 길고 힘겨운지. 상실과 마주하면 비로소 깨닫곤 한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문득 달라진다. 캔버스 가득한 풀숲이 쌓인 잿더미 같다. 붉고 하얀 풀꽃들이 무채색으로 보인다. 타오르다 남겨진. 서글프다.

토해내는 울음들이 겹쳐진다. 지난해 돌아가신 할머니의 입관을 지켜보았다. 죽은 이를 마지막으로 마주한 사람은 안다. 마음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고 어떤 슬픔은 터져 나오다 숨이 끊어질 것 같음을. <너와 나1> 속 홀로 선 여성의 옆에 선다. 그가 겪어내야 하는 절망을 나누고 싶다. 찾아본다. 빼곡한 풀숲 어딘가에 내어진 길을. 발견했다. 간신히 드러난 초로가 보인다. 그곳에 그녀의 십자가를 잠시 세워두리라.

지워내고 채워 넣다. 서민정의 작업을 설명하는 키워드다. 동양화를 전공했다. 붉은빛의 주묵을 한지에 칠한다. 선을 긋고 또 긋는다. 캔버스는 어두워진다. 여백을 지워버렸다. 유화와 아크릴의 빨강이 요동치는 열기를 품는다면 주묵(朱墨)의 붉음은 고요하게 번져나간다. 시간을 두고 잔잔하고 깊게. 서민정의 그림 속 꽃과 풀들이 흘깃 보면 정적이나 천천히 움직이는 이유다.
속이 상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작은 공간도 남겨두지 않은 <너와 나1> 속 풍경이. 해사한 꽃송이 하나 발견할 수 없는 적막한 숲이. 아픔을 직면하라고 너에게,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지라는 외침 같았기에.

"현실에 절망할지라도 아름다운 것을 향해간다” 서민정은 말한다. 상상해본다. 뒷모습만을 보이는 <너와 나1> 속 그녀의 표정을. 옅은 웃음을 띠고 있으리라. 살아가리라는 다짐을 품고.

녹지 않고 얼어붙는 아픔에게 고함

바랐다. 숱한 감정들이 차츰 옅어지기를. 겨울이 오면 알게 된다. 어떤 아픔은 녹지 않고 얼어붙음을. 그럼에도 다짐해본다. 나의 십자가를 지고 가리라. 당신도 그러하기를. 코끝에 찬 바람이 부는 계절이다.

우진영 미술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