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보고 결혼했네"...재벌 딸과 결혼한 男에 쏟아진 비난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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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분리파를 만든
'헌신적인 멀티플레이어'
콜로만 모저(1868~1918)
국립중앙박물관서 은은하게 빛나는
그의 삶과 예술
'헌신적인 멀티플레이어'
콜로만 모저(1868~1918)
국립중앙박물관서 은은하게 빛나는
그의 삶과 예술
“그 교수, 능력도 좋아. 자기가 가르치는 재벌집 여학생을 낚았다지? 나이 차이가 열다섯 살이나 난다던데.”
“결혼하려고 종교까지 바꿨다는군. 자기가 믿던 가톨릭을 버리고 개신교를 택했다지. 아무리 돈이 좋다고 해도…. 좀 너무하지 않나?”
1905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빈). 카페에서 신문을 보던 사람들은 저마다 혀를 차며 이런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신문에 이런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었거든요. “비천한 출신의 예술가, 백만장자의 사위가 되다!”
기사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한 유명 미술대학 교수가 결혼했다. 그런데 상대는 자신이 가르치던 열다섯 살 연하의 제자,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돈 많은 가문의 딸이었다. 교수는 결혼을 승낙받기 위해 종교까지 바꿨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교수의 집안 형편이 좋지 못했던 걸 생각해 보면, 교수가 자신의 재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혼을 무리하게 밀어붙였다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그 교수를 실제로 아는 사람들은, 모두 기사를 보고 웃어넘겼습니다. “돈만 보고 결혼했다고? 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만큼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 그럴 만도 했습니다. 교수의 이름은 콜로만 모저(1868~1918). 당대 빈의 예술을 하나로 연결한 다재다능한 천재이자,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예술의 아름다움을 전하기 위해 평생 노력한 사람이었거든요.
그에겐 클림트와 에곤 실레 같은 다른 전시 주인공들의 이름값이나 강렬함은 없습니다. 전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그렇게 높다고 하긴 어렵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전시를 둘러보고 난 관람객 중에서는 “왠지 모저의 작품이 느낌이 좋고 가슴에 와닿았다”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반응은, 모저의 삶과 성품에서 나오는 향기가 관객에게 전해진 덕분일지도 모릅니다.
모저는 1868년 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직업은 학교 경비원. 집안 형편은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일하는 학교가 당시 최고 명문 사립 학교(테레지아눔)였던 덕분에, 어린 시절의 모저는 학교를 놀이터처럼 누빌 수 있었습니다. 학교에는 강의실은 물론 넓은 공원, 수영장, 승마 학교, 다양한 공방이 갖춰져 있었습니다. 비록 학교에 입학할 순 없었지만 모저는 그 모든 시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시설은 공방. 이곳에서 모저는 디자인과 공예의 기초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미술에 대한 사랑을 함께 키웠습니다. 매일같이 부잣집 학생들을 보며 일하던 모저의 아버지는 평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 손자는 꼭 테레지아눔에 입학했으면 좋겠어.’ 그래서 아버지는 모저가 실업 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인기 업종이었던 비누 회사에 취업해 돈을 많이 벌기를 원했습니다. 착한 아들이었던 모저는 아버지의 희망대로 실업 학교에 입학했고요. 하지만 모저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미술에 대한 열정이 숨어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 몰래 실업 학교에서 그림 수업을 함께 들었습니다.
‘역시 그림 그리는 게 제일 재미있어. 나중에 미련이 남지 않으려면, 미술대학 입학 원서라도 재미로 한번 넣어봐야겠어.’ 그렇게 열일곱 살의 모저는 학교에 다니면서 빈 최고의 명문 미술대학인 빈 예술대학에 시험을 쳤습니다.
그런데 의외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덜컥 붙어버린 겁니다. ‘이걸 어쩌나. 부모님이 입학을 허락해주실 리가 없는데….’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 부모님에게 합격 사실과 예술가의 꿈을 고백한 모저. 또 한번 더 의외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버지가 껄껄 웃으며 기뻐한 겁니다. “정말 잘 됐어! 네가 하고 싶고, 재능이 있는 걸 해야지. 너는 어린 시절부터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였지. 아빠는 너를 믿는다. 네 학비 정도는 알아서 마련해 보마.” 모저의 예술가로서의 삶은 그렇게 아버지의 축복과 함께 시작됐습니다.
