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골판지원지업계가 일본산 골판지원지 덤핑(저가 밀어내기) 공세에 맞서 일본 대형 제지사 다이오제지, 오지제지를 상대로 반덤핑 제소를 추진하기로 했다. 일본산 저가 골판지원지가 고품질 국산 제품으로 둔갑해 시장을 잠식하자 강경 대응에 나선 것이다. 국내 골판지업계가 반덤핑 제소 절차에 들어간 건 이번이 처음이다.
韓 골판지업계 '국산 둔갑' 저가 일본산에 칼 뺀다

○저사양 제품으로 가격 교란

15일 제지업계에 따르면 아세아제지는 일본산 골판지원지에 대한 반덤핑 제소 방침을 확정하고 시장 피해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태림페이퍼, 고려제지도 아시아제지와 공감대를 이룬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산 저가 제품 침투로 타격을 받은 제품은 ‘크라프트라이너보드(KLB)’라고 불리는 골판지원지다. 다른 골판지원지보다 물리적 강도가 높아 텔레비전, 냉장고 등 주로 대형 전자제품의 포장 박스용으로 쓰인다. 포장가공 업체는 골판지원지 회사에서 KLB를 받아 고객사 요구 사양에 맞게 상자를 만들어 삼성전자, LG전자 등에 공급한다.

하지만 2~3년 전부터 일본산 저사양 골판지원지(테스트라이너급)가 국내 시장에 저렴하게 공급되면서 제지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국산 KLB의 강도는 1㎡당 175g으로 다른 골판지원지보다 단단하다. 일본 저사양 골판지원지 강도는 1㎡당 160g이다. 국산 KLB는 펄프를 20% 이상 섞어 만드는 반면 일본 저사양 제품은 100% 재생지로 제조한다. 품질 면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국내 제지업계가 반덤핑 제소를 결정한 건 일본 제지 업체가 자국 내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싸게 제품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다이오제지와 오지제지는 재생지 골판지원지를 일본에서 t당 500달러(약 70만원)가량에 파는데, 국내에선 420~450달러(약 60만~63만원)에 판매하고 있다. 아세아제지 등 국산 KLB는 t당 70만원대에 거래된다.

○日 골판원지 수입 2년 새 세 배↑

국산 KLB와 일본산 재생 골판지원지는 3년 전까지만 해도 겉모습으로 확연히 구분됐다. 짙은 갈색인 국산 KLB와 달리 일본산 저가 원지는 옅은 갈색이었다. 눈에 띄게 차이가 나서 포장업계가 일본 원지로 포장 상자를 만들면 최종 고객사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문제로 포장업계가 사용을 주저하자 일본 제지사는 약품을 넣어 국산 KLB와 비슷한 색을 구현했다. 일본산 저가 원지는 라면 상자와 택배 상자에 주로 쓰이는 종이다. 제지업계 관계자는 “KLB 규격 상자를 요구하는 삼성전자, LG전자 같은 대형 발주처도 상자 겉모습만으론 구분할 수 없어 속아 넘어갈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국산 KLB와 비슷한 색으로 수입되자 일본산 골판지원지 수입량은 지난해와 올해 큰 폭으로 늘었다. 관세청에 따르면 2022년 2만3743t이던 일본산 수입량이 지난해 5만6560t에 이어 올해(10월 기준)에는 6만2214t까지 올라왔다. 연말 기준 추정치가 7만4657t인 점을 고려하면 2년 만에 세 배 넘게 폭증한 것이다. 국내 골판지원지는 2021년 590만여t으로 생산 정점을 찍은 뒤 지난해 540만t으로 감소세로 돌아섰다.

가뜩이나 경기 침체로 골판지 관련 산업이 불황에 맞닥뜨린 가운데 일본산 저가 원지 침투가 골판지 생태계를 교란할 것이란 우려가 크다.

제지업계 관계자는 “싼 가격에 국내 시장을 잠식한 뒤 가격을 올릴 수 있다”며 “가격 왜곡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제대로 된 제품 정보가 최종 소비자에게 공개되지 않아 국내 업계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형창 기자 call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