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에세이] 힘에 겨워 넘어질 때
뜨거운 역사의 소용돌이 속 한 해가 저물어간다. 많은 행사가 취소되고 모임이 미뤄진다는 소식에 소상공인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뉴스가 연일 나온다. 정치·사회적으로 혼란한 시기에는 가장 약한 고리부터 어려움이 찾아온다. 더구나 그들이 질병 중이거나 보호가 필요한 아이거나, 경제적 회생을 기대하던 위기의 시민이라면 더욱 희망이 사라진다. 언론과 대중의 관심이 정치와 민주주의라는 대전제로 거리와 갈등에 집중될수록, 그 뒤안길의 그림자는 깊고도 짙다.

지난주 오랫동안 친하게 지낸 지인으로부터 아주 중요한 자선 디너 행사가 있으니 꼭 참석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주한미국상공회의소(AMCHAM) 회장을 지내고 지금은 유명 로펌의 대표로 왕성하게 활동 중인 제프리 존스였다. 으레 있는 사교적 행사일 텐데 이 시국에 취소되지 않은 것이 의아했다. 그런데 가 보니 이해하게 됐다.

행사장에선 마스크를 쓴 난치병 아이들이 나와 백일장의 수상 작품을 직접 낭독했다. 투병하며 건강했던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써 내려간 한 줄 한 줄에는 희망도 있고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 함께하는 감사 그리고 눈물겨운 어른스러움이 묻어난다. ‘함께 만드는 특별한 기적’이라는 슬로건도 눈에 띈다. 바로 어린 환자의 가족들이 간병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종합병원 근처에 집을 지어주는 사회공헌사업을 하는 ‘한국로날드맥도날드하우스’가 주최한 디너 행사였다. 경남 1호점에 이어 서울에도 곧 2호점을 열게 돼 이를 알리기 위한 목적이었다. 아이가 아프면 생계를 포기하고 병원 근처를 맴돌며 돌보는 부모의 고통을 해결하는 것이 목표다. 한국인도 아닌 그가 한국 어린이와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노력에 숙연해졌다.

요즘 여성가족재단에서 일하고 있다는 나의 근황을 듣고, 헤어 보디 제품을 생산해 꽤 명성을 얻은 후배가 연락해 왔다. 아이를 키우는 미혼모 시설이 있으면 물품을 보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서울 내 출산·양육 지원 한부모가족 복지 시설을 알아보니 서른 개가 넘는데, 담당자는 아빠와 아들이 사는 사찰시설에 보내는 게 어떠냐고 묻는다. 위기 임산부에 대한 관심이 최근 사회적으로 높아지다 보니 상대적으로 지원이 부족한 곳도 생긴다고 한다. 그 후배는 “겨울철에는 피부가 틀 테니 모자(母子)시설엔 로션을 더 많이 보내고, 샴푸와 비누는 부자(父子)가 사는 시설로 보내죠”라며 값나가는 물품들을 쾌척했다.

세상에는 세심한 배려를 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의 수고로 이 사회가 ‘아직은 살 만한 곳’이라는 희망이 생긴다. 묵묵히 자기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평범하고 기특한 사람들로 인한 온정이 사회 구석구석 흘러감에 감사한 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