그러던 1896년, 스물여덟 살의 모저는 젊고 재능있는 동료 예술가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심에 있던 남자가 구스타프 클림트였습니다. 모저는 훗날 회고했습니다. “옅은 눈썹과 짧은 수염,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를 가진 서른 살 정도의 건장한 남자를 보았다. 클림트였다. 그의 작품은 대단했다. 그야말로 클림트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이었다.” 클림트 주변에 모여든 다른 예술가들 역시, 모저처럼 클림트에 매료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저를 비롯한 이 예술가들은 “새로운 예술을 만들자”는 데 의기투합해 ‘빈 분리파’를 결성하게 됩니다.
모저는 동료들에게 그간 예술에 대해 생각했던 것들을 털어놨습니다. “꼭 그림이나 조각만 예술은 아니잖아. 디자인이나 공예 같은 것들도 예술이야. 그리고 이런 것들을 통해 더 많은 사람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을 알리면, 사람들은 우리를 더 깊이 이해할 거야. 그들의 삶도 더 아름다워질 것이고.” 빈 분리파 예술가들은 모저의 말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빈 분리파가 아름답게 디자인한 잡지를 내고, 공방을 설립해 공예품을 만들고, 나아가 여러 가지 예술 양식을 서로 결합하는 실험적인 미술을 한 데에는 이런 모저의 영향이 컸습니다. 예컨대 빈 분리파 건물에 있던 부엉이 장식.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부엉이 묘사에 익숙했던 당시 빈 시민들에게, 빈 분리파 특유의 화풍으로 신비롭게 단순화된 부엉이 장식은 꽤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모저에 따르면 당시 전시장 앞에서는 행인과 분리파 예술가 사이에서 이런 대화가 오갔다고 합니다.
이런 부엉이 장식은 지금의 눈으로 보면 멋지긴 해도 특별할 건 없습니다. 하지만 이 대화는 전통적이고 사실적인 표현 방식에 익숙한 당시 사람들에게 빈 분리파의 양식이 얼마나 새롭고 충격적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분리파 예술가들이 자기 작품에 대해 얼마나 자신감이 넘쳤는지도요.
자존심 강하고 경쟁심이 앞서는 다른 예술가와 달리, 모저는 다정하고 협력적이었습니다. 다른 예술가의 재능을 먼저 알아봐 주고 전체 프로젝트에서 누가 어떤 일을 맡을지를 사심 없이 결정했습니다. “교수로 와서 학생들을 가르쳐달라”는 빈 응용미술학교의 제안도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그게 빈 분리파의 생각을 더 널리 퍼뜨리는 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을 세심하게 가르치고 살뜰하게 챙겨서 모저는 인기가 매우 높은 교수님이었습니다. 이런 모저의 재능과 노력 덕분에 각자의 분야에서 활약하는 빈 분리파 예술가들은 하나로 묶여 ‘빈 분리파 스타일’을 뚜렷하게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유행을 만들며 대중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빈 분리파 스타일의 가구, 책 표지, 직물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한 겁니다. 동료 예술가들은 물론 일반 대중에게도 모저는 인기 만점. 클림트는 언젠가 웃으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 전시회에서 모저의 작품이 어디 있는지 보고 싶으면, 여성들이 어디에 몰려 있는지 찾아보면 돼. 모든 여성이 작품 앞에 있는 모저를 보러 찾아가거든!”
하지만 모저와 같은 헌신적인 멀티 플레이어가 겪어야 하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한 분야에 집중하는 예술가는 칭찬하는 게 간단합니다. “그 작가는 색채를 기가 막히게 쓰는 작가야” “그 작가는 정말 사실적이고 섬세한 조각을 하는 사람이야” 처럼요. 하지만 모저의 재능은 어떻게 분류해야 할지조차 쉽지 않습니다. 여러 분야에 걸쳐 있어 전문성은 다소 부족하다는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박지성이 그랬던 것처럼 모저는 무대 뒤의 영웅(unsung hero)이었지만, 중심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는 어려웠습니다. 이런 어려움은 모저의 결혼을 계기로 격화됩니다. 1905년, 모저가 서른일곱 살 때였습니다. 상대는 빈 응용미술학교에서 가르치던 열다섯 살 연하의 학생 디타(1883~1969). 디타는 똑똑하고 재능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우연한 계기로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된 두 사람은, 순식간에 사랑에 빠졌습니다. 걸림돌은 두 사람의 집안 차이. 디타가 오스트리아 최고의 재벌 가문 중 한 곳의 딸이었거든요. 하지만 디타를 깊이 사랑했던 모저는, 이런 조건으로 결혼을 승낙받았습니다. “제 종교를 바꾸겠습니다. 그리고 재정적으로도 완전히 서로 독립된 삶을 살겠다고 약속합니다.”
