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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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결산하는 시즌이 다가올 땐 괜히 시선의 범위를 확장시켜보곤 한다. 2024년은 어땠지, 에서 시작해 2020년대는 어땠지, 2010년대는, 21세기는, 내 삶은(?)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2024년의 한국문학은 어떠했나. 앞으로도 2024년을 생각하면 역시 '한강’이라는 이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겠지…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지던 날의 풍경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급히 회사로 돌아가는 동안 오늘 이전과 이후는 다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시야의 좌우로 하나둘씩 사라지는 가로등을 눈 가장자리로 느끼며 시간여행 포털을 타는 것만 같았다.

개별 작품이 아니라 작가에게 주는 노벨문학상은 한 명의 작가가 하나하나 써 내려간 글들이 족적이 되고 그처럼 두텁게 다진 땅이 곧 다채로운 존재들이 솟아나고 살아가는 숲의 토대가 된다는 진실을 예증한다. 그런 작가들이 하나둘 모여 언어권을 이루고 만들어낸 세계는 얼마나 무성하고 빽빽할 것인지. 그러므로 한 해를 제대로 결산해보겠다고, 아니 10년을, 한 세대를 톺아보겠다고 한다면 어지간한 성실함과 자신감이 아니고서는 엄두조차 나지 않을 텐데, 그걸 해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 소중한 일례가 『나선형 상상력』이라는 이름으로 올해 우리에게 찾아왔다.

『부흥 문화론』으로 눈 밝은 한국 독자들에게도 인상을 각인시킨 바 있는 비평가 후쿠시마 료타는 『나선형 상상력』에서 헤이세이 시기(1989~2019)의 일본문학을 말 그대로 장악하려는 시도를 전개한다. 논픽션의 경우 목차를 보면 이 책은 어떤 책인가를 대강 알 수 있다. 작가가 미리 자신의 뜻을 논리정연하게 배치해둬야 글이 잘 이어지기 마련이고, 다 쓴 뒤에는 그것이 자연스레 차례가 될 테니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차례는 간혹 그럴싸한 탐나는 단어들을 던져놓는 미끼가 되어 뻔한 말을 늘어놓는 본론을 감추기도 한다. 그러나 『나선형 상상력』의 차례를 일별하면서는 눈앞이 흐려지고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었다.
후쿠시마 료타, 『나선형 상상력』, 안지영 옮김 (리시올, 2024) 표지 / 출처. 예스24
후쿠시마 료타, 『나선형 상상력』, 안지영 옮김 (리시올, 2024) 표지 / 출처. 예스24
문학을 메타적으로 섭렵하는 일군의 독자들에게 컬트적인 인기를 끄는 마이조 오타로로 시작하여, '근대문학의 종언’ 테제를 상기시키는 '내향의 계보’, 2000년대 이후로 한국에서도 비평가들이 치열하게 문제의식을 주고받고 있는 '정치와 문학’의 관계, 좀 더 가깝게 2010년대부터 지금까지 가장 핫한 주제라 할 수 있는 '사소설’, 그리고 문학과 범죄, 역사와 허구의 문제까지… 이걸 19,000원밖에 하지 않는 한 권의 책 안에서 다룬다고? 새삼 책이 선사하는 지식의 민주화를 실감 나게 체감하는 순간이 아닌지….

이런 내 반응은 후쿠시마 료타라는 비평가, 그리고 리시올이라는 출판사에 대한 신뢰—특히 펴내는 매 책마다 리시올이 출판사 채널에서 덧붙이는 상세한 보론들은 업계 종사자로서도 독자로서도 귀하게 일독할 만하다—가 전제되어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지만, 실제로 책을 펼친 뒤 하나하나 페이지를 접고(책에 밑줄은 못 치는 편) 필타와 메모를 하느라 손가락이 뻐근할 정도였다. 여러 작가들의 책들이 날렵하게 등장하여 정보값이 빽빽할뿐더러 개별 장들의 겅중겅중 뻗어나가면서도 그 유기적인 논리 전개는 다른 장들과도 긴밀하게 맞물린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한 세대의 문학을 감히 포괄하려 드는 것이다.

