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주에 사는 41세 제니 왓슨은 간질과 섬유근육통을 포함한 다발성 만성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수년 동안 적절한 약을 찾아왔다. 담당 의사가 왓슨의 신경통을 줄여줄 약을 발견했지만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왓슨의 보험사가 해당 약품 비용을 지원해주지 않기로 하면서다. 통증 때문에 15분 이상 서 있을 수조차 없는 그는 계속 직장을 구하지 못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 그의 보험 청구를 거절한 곳은 유나이티드헬스케어다. 이 기업은 미국 최대 보험사로, 지난 4일 브라이언 톰슨 최고경영자(CEO)가 총격범 루이지 맨지오니에 의해 살해당했다.

○영웅 된 ‘보험왕 살해범’

보험 CEO 피살에…도마 오른 美 의료시스템
CBS는 11일(현지시간) “민간 보험사의 청구 거절과 물가 상승률을 압도하는 의료·보험비 상승률이 최근 톰슨 CEO 살해 사건 이후 보험업계를 향한 대중의 분노를 더욱 촉발하고 있다”고 전했다. 살해 현장에서 발견된 탄피에 적힌 3개 단어 ‘depose(무력화하다)’ ‘deny(거절하다)’ ‘delay(지연시키다)’는 온라인을 중심으로 ‘반(反)보험 구호’처럼 퍼지고 있다. 이 용어들은 보험사가 고객의 보험금 청구를 거절할 때 주로 쓰인다.

온라인상 위협을 추적하는 네트워크감염연구소의 앨릭스 골든버그 선임고문은 “톰슨 CEO 피살 사건을 미화하고 맨지오니를 영웅시하는 글이 넘쳐난다”며 “사건 당일 X(옛 트위터)에서 가장 많이 리트윗된 게시물 10개 중 6개가 직간접적으로 살인을 지지하거나 피해자(톰슨 CEO)를 비하한 것”이라고 말했다. 오프라인에서도 맨지오니 흉내 내기 대회가 열리거나 현상 수배 포스터에서 그가 입은 재킷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톰슨 CEO 살해 사건 이후 제약 및 보험업계의 다른 회사 임원들이 민간 보안 요원 배치를 늘리고 있다”고 전했다. 유나이티드헬스케어는 미국 1위 보험 회사다. 시그나, CVS헬스 등이 그 뒤를 잇는다. 로이터통신은 “이번 사건은 건강보험에 대한 미국 시민의 깊은 좌절감을 새롭게 조명했다”고 평가했다.

○부담은 느는데 보장은 줄어

2010년 제정된 의료보험개혁법(오바마케어)은 보험 플랜 보장 범위의 새로운 기준을 설정했다. 이후 제반 비용이 증가하자 보험사들은 의료 서비스 요청을 사전에 검토하는 ‘사전 승인’ 절차를 점점 많이 사용하게 됐다. 2019년 3700만 건에서 2022년 4600만 건으로 사전 승인 절차가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사전 승인 절차에서 2022년 기준으로 CVS헬스는 13%, 유나이티드헬스케어는 8.7%의 고객 청구를 거절했다. 해당 절차가 일종의 ‘선행 거절’ 창구 역할을 하는 것이다. 비영리단체 KFF에 따르면 환자 중 약 10%만 이러한 거절에 항소하며 그마저도 약 3분의 1은 보험금을 최종 지급받는 데 실패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해 미국의학협회 설문조사에 따르면 94% 의사가 “사전 승인으로 치료가 지연됐다”고 답했다. 78%는 “사전 승인으로 환자들이 치료를 포기하는 사례가 있다”고 했다. 보험사 자체 사전 승인 절차 이후 청구 항소가 거절된 환자들은 법적 구제를 받을 수 있는 방법도 마땅치 않다.

보험금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납입해야 하는 보험료가 늘어나는 점도 불만 요인이다. 올해 가족 단위 평균 건강보험료는 연간 2만5572달러로 전년 대비 6% 증가했다. 개인 단위 평균 건강보험료도 전년 대비 7% 늘어 8951달러에 달했다. KFF는 “2000년 이후 건강보험료 상승률은 대부분의 해에서 물가 상승률을 앞질렀다”고 분석했다.

차기 행정부에서 정부효율부 공동수장을 맡게 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미국 의료 시스템 문제에 공감을 표했다.

그는 이날 X에 ‘미국은 세계에서 최고로 비싼 의료 시스템을 갖췄지만 기대수명은 약 42위’라는 맨지오니의 범행 선언문 일부를 인용한 뒤 “비만 치료제를 매우 저렴한 비용으로 대중에게 제공해야 미국인의 건강을 개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