이는 결코 모저에게 좋다고 보기 어려운 조건이었습니다. 재정적으로 독립된 삶을 살겠다는 약속, 말하자면 통장을 합치지 않고 처가의 지원도 받지 않겠다는 것부터가 그랬습니다. 모저만 원한다면 결혼해서 재산을 마음껏 쓰게 해주겠다는 부잣집 딸들이 줄을 서 있었거든요. 개종은 더욱 더 불리한 조건이었습니다. 실제로 모저는 종교를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바꾸면서 진행 중이던 성당 장식 프로젝트에서 퇴출당해야 했습니다. 결혼 때문에 예술적인 명성도 깎이게 된 겁니다. 그런데도 모저는 디타를 너무나도 사랑했습니다. 주변 사람들도 그걸 알았습니다. 하지만 잘 나가는 사람 옆에는 언제나 질투하는 사람들이 있는 법. 그를 두고 이렇게 악담하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모저, 사실 거품 아냐? 그림이든 조각이든 한 가지 특출난 것도 없고 그냥 이미지 관리를 잘 한 것 아닌가? 이제 부잣집 딸과 결혼해서 인생 폈구먼.”
사실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이 그렇듯, 수군대는 사람이 점차 늘면서 모저의 입지도 약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모저 몰래 디타에게 접근해 “돈 좀 빌려달라”는 사람까지 생겨났습니다. 모저는 깨달았습니다. ‘이제 빈 분리파를 떠날 때가 됐구나.’ 그리고 그는 자신이 소속된 빈 공방에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저는 행복했습니다. 마침내 자신의 예술적 첫사랑, 그림으로 돌아왔거든요. 실업 학교에서 아버지 몰래 드로잉 수업을 들으며 예술가의 꿈을 키우던 그때. 그때를 떠올리며 모저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파스텔색부터 황토색, 풍경화에서부터 과일과 꽃을 그린 정물화들까지 모저는 자신의 예술을 찾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거듭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그는 마흔다섯 살이던 1913년 스위스 화가 페르디난트 호들러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하기 시작했습니다. 안타깝게도 3년 뒤인 1916년 모저는 자신이 후두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투병이 시작됩니다. 그를 아는 친구는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을 모저는 차분한 체념으로 견뎌냈다.” 그리고 2년이 흐른 1918년 10월 18일, 모저는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두 번의 세계대전이 지나가며 그의 이름은 한동안 잊혔습니다. 클림트와 에곤 실레가 뒤늦게 재조명받을 때조차 모저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러 자료가 발견돼 연구가 진행되고 당시 상황이 밝혀지면서 모저는 현대에 이르러 다시 주목받게 됐습니다. 이는 우리가 예술사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전과 달라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역사나 예술사에는 여러 굵직한 사건이 있습니다. 어떤 사건은 초인적인 영웅의 의지에 의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떤 일은 누군가의 철저한 계획에 따라 벌어지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마법적인 우연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사건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절묘한 시기에 딱 들어맞는 사람들이 만나고, 이들의 창조적인 힘이 모이면 역사가 바뀝니다. 1900년을 전후한 빈의 예술계도 그런 일을 겪었습니다. 덕분에 미술사는 더욱 풍요로워졌고,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생활용품들은 빈 분리파가 없었을 때보다 더욱 아름다워졌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게 됐습니다. 어떤 역사든 그 중심에는 여러 재능들을 잇고 조직하고 헌신적으로 뒷받침했던, 주목받지 못한 영웅이 있었다는 사실을요.
역사도 예술도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뤄내는 것. 서양 근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조 중 하나인 빈 분리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중심에는 많은 이들의 재능을 하나로 엮어 분리파라는 정신을 구현한 콜로만 모저가 있었습니다. 그의 삶처럼 모저의 작품 속에는, 눈에 확 띄지는 않지만 은은하게 빛나는 귀중한 성품과 아름다움이 담겨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는 3월 3일까지 이어집니다.
