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1918년 나란히 세상을 떠난 빈 분리파 작가들의 전성기는 짧았다. 하지만 이들이 뿌려놓은 씨앗은 2024년 봄,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에서 만개했다. 비바람 맞으며 피어난 작품들의 이면에 감춰진 작가들의 역경을 살펴봤다. writer_안시욱·성수영 기자

꽃의 절정은 낙화(落花) 직전이라고 했다. 바람과 추위를 견뎌낸 시간과 비교하면 절정은 찰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아쉬워할 건 없다. 떨어진 꽃잎은 땅으로 돌아가고, 새로이 피어날 꽃들의 자양분이 될 테니.
구스타프 클림트, '큰 포플러 나무 II(다가오는 폭풍)', 1902/03 ©Leopold Museum, Vienna
구스타프 클림트, '큰 포플러 나무 II(다가오는 폭풍)', 1902/03 ©Leopold Museum, Vienna
새로운 세기의 출발을 알리던 1900년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이런 상황이었다. 제국의 수도였던 대도시 빈에는 고귀한 귀족과 지식인이 몰려들었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반유대주의와 시오니즘, 전통과 혁신 등 여러 목소리가 뒤엉켜 다퉜다. 화려하게 증축된 도로 한편엔 빈민가가 들끓기도 했다.

혼탁한 진흙 같은 상황에서 빈의 미술은 절정을 이뤘다. 일군의 젊은 예술가들이 보수적인 미술 풍토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면서다. 1897년 결성된 '빈 분리파'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 부자를 위한 예술과 가난한 사람을 위한 예술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술은 보편적인 선(善)이다."
에곤 실레, '원탁, 제49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1918 ©Leopold Museum, Vienna
에곤 실레, '원탁, 제49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1918 ©Leopold Museum, Vienna
① 혁신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빈 분리파의 ‘분리’는 전통 미술에서 벗어난 예술을 추구하겠다는 의미다. 주류 아카데미 예술의 시선에선 터무니없는 얘기였을 터다. 그런데 빈 분리파 결성의 중심에는 클림트(1862~1918)가 있었다. 전통적인 양식으로 그린 '디오니소스 제단'(1886)으로 황제상까지 거머쥔 당대의 스타였다. 그런 클림트가 초대 회장으로 나서자 빈 분리파의 목소리에 무게가 실렸다.

클림트의 인기는 대단했다. 프랑스어로 '아름다운 시대'를 뜻하는 벨 에포크의 화려하고 세련된 장식 미술로 처음 이름을 알렸다.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가 빈의 부흥을 꿈꾸며 도시를 정비하던 시절이다. 클림트는 신규 도로 링슈트라세에 들어선 빈미술사박물관과 국립극장을 장식하는 벽화에 1순위로 섭외됐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구스타프 클림트, '디오니소스 제단', 1886 ©Leopold Museum, Vienna
구스타프 클림트, '디오니소스 제단', 1886 ©Leopold Museum, Vienna
꽃길만 걸어온 건 아니다. 작가로서의 성공을 뒷받침해준 동생 에른스트 클림트가 28세에 요절하고, 이어 부친마저 세상을 떠났다. 1896년 빈 예술가협회장으로 극우 보수주의자가 재선되자 클림트는 주류 미술계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저 보기 좋은 그림에 싫증을 느꼈던 것일까. 해외 미술인들과의 교류를 강조한 그는 인상주의와 표현주의 등 당대 부상하던 미술 양식을 빈으로 들여왔다.

