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떠난지 11년만에 나타나 "불법파견…정규직 인정해달라"
현대차 사내협력업체를 떠난지 11년이 지나서 현대차를 상대로 정규직으로 인정해 달라며 불법파견 소송을 제기한 근로자가 대법원에서 패소했다. 오랜 시간 동안 권리를 행사하지 않아 실효됐다는 취지다. 불법파견 소송에서 실효의 원칙을 인정한 첫 대법원 판결이다.

18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제1부(주심 서경환 대법관)는 지난달 20일 현대차 아산공장에서 엔진제작공정 업무를 한 A씨가 현대차를 상대로 낸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A씨는 2000년 4월 현대차 아산공장 사내협력업체에 입사해 이후 2009년 9월 해고될 때까지 총 4개의 사내협력업체를 거치면서 엔진제작공정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A씨는 2021년 자신이 현대차의 지휘·명령을 받아 일했다며 파견법에 따라 현대차와 직접고용관계가 형성됐다고 주장했다. 파견법에 따르면 원청이 하청 소속 파견 근로자를 2년 이상 고용하면 원청이 근로자를 직접 고용을 해야 하는 의무가 발생한다.

A씨가 소송을 낸 것은 2000년 당시 A씨가 일했던 협력업체에 계속 남아있던 동료들이 2015년 대법원에서 불법파견을 인정 받아 현대차 근로자로 지위를 인정 받았기 때문이다. 다만 A씨는 2009년 아산공장을 떠난 이후 자동차 제조업과 관련된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

1심 법원은 A씨가 당시 작업 과정에서 현대차로부터 지휘·명령을 받았다며 불법파견을 인정했다. 법원은 A씨와 같은 업무를 했던 과거 동료들이 현대차를 상대로 승소한 판결에 적용된 법리를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2심에서 현대차는 '실효의 원칙'을 주장했다. A씨가 2009년 9월 퇴사 후 오랫동안 소송을 제기하지 않다가 2021년 1월 약 11년 4개월만에 소송을 제기한 것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취지였다. 현대차는 "권리를 행사하지 않은 긴 시간 동안 A씨가 권리행사를 하지 않을 거라는 정당한 기대가 생겼다"고 주장했다.

2심 고등법원은 현대차 주장을 일축했다. 재판부는 "근로자들이 많은 비용, 오랜 시간이 소요될 수 있는 법적 권리의 행사를 상당 기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신의성실의 원칙이나 실효의 원칙을 섣불리 적용하는 것은 자제될 필요가 있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A씨가 11년 동안 자동차 제조와 관련 없는 직종에서 일한 점, 동료 사내협력업체 근로자들이 대규모 소송을 통해 대법원에서 불법파견을 인정받은 2015년 이후 6년이 지나서야 소송을 제기한 점, 직접고용이 간주된 때로부터 약 18년이 지난 점 등을 고려해 "현대차는 A씨가 권리를 행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신뢰할 만한 정당한 사유가 있다"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불법파견의 경우에도) 근로자가 사업주에게 직접고용을 청구하는 '직접 고용의사표시 청구권'도 소멸시효가 10년"이라며 "(A씨 같이 11년이 지난 경우까지) 실효의원칙을 부정한다면 직접고용 의사표시 청구권과의 형평에도 어긋난다"고 판시했다. 이어 "원심의 판단은 실효의 원칙 적용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있다"며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다시 심리·판단하라"고 판단했다.

회사 측을 대리한 김상민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해고사건 외에 근로자파견관계를 다투는 소송에서는 실효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아, 법의 일반원칙인 신의칙 적용이 사실상 배제되어 왔다"며 "앞으로 법적 불안을 가져올 뇌관이었던 고용간주조항의 적용을 적절하게 제한함으로써 산업현장의 안정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곽용희 좋은일터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