**이번 기사 내용은 Rennhofer, Maria 'Koloman Moser : Master of Viennese Modernism'을 중심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도록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최근 출간한 책 <명화의 발견, 그때 그 사람>에 클림트, 실레, 코코슈카, 게르스틀 등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주요 작가들의 삶과 작품세계를 비롯해 레오나르도 다빈치·미켈란젤로·라파엘로의 경쟁 이야기, 폴 세잔과 고갱 등 다른 대가들의 이야기가 함께 실려 있습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서점,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굿즈샵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결혼하려고 종교까지 바꿨다는군. 자기가 믿던 가톨릭을 버리고 개신교를 택했다지. 아무리 돈이 좋다고 해도…. 좀 너무하지 않나?”
1905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빈). 카페에서 신문을 보던 사람들은 저마다 혀를 차며 이런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신문에 이런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었거든요. “비천한 출신의 예술가, 백만장자의 사위가 되다!”
기사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한 유명 미술대학 교수가 결혼했다. 그런데 상대는 자신이 가르치던 열다섯 살 연하의 제자,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돈 많은 가문의 딸이었다. 교수는 결혼을 승낙받기 위해 종교까지 바꿨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교수의 집안 형편이 좋지 못했던 걸 생각해 보면, 교수가 자신의 재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혼을 무리하게 밀어붙였다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그 교수를 실제로 아는 사람들은, 모두 기사를 보고 웃어넘겼습니다. “돈만 보고 결혼했다고? 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만큼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 그럴 만도 했습니다. 교수의 이름은 콜로만 모저(1868~1918). 당대 빈의 예술을 하나로 연결한 다재다능한 천재이자,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예술의 아름다움을 전하기 위해 평생 노력한 사람이었거든요.
학교 경비원의 아들
모저는 지금 서울 용산동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최고 인기 전시,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의 주인공 중 한 명입니다. 전시장에는 그의 회화 작품과 식기 같은 공예품 등이 열 점 안팎 나와 있습니다.그에겐 클림트와 에곤 실레 같은 다른 전시 주인공들의 이름값이나 강렬함은 없습니다. 전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그렇게 높다고 하긴 어렵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전시를 둘러보고 난 관람객 중에서는 “왠지 모저의 작품이 느낌이 좋고 가슴에 와닿았다”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반응은, 모저의 삶과 성품에서 나오는 향기가 관객에게 전해진 덕분일지도 모릅니다.
모저는 1868년 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직업은 학교 경비원. 집안 형편은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일하는 학교가 당시 최고 명문 사립 학교(테레지아눔)였던 덕분에, 어린 시절의 모저는 학교를 놀이터처럼 누빌 수 있었습니다. 학교에는 강의실은 물론 넓은 공원, 수영장, 승마 학교, 다양한 공방이 갖춰져 있었습니다. 비록 학교에 입학할 순 없었지만 모저는 그 모든 시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시설은 공방. 이곳에서 모저는 디자인과 공예의 기초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미술에 대한 사랑을 함께 키웠습니다. 매일같이 부잣집 학생들을 보며 일하던 모저의 아버지는 평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 손자는 꼭 테레지아눔에 입학했으면 좋겠어.’ 그래서 아버지는 모저가 실업 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인기 업종이었던 비누 회사에 취업해 돈을 많이 벌기를 원했습니다. 착한 아들이었던 모저는 아버지의 희망대로 실업 학교에 입학했고요. 하지만 모저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미술에 대한 열정이 숨어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 몰래 실업 학교에서 그림 수업을 함께 들었습니다.
‘역시 그림 그리는 게 제일 재미있어. 나중에 미련이 남지 않으려면, 미술대학 입학 원서라도 재미로 한번 넣어봐야겠어.’ 그렇게 열일곱 살의 모저는 학교에 다니면서 빈 최고의 명문 미술대학인 빈 예술대학에 시험을 쳤습니다.
그런데 의외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덜컥 붙어버린 겁니다. ‘이걸 어쩌나. 부모님이 입학을 허락해주실 리가 없는데….’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 부모님에게 합격 사실과 예술가의 꿈을 고백한 모저. 또 한번 더 의외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버지가 껄껄 웃으며 기뻐한 겁니다. “정말 잘 됐어! 네가 하고 싶고, 재능이 있는 걸 해야지. 너는 어린 시절부터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였지. 아빠는 너를 믿는다. 네 학비 정도는 알아서 마련해 보마.” 모저의 예술가로서의 삶은 그렇게 아버지의 축복과 함께 시작됐습니다.