미술 아카데미와 예술가협회가 여전히 기득권을 쥔 상황에서 분리파를 결성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클림트는 실레 등 후배 작가들을 살뜰히 챙겼다. 그가 빈 분리파로 활동한 7년간 23번의 전시를 열었다. '수풀 속 여인'(1898)도 이때 나온 작품이다.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구도와 효과를 실험한 흔적이 돋보인다.
구스타프 클림트, '수풀 속 여인', 1898년경 © Klimt Foundation, Vienna
구스타프 클림트, '수풀 속 여인', 1898년경 © Klimt Foundation, Vienna
총체예술의 콜로만 모저&요제프 호프만

빈 분리파의 혁신은 '총체예술'으로도 불린다. 미술관과 부자의 저택을 넘어 모든 생활 영역에 예술이 스며들 수 있다는 믿음을 담았다. 일상적인 그릇과 잔, 가구도 유화나 조각 못지않은 훌륭한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었다. 그 중심에는 1903년 빈 디자인 공방을 세운 콜로만 모저(1868~1918)와 요제프 호프만(1870~1956)이 있다.

클림트와 빈 분리파를 공동창립한 모저는 미술과 공예의 경계를 허무는 데 앞장섰다. 초기 작품들은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유행한 자포니즘의 영향을 받았다. 일본 목판화에서 사용되는 표현 기법을 녹여낸 가구를 제작했다. 그의 작품에 평면적인 구성과 단순한 형태, 강렬한 색채 대비 등이 두드러지는 이유다.
콜로만 모저, '메테오르 100번' 중 일부, 1899 ©Leopold Museum, Vienna
콜로만 모저, '메테오르 100번' 중 일부, 1899 ©Leopold Museum, Vienna
모저는 평생 경제적인 압박에 시달렸다. 무역업자가 되길 바라던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미술을 배웠지만, 아버지의 죽음 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예술의 상업성을 중요하게 본 그한테 예술적 가치를 우선하는 빈 디자인 공방의 경영방식은 마찰을 빚기도 했다. 말년에 공방을 떠난 모저는 시골로 돌아가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자포니즘과 인상주의를 결합한 '마리골드' '칠엽수 꽃' 등은 후대 모더니즘의 토대가 됐다.

모저가 동양의 자연에서 차용한 곡선미를 발전시켰다면, 호프만은 이보다 절제된 직선을 강조했다. 실용적이면서도 합리적인 구조가 특징이다. 법학을 공부하다가 건축학으로 돌아선 독특한 이력이 배경에 있다. 빈 건축계의 대부 오토 바그너의 제자로 들어가면서 '기능주의적 미학'이란 스승의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요제프 호프만, 꽃장식 테이블, M436번, 1905년경 ©Leopold Museum, Vienna
요제프 호프만, 꽃장식 테이블, M436번, 1905년경 ©Leopold Museum, Vienna
동료들로부터 '정사각 호프만'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1900년 찰스 매킨토시의 간결한 디자인을 보고 감명받곤 기하학적 단순함을 추구했다. 원형의 꽃병 등 곡선이 돋보이던 그의 작품은 점차 정사각형 문양이 규칙적으로 등장하는 양식으로 옮겨갔다.

예술을 일상생활에 접목하고자 했던 이들의 전성기는 금세 저물었다. 수작업으로 인한 경제적 압박에 시달렸다. 대공황의 직격탄을 맞은 빈 디자인 공방은 1932년 해체됐다. 수십 년의 세월을 버틴 총체예술만이 남아 이들의 장인 정신을 전한다.
콜로만 모저, '꽃병', 1900년경 ©Leopold Museum, Vienna
콜로만 모저, '꽃병', 1900년경 ©Leopold Museum, Vienna
'영혼을 찢는 광기' 오스카 코코슈카

미술계의 반항아들이 모인 빈 분리파 중에서도 오스카 코코슈카(1886~1980)는 유별난 작가다. 전시장에 걸린 191점 가운데 그의 회화는 어렵지 않게 구별할 수 있다. 뒤틀린 인물의 형상과 광기 어린 색채는 발길을 오래 붙잡는다. 극작가이자 시인으로도 활동한 작가의 천재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클림트보다 한 세대 젊은 코코슈카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작가 중에서도 가장 앞서간 사람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불안해진 인간 심리를 다룬 작품으로 당대 미술계로부터 '영혼을 찢는 자' '야수 중의 야수' 등의 평가를 받았다. 그가 각본을 쓴 연극 '살인자, 여성들의 희망'의 포스터로 제작한 '피에타'(1909)가 단적인 예다. 고전적인 피에타의 도상을 따르는데, 자애로운 성모가 아니라 야수처럼 울부짖는 여성이 그려졌다.
오스카 코코슈카, '피에타', 1909 ©Leopold Museum, Vienna
오스카 코코슈카, '피에타', 1909 ©Leopold Museum, Vienna
코코슈카를 논할 때 그의 연인 알마 말러를 빼놓을 수 없다. 알마는 천재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아내였다. 코코슈카는 말러가 사망한 뒤 알마와 사랑에 빠졌다. 둘의 연예는 순탄치 않았다. 희대의 '팜 파탈'이었던 알마는 사교계의 수많은 예술가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급기야 코코슈카의 아이를 낙태하기에 이른다.

