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부터 하버드대서 한국현대사 강의…11년간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장 맡아
'내재적 발전론' 비판한 미 한국학자…카터 에커트 교수 별세
1990년대 초만 해도 한국 역사학계의 주류였던 '내재적 발전론'(조선 후기에 이미 자본주의의 싹이 자랐고 일제 침략과 방해가 없었다면 한국 스스로 근대화를 달성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비판하고 박정희(1917∼1979) 전 대통령의 군사주의가 생겨난 과정을 연구한 미국 내 대표적인 한국학자 카터 에커트(Carter J. Eckert) 하버드대 한국사 명예교수('윤세영 교수')가 지난 13일(현지시간) 세상을 떠났다고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가 전했다.

향년 79세.
시카고에서 태어난 고인은 로렌스대와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유럽 고대·중세사를 전공했다.

1969∼1977년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머문 것을 계기로 한국사에 관심을 뒀다.

귀국 후 워싱턴대(시애틀)에서 일본사와 한국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5년 하버드대 동아시아 언어·문명과 교수로 부임해 '두개의 한국'이라는 인기 학부 강의를 포함, 한국 현대사를 가르쳤다.

1993∼2004년 11년간 하버드대 한국학 연구소장(2대)을 지내며 이 연구소를 키우는데 기여했다.

'내재적 발전론' 비판한 미 한국학자…카터 에커트 교수 별세
고인의 대표적인 업적은 1991년 인촌 김성수 가문의 경성방직을 연구한 저서 '제국의 후예(Offspring of Empire·한국어판 2008년)'를 펴내 일제시대에 생긴 경성방직에서 현대 한국 자본가의 원형을 찾았다는 것. 경성방직을 이은 ㈜경방의 용인 창고에서 경성방직 자료를 찾아내 분석했다.

책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기원이 일제 식민통치에 있다"는 주장을 펴 '내재적 발전론'이 주류이던 한국사학계의 반발을 샀다.

에커트의 견해는 박정희의 공업화가 노동자를 착취하고 민족 정체성을 말살하려 한 일제 하 조선인 자본가들의 식민지 공업화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뉴라이트와는 달랐다.

근대화를 무조건 긍정한 게 아니라 비판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고찰했다.

이 책으로 미국역사학회가 동아시아 역사 부문에 주는 존 페어뱅크상을 받았다.

2004년 이화여대 명예 석학교수 위촉 기념 강연차 방한했을 때 언론 인터뷰에서 "'친일파'의 정의는 매우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만큼 역사 문헌과 자료를 통해 당시의 상황 등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며 "선친의 과거를 문제 삼아 후손들에게까지 책임을 지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박정희 연구에도 몰두해 2005년 조이제(1936∼2020) 전 동아시아경제연구원 이사장과 함께 '한국 근대화, 기적의 과정'(월간조선)을 펴낸 데 이어, 2016년 '박정희와 현대 한국:군사주의의 뿌리, 1866∼1945'(하버드대 출판부)를 출간했다.

2005년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나는 역사학자로서 박정희가 왜 그런 인물이 됐고, 왜 5·16군사정변이 일어났고, 왜 그런 정책을 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박정희 시대는,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혁기였다"며 "이 시기에 정부 쪽에 있던 사람이나 반정부 쪽에 있던 사람들의 경험을 후대가 볼 수 있게 문서보관소(archive) 방식으로 자료를 보존해야 한다.

빈곤 극복과 민주화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문서로 정리돼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를 위해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추진했는데 정치적 이유로 중단된 것 같다.

"
고 했다.

하버드대 교수들이 함께 쓴 한국사 개설서('Korea, Old and New', 1990)의 일제시대와 현대사 부분을 집필했다.

'내재적 발전론'을 비판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연구했지만, 국내의 보수적인 이들과는 결이 달랐다.

2015년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성명에 참여했고, 2021년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가 '일본군 위안부'를 '자발적 매춘부'라고 주장하자 앤드루 고든 교수와 함께 비판 성명("램지어 교수 인용문들을 추적해본 결과 우리는 물론이고 다른 학자들도 그가 위안부 피해자나 그 가족이 모집책이나 위안소와 체결한 실제 계약을 단 한 건도 찾아보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 "어떻게 읽지도 않은 계약에 대해 극히 강한 표현을 사용하며 믿을만한 주장들을 만들어냈는지 알 수 없다")을 발표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