클림트를 만나다
열여덟 살에 빈 예술대학에 입학한 모저. 하지만 스무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삶에 고난이 시작됩니다. 이제 모저는 예술대학 학비는 물론 가족의 생활비까지 벌어야 했습니다. 다행히도 재능 있고 성실하고 인품이 훌륭했던 그에게는 여러 일감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여러 잡지와 책에 실릴 그림을 그렸습니다. 황족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가정 교사로도 일했습니다. 그렇게 수년간 모저는 미술을 공부하고, 미술로 돈을 벌었습니다. 주변에 사는 서민들부터 자신이 가정 교사로 일하는 황족의 집까지, 다양한 계층의 삶을 보고 겪으며 모저의 안에서는 이런 생각이 자라났습니다. ‘부잣집에 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워. 식탁과 의자부터 그릇과 식기까지.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집에 있는 가구나 물건들은 거칠고 투박해. 난 그게 싫어. 유명한 화가의 명화나 멋진 대리석 조각은 없어도, 가난한 사람들도 생활 속에서 예쁜 물건들을 쓰고 나름의 예술을 즐길 수 있게 하고 싶어.’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흔한 잔이나 그릇, 가구도 훌륭한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총체예술’ 개념의 시작이었습니다.그러던 1896년, 스물여덟 살의 모저는 젊고 재능있는 동료 예술가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심에 있던 남자가 구스타프 클림트였습니다. 모저는 훗날 회고했습니다. “옅은 눈썹과 짧은 수염,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를 가진 서른 살 정도의 건장한 남자를 보았다. 클림트였다. 그의 작품은 대단했다. 그야말로 클림트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이었다.” 클림트 주변에 모여든 다른 예술가들 역시, 모저처럼 클림트에 매료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저를 비롯한 이 예술가들은 “새로운 예술을 만들자”는 데 의기투합해 ‘빈 분리파’를 결성하게 됩니다.
모저는 동료들에게 그간 예술에 대해 생각했던 것들을 털어놨습니다. “꼭 그림이나 조각만 예술은 아니잖아. 디자인이나 공예 같은 것들도 예술이야. 그리고 이런 것들을 통해 더 많은 사람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을 알리면, 사람들은 우리를 더 깊이 이해할 거야. 그들의 삶도 더 아름다워질 것이고.” 빈 분리파 예술가들은 모저의 말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빈 분리파가 아름답게 디자인한 잡지를 내고, 공방을 설립해 공예품을 만들고, 나아가 여러 가지 예술 양식을 서로 결합하는 실험적인 미술을 한 데에는 이런 모저의 영향이 컸습니다. 예컨대 빈 분리파 건물에 있던 부엉이 장식.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부엉이 묘사에 익숙했던 당시 빈 시민들에게, 빈 분리파 특유의 화풍으로 신비롭게 단순화된 부엉이 장식은 꽤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모저에 따르면 당시 전시장 앞에서는 행인과 분리파 예술가 사이에서 이런 대화가 오갔다고 합니다.
행인 : 저게 부엉이에요? 부엉이 같지도 않구먼, 뭐가 저래.
예술가 : 글쎄요, 무슨 부엉이 말씀이신가요? 저 장식 말씀이신가요?
행인 : 네, 저 장식이 제가 눈에는 부엉이처럼 보이는데요.
예술가 : 그렇군요. 그런데 부엉이를 만든 작품이 제대로 부엉이처럼 보인다면, 아무 문제 없는 거 아닌가요? 뭐가 불만이신가요?
예술가 : 글쎄요, 무슨 부엉이 말씀이신가요? 저 장식 말씀이신가요?
행인 : 네, 저 장식이 제가 눈에는 부엉이처럼 보이는데요.
예술가 : 그렇군요. 그런데 부엉이를 만든 작품이 제대로 부엉이처럼 보인다면, 아무 문제 없는 거 아닌가요? 뭐가 불만이신가요?
이런 부엉이 장식은 지금의 눈으로 보면 멋지긴 해도 특별할 건 없습니다. 하지만 이 대화는 전통적이고 사실적인 표현 방식에 익숙한 당시 사람들에게 빈 분리파의 양식이 얼마나 새롭고 충격적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분리파 예술가들이 자기 작품에 대해 얼마나 자신감이 넘쳤는지도요.