자포자기한 코코슈카는 제1차 세계대전에 자원입대했다. 머리에 총상을 입고 전역한 그는 알마가 다른 사내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상처는 아물었지만 광기는 강해져 갔다. 히틀러 독재 정권 시절엔 영국으로 망명하곤 나치 저항 포스터를 만들었다. 전시장에선 한때 '퇴폐 미술'로 여겨져 전시가 금지되기도 했던 그의 포스터 작업을 만나볼 수 있다.
오스카 코코슈카, '이젤과 함께한 자화상', 1922 ©Leopold Museum, Vienna
오스카 코코슈카, '이젤과 함께한 자화상', 1922 ©Leopold Museum, Vienna
비운의 천재 리하르트 게르스틀

남들보다 앞선 재능은 때로 저주로 돌아오기도 한다. 지독하게 외로운 삶을 살았던 리하르트 게르스틀(1883~1908)이 그랬다. 그는 보수적인 교육을 받거나 빈 분리파 등 단체에 속하길 거부했다. 대신 보헤미아 지역을 여행하며 자기만의 표현주의 양식을 독학해 완성했다. 실레가 1909년 창단한 '신예술가그룹'의 동시대 작가들보다 5~10년 앞선 일이었다.

그의 작품은 동시대 예술계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형상을 자유자재로 왜곡하고 과감한 색채를 배합한 그의 작품은 혁신을 이끌던 빈 분리파에서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반신 누드의 자화상'(1902·1904)을 눈여겨볼 만하다. 비탄에 빠진 작가 본인의 초상을 인간 예수의 형상과 겹쳐 보이게끔 묘사한 작품이다.
리하르트 게를스틀, '반신 누드의 자화상', 1902/04 ©Leopold Museum, Vienna
리하르트 게를스틀, '반신 누드의 자화상', 1902/04 ©Leopold Museum, Vienna
게르스틀을 유일하게 이해해준 친구는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였다. 1907년 쇤베르크의 별장에 방문한 그는 친구의 아내 마틸데를 모델로 그리다가 불륜을 저질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쇤베르크는 게르스틀과 절연을 선언했다. 궁지에 몰린 게르스틀은 마틸데한테 청혼했지만, 마틸데는 그를 버리고 쇤베르크한테 돌아갔다.

천재의 말로는 비참했다. 절망한 게르스틀은 1908년 25년의 짧은 생을 스스로 마감했다. 죽기 직전 본인의 작품 대부분을 불태우거나 훼손했다. 1930년대에 이르러 동생 알로이스가 그의 작품 30여점을 발견하고 복원해 세간에 알려지게 됐다. 전시장에선 몇 남지 않은 그의 여성 인물화와 풍경화들을 실견할 수 있다.
리하르트 게를스틀, '헨리카 콘의 초상', 1908, ©Leopold Museum, Vienna
리하르트 게를스틀, '헨리카 콘의 초상', 1908, ©Leopold Museum, Vienna
'은색의 클림트' 에곤 실레

해골처럼 앙상한 살점과 뒤틀린 듯 꺾인 관절. 평생 수백점의 자화상을 그린 실레(1980~1918)의 작품에 공통으로 드러나는 특징이다. 그는 학대에 가까울 정도로 자기 신체를 실험하고, 이로 인한 과격한 몸짓과 동작을 화면에 담았다. 클림트 이후 세대의 빈 분리파를 이끌며 시대의 찬사를 받은 천재 작가는 어쩌다 죽음과 덧없음을 노래하게 된 걸까.