이 책에 대한 웹 상과 주변의 반응에서 한결같았던 것은 다른 나라의 이야기인데도 우리의 경우를 겹쳐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오늘날 소설이 '이야기’를 점차 잃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비인간 존재를 주목하거나, 에세이 형식으로 다른 방식의 이야기를 도모하고 있다는 것, 정치와 문학이 분기되었다가 재결합한 이면에는 자기 부정의 민족주의가 힘을 잃고 자기 긍정 서사가 득세하는 경향이 연관되었다는 것, SNS의 영향으로 '자기 이야기’에 대한 욕구가 점증하는데 SNS 속의 편집된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는 서사가 '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와 맞닿는다는 것, 독자의 반응에 주목하는 경향이 작가와 독자로 하여금 서로 1인칭 '나’를 두고 나르시시즘적 소통 게임을 펼치게 한다는 것 등, 값진 분석이 곳곳에 알알이 박혀 있었다.

이처럼 상대적으로 커다랗게 살펴보는 시선 외에도 좋아하는 소설들을 빗대어 다시 읽어볼 만한 분석틀을 얻을 수 있기도 했다. 원전 사고 이후의 무력감—특히 소설을 쓴다는 것에 대한—에 대한 내용과, 비인간 존재가 인간 화자를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소설에 대한 분석에서 나는 박솔뫼의 『겨울의 눈빛』 속 단편들을 떠올렸다. 소설에선 원전 사고로 인해 원래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아야 할 존재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해맑은 눈으로 사람을 위무하는 그 존재들을 바라보면서도, 그들을 손쉽게 동정함으로써 거짓된 자기 위로를 구하지는 않으려고 노력하는 화자의 태도는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박솔뫼의 소설적 입장이다.
[차례대로] 박솔뫼, 『겨울의 눈빛』 (문학과지성사, 2017) 표지 / 오한기, 『홍학이 된 사나이』 (문학동네, 2016) 표지 / 출처. 알라딘커뮤니케이션
[차례대로] 박솔뫼, 『겨울의 눈빛』 (문학과지성사, 2017) 표지 / 오한기, 『홍학이 된 사나이』 (문학동네, 2016) 표지 / 출처. 알라딘커뮤니케이션
한편으로 폭력과 범죄에 대한 다음 문장에서는 오한기의 몇몇 소설들을 떠올렸다. "폭력은 타자와 자기를 파괴하는 동시에 물리적 접촉에 의해 타자와의 관계를 과잉화한다."(45쪽) "범죄나 트라우마를 말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다른 관계로 재정위하려 한 것이다."(170쪽) 『의인법』 『홍학이 된 사나이』 『가정법』과 같은 소설들은 인간 존재와 필연적으로 결부된 폭력성을 짊어지고 그로부터 일어나 어떻게 사랑을 말할 수 있는가를 지극히 슬프고 아름답게 그려낸다. 나는 이 길을 거치지 않고서 사랑을 말한다는 건 기만이 아닐 수 없다 느낀다.

문학과 사회가 나선을 그리며 상호작용하는 양상을 포착하는 『나선형 상상력』은 같은 시대에 한국과 일본이 마찬가지로 나선을 그리며 같은 그림을 그려내는 모습을 읽어내고 있기도 하다. 우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 책을 여러 번 다시 읽을 필요성을 느낀다.

2024년에도 좋은 책이 많았다, 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한 권 한 권 떠올릴 때마다 어떻게 이곳에 찾아와주셨어요, 무척 감읍하게 된다. 그리고 각 책들이 소중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서로 대체될 수 없이 다른 역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테다. 다만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 시기에 마지막으로 한 권의 책을 읽는다면, 한 세대와 그들이 보낸 30년의 시간을 따스한 애정으로 살펴보는 이 책이 제격이지 않을까.

이재현 문학동네 국내문학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