다정한 ‘멀티 플레이어’
빈 분리파에서 모저의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셨습니다. 모저는 빈 분리파가 정기적으로 내는 잡지의 페이지를 디자인하고 삽화를 그렸습니다. 전시 도록과 우표도 디자인했습니다. 오랜 기간 관련 작업으로 돈을 벌었던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됐습니다. 전시회에는 자신이 만든 공예 작품을 냈습니다. 사람들이 좀 더 싼 값으로 아름다운 제품들을 즐길 수 있도록, 공방의 생산 비용을 줄이고 시스템을 정비하는 것도 모저의 몫이었습니다. 이는 그의 다재다능함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알기 쉬운 예를 들어보자면 그는 축구선수에 비유할 때 박지성 선수였습니다. 체력이나 기술은 물론 물론 경기를 읽는 능력도 뛰어나서, 여러 포지션에서 자연스럽게 뛸 수 있다는 게 박지성의 장점이었습니다. 모저 역시 화가, 그래픽 아티스트, 삽화가, 일러스트레이터로서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 재능이 모두 뛰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곳이 모저처럼 변하고(Moserized) 있다.”자존심 강하고 경쟁심이 앞서는 다른 예술가와 달리, 모저는 다정하고 협력적이었습니다. 다른 예술가의 재능을 먼저 알아봐 주고 전체 프로젝트에서 누가 어떤 일을 맡을지를 사심 없이 결정했습니다. “교수로 와서 학생들을 가르쳐달라”는 빈 응용미술학교의 제안도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그게 빈 분리파의 생각을 더 널리 퍼뜨리는 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을 세심하게 가르치고 살뜰하게 챙겨서 모저는 인기가 매우 높은 교수님이었습니다. 이런 모저의 재능과 노력 덕분에 각자의 분야에서 활약하는 빈 분리파 예술가들은 하나로 묶여 ‘빈 분리파 스타일’을 뚜렷하게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유행을 만들며 대중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빈 분리파 스타일의 가구, 책 표지, 직물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한 겁니다. 동료 예술가들은 물론 일반 대중에게도 모저는 인기 만점. 클림트는 언젠가 웃으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 전시회에서 모저의 작품이 어디 있는지 보고 싶으면, 여성들이 어디에 몰려 있는지 찾아보면 돼. 모든 여성이 작품 앞에 있는 모저를 보러 찾아가거든!”
하지만 모저와 같은 헌신적인 멀티 플레이어가 겪어야 하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한 분야에 집중하는 예술가는 칭찬하는 게 간단합니다. “그 작가는 색채를 기가 막히게 쓰는 작가야” “그 작가는 정말 사실적이고 섬세한 조각을 하는 사람이야” 처럼요. 하지만 모저의 재능은 어떻게 분류해야 할지조차 쉽지 않습니다. 여러 분야에 걸쳐 있어 전문성은 다소 부족하다는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박지성이 그랬던 것처럼 모저는 무대 뒤의 영웅(unsung hero)이었지만, 중심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는 어려웠습니다. 이런 어려움은 모저의 결혼을 계기로 격화됩니다. 1905년, 모저가 서른일곱 살 때였습니다. 상대는 빈 응용미술학교에서 가르치던 열다섯 살 연하의 학생 디타(1883~1969). 디타는 똑똑하고 재능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우연한 계기로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된 두 사람은, 순식간에 사랑에 빠졌습니다. 걸림돌은 두 사람의 집안 차이. 디타가 오스트리아 최고의 재벌 가문 중 한 곳의 딸이었거든요. 하지만 디타를 깊이 사랑했던 모저는, 이런 조건으로 결혼을 승낙받았습니다. “제 종교를 바꾸겠습니다. 그리고 재정적으로도 완전히 서로 독립된 삶을 살겠다고 약속합니다.”