15세 때 아버지를 매독으로 잃은 소년의 눈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그는 어머니 마리 실레한테 사랑받지 못했다. 안정적인 직업을 갖길 바랐던 마리는 실레의 미술 공부를 억압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모성의 빈자리를 여동생과 삼촌이 대신 채워줬다. '피아노를 치는 레오폴트 치하체크'(1907)는 실레가 부드러운 파스텔 색채로 그린 삼촌의 모습이다.
에곤 실레, '어머니와 아이', 1912. ©Leopold Museum, Vienna
에곤 실레, '어머니와 아이', 1912. ©Leopold Museum, Vienna
어린 시절 겪은 결핍은 '어머니와 아이'(1912) 등 모자(母子) 인물화에서도 나타난다. 아이를 포옹하는 자애로운 어머니로 보이지만, 겁에 질린 듯한 아이의 표정이 꺼림칙한 느낌을 자아낸다. '어머니와 두 아이Ⅱ'(1915)에선 해골처럼 분장한 어머니가 이미 죽은 듯한 아이들을 껴안는 도상에 다다른다.

이런 실레한테 28세 연상의 클림트는 예술적 동지이자 멘토 같은 존재였다. 미술 아카데미 재학시절의 실레를 처음 만난 클림트는 후배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봤다. 국내외 전시와 작품 판매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실레 또한 '은색의 클림트'라고 불릴 정도로 빈 분리파의 차세대 리더 역할을 자처했다.
에곤 실레,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 1912. ©Leopold Museum, Vienna
에곤 실레,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 1912. ©Leopold Museum, Vienna
실레는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클림트가 여성에 대한 욕망을 투영하는 화려한 누드화를 그렸다면, 실레는 과격하고 거침없는 누드를 그렸다. 성을 지나치게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바람에 "음란하다"는 이유로 체포되기도 했다. 모친의 고향인 체코 크룸로프 지역을 그린 '작은 마을Ⅲ'(1913) 등 풍경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건물의 지붕과 도로를 검은 색조로 묘사한 그림은 마치 '죽은 도시'를 연상케 한다.

말년의 실레는 중산층 출신의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한 뒤 심리적으로 안정된 일상을 보냈다. 독일과 스위스, 체코 등에서 연 전시회가 성황을 이루며 부와 명예도 뒤따랐다. 예전과 달리 풍만하고 이상적인 체형의 누드를 그렸다. 전시장 말미의 '누워 있는 여성'(1917)은 이때의 성공 가도를 암시하듯 생명이 흘러넘치는 모습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장에서 큐레이터인 양승미 학예사가 기자들에게 오스카 코코슈카, 막스 오펜하이머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표현주의의 선구자인 천재 예술가들을 소개하는 섹션이다. /최혁 기자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장에서 큐레이터인 양승미 학예사가 기자들에게 오스카 코코슈카, 막스 오펜하이머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표현주의의 선구자인 천재 예술가들을 소개하는 섹션이다. /최혁 기자
어떤 꽃보다 풍성하게 만개한 빈 분리파는 1918년을 기점으로 시들었다. 실레의 멘토 클림트가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났다. 호프만의 스승이던 오토 바그너, 콜로만 모저도 연달아 사망했다. 유럽에서 2000만명의 사상자를 낸 스페인 독감이 빈을 덮쳤다. 임신 6개월차의 아내 에디트를 독감으로 먼저 보낸 실레는 3일 뒤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패전국 오스트리아는 제국의 명성을 잃었다. 제국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예술의 자유를 외친 빈 분리파도 혜성처럼 등장한 뒤 사라졌다. 불과 스물여덟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실레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아름답고 고귀한 자질은 내 안에 있다. 나는 썩어도 영원한 생명력을 남길 열매가 될 것이다." 실레의 대표작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1912)이 여전히 이 말을 건네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