이는 결코 모저에게 좋다고 보기 어려운 조건이었습니다. 재정적으로 독립된 삶을 살겠다는 약속, 말하자면 통장을 합치지 않고 처가의 지원도 받지 않겠다는 것부터가 그랬습니다. 모저만 원한다면 결혼해서 재산을 마음껏 쓰게 해주겠다는 부잣집 딸들이 줄을 서 있었거든요. 개종은 더욱 더 불리한 조건이었습니다. 실제로 모저는 종교를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바꾸면서 진행 중이던 성당 장식 프로젝트에서 퇴출당해야 했습니다. 결혼 때문에 예술적인 명성도 깎이게 된 겁니다. 그런데도 모저는 디타를 너무나도 사랑했습니다. 주변 사람들도 그걸 알았습니다. 하지만 잘 나가는 사람 옆에는 언제나 질투하는 사람들이 있는 법. 그를 두고 이렇게 악담하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모저, 사실 거품 아냐? 그림이든 조각이든 한 가지 특출난 것도 없고 그냥 이미지 관리를 잘 한 것 아닌가? 이제 부잣집 딸과 결혼해서 인생 폈구먼.”
사실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이 그렇듯, 수군대는 사람이 점차 늘면서 모저의 입지도 약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모저 몰래 디타에게 접근해 “돈 좀 빌려달라”는 사람까지 생겨났습니다. 모저는 깨달았습니다. ‘이제 빈 분리파를 떠날 때가 됐구나.’ 그리고 그는 자신이 소속된 빈 공방에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빈 분리파, 그 후
공교롭게도 모저의 탈퇴 이후 빈 분리파는 에곤 실레를 필두로 한 다음 세대 예술가들에게 자리를 넘겨주게 되고, 빈 공방 역시 재정적 파산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모저가 떠난 뒤에야 사람들은 그의 빈자리를 깨달았습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었는지, 얼마나 중요한 것을 담당하고 있었는지요.그러거나 말거나 모저는 행복했습니다. 마침내 자신의 예술적 첫사랑, 그림으로 돌아왔거든요. 실업 학교에서 아버지 몰래 드로잉 수업을 들으며 예술가의 꿈을 키우던 그때. 그때를 떠올리며 모저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파스텔색부터 황토색, 풍경화에서부터 과일과 꽃을 그린 정물화들까지 모저는 자신의 예술을 찾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거듭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그는 마흔다섯 살이던 1913년 스위스 화가 페르디난트 호들러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하기 시작했습니다. 안타깝게도 3년 뒤인 1916년 모저는 자신이 후두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투병이 시작됩니다. 그를 아는 친구는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을 모저는 차분한 체념으로 견뎌냈다.” 그리고 2년이 흐른 1918년 10월 18일, 모저는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두 번의 세계대전이 지나가며 그의 이름은 한동안 잊혔습니다. 클림트와 에곤 실레가 뒤늦게 재조명받을 때조차 모저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러 자료가 발견돼 연구가 진행되고 당시 상황이 밝혀지면서 모저는 현대에 이르러 다시 주목받게 됐습니다. 이는 우리가 예술사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전과 달라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역사나 예술사에는 여러 굵직한 사건이 있습니다. 어떤 사건은 초인적인 영웅의 의지에 의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떤 일은 누군가의 철저한 계획에 따라 벌어지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마법적인 우연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사건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절묘한 시기에 딱 들어맞는 사람들이 만나고, 이들의 창조적인 힘이 모이면 역사가 바뀝니다. 1900년을 전후한 빈의 예술계도 그런 일을 겪었습니다. 덕분에 미술사는 더욱 풍요로워졌고,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생활용품들은 빈 분리파가 없었을 때보다 더욱 아름다워졌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게 됐습니다. 어떤 역사든 그 중심에는 여러 재능들을 잇고 조직하고 헌신적으로 뒷받침했던, 주목받지 못한 영웅이 있었다는 사실을요.
역사도 예술도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뤄내는 것. 서양 근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조 중 하나인 빈 분리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중심에는 많은 이들의 재능을 하나로 엮어 분리파라는 정신을 구현한 콜로만 모저가 있었습니다. 그의 삶처럼 모저의 작품 속에는, 눈에 확 띄지는 않지만 은은하게 빛나는 귀중한 성품과 아름다움이 담겨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는 3월 3일까지 이어집니다.
**이번 기사 내용은 Rennhofer, Maria 'Koloman Moser : Master of Viennese Modernism'을 중심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도록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최근 출간한 책 <명화의 발견, 그때 그 사람>에 클림트, 실레, 코코슈카, 게르스틀 등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주요 작가들의 삶과 작품세계를 비롯해 레오나르도 다빈치·미켈란젤로·라파엘로의 경쟁 이야기, 폴 세잔과 고갱 등 다른 대가들의 이야기가 함께 실려 있습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서점,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굿즈샵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6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