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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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문학평론가
겨울 해는 점점 늦게 뜨고 빨리 진다. 이미 일년초 식물의 잎과 줄기는 덧없이 시들었다. 활엽수는 한파 속에서 헐벗은 채 떨고 있다. 저물녘 가로수의 그림자가 길어질 때 마음에 고적함과 쓸쓸함이 번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올해 다섯 해 만에 새 시집이 나오고, 책을 두어 권 더 썼다. 시력은 더 나빠지지 않고, 혈당 수치도 더 높아지지 않았다. 올해 계획한 일들을 마치지 못한 채 내년으로 미룬 것은 아쉽다. 해가 지날수록 내면의 충만함이 고갈되고, 우울이 깊어지는 것은 아마도 내가 늙는 탓이고, 내 희망의 총량이 줄어드는 탓이리라.
희망은 흔히 어둠을 비추는 빛에 견줘진다. 어둠은 나쁜 꿈, 깨진 약속, 부도난 어음이다. 어둠에 사로잡힌 영혼은 희망을 탕진한 채 떠도는 탕아와 같다. 그들에게 실낱같은 한 줄기 빛이라 할지라도 살아야 할 의미를 일깨우는 신호일 수 있다. 오직 절망만이 넘치는 곳에 있는 사람에겐 희망이 필요하다. 희망의 씨앗들은 역설적으로 희망이 없는 곳에서만 싹튼다. 지금 여기에 희망의 요청이 들끓는다면 그것은 바로 여기가 희망이 없는 곳이란 반증일 테다.
희망이란 미래에 이뤄질 일에 대한 기대에서 부푼다. 그 기대가 지금 여기에서의 불안과 고통을 견디게 한다. 따라서 희망은 미래에 대한 기대, 결단과 행동을 낳는 조건, 도약하는 힘이다. 희망은 절망에 대한 처방약이다. 희망을 가진 이들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생명의 끈을 놓는 법이 없다. 에리히 프롬은 이렇게 말한다. “희망은 도약의 순간이 도래했을 때 도약하고자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와 같다.” 희망의 힘으로 고통을 견디는 이들은 가슴에 호랑이를 품고 사는 것과 같을 테다. 희망하지 않는 자는 끝내 제가 주저앉은 자리에서 도약하지 못한다. 희망하는 자들만 도약하기로 결심하고 그 결심을 실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무엇을 주는가? 철학자 한병철은 “희망은 새로운 것을 태어나게 돕는 산파”라고 말한다. 희망은 아직 아님을 넘어서서 꿈과 기적을 낳는다. 꿈과 기적은 희망을 타고 온다. 그런 맥락에서 희망이야말로 무에서 새로운 것을 빚어낸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미래를 향해 열린 정신이다. 희망은 쓰러진 바닥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힘이다. 희망하라! 그것이 기적과 가능성을 향해 날갯짓하게 우리를 도우리라. 희망은 미래에 대한 긍정의 산물이다. 미래는 지금보다 더 좋으리란 기대가 없다면 희망도 사라진다.
희망은 나르시시즘이 주는 만족감이 아니라 그 자체로 충만함이다. 무언가를 희망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 안의 부재를 의미의 충만으로 채운다. 희망은 먹지 않아도 배부르게 하고, 지친 몸을 눕힐 자리가 없더라도 우리를 낙관적으로 만든다. 그러니 절망 앞에서 무릎 꿇지 마라! 희망은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삶의 무형자산이다. 희망은 삶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게 하며, 생의 약동을 유지하게 만든다. 아울러 희망은 우리의 자존감을 높이는 명예로운 그 무엇이다. 자, 오늘 다시 가망 없는 희망일지라도 그것을 품어보자.
오, 어머니, 여기 희망의 폐허에서 떨고 있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빛이 없는 곳에 빛을, 절망이 들끓는 곳에 희망을 주소서. 한 줌의 희망이라도 있는 한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 어머니, 시련에 무릎을 꿇은 우리를 일으켜 주소서. 그다음 우리 영혼의 현(弦)을 팽팽하게 당겨 주소서. 활시위에서 튕겨 나간 화살인 듯 우리 영혼은 어둠을 뚫고 저 먼 곳 희망의 나라로 날아가게 하소서.
도약하려 웅크린 호랑이처럼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라. 자유가 없는 땅에서 숨을 죽인 채 사는 사람들, 병실 침상에서 마지막 숨을 가쁘게 내쉬는 이들, 전쟁터에서 기댈 데가 없이 헤매는 고아들, 업장의 문을 닫으며 비탄에 빠진 자영업자들, 찬 바닥에 하룻밤을 의탁하며 연명하는 노숙자들, 구직 활동에도 부름을 받지 못한 청년들은 절망한다. 지금 희망하는 법조차 잊은 채 불안에 떨고 있는 이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희망이다. 한 발 더 디디면 나락으로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한 줌의 희망을! 희망은 그들을 살리는 양식이다.희망은 흔히 어둠을 비추는 빛에 견줘진다. 어둠은 나쁜 꿈, 깨진 약속, 부도난 어음이다. 어둠에 사로잡힌 영혼은 희망을 탕진한 채 떠도는 탕아와 같다. 그들에게 실낱같은 한 줄기 빛이라 할지라도 살아야 할 의미를 일깨우는 신호일 수 있다. 오직 절망만이 넘치는 곳에 있는 사람에겐 희망이 필요하다. 희망의 씨앗들은 역설적으로 희망이 없는 곳에서만 싹튼다. 지금 여기에 희망의 요청이 들끓는다면 그것은 바로 여기가 희망이 없는 곳이란 반증일 테다.
희망이란 미래에 이뤄질 일에 대한 기대에서 부푼다. 그 기대가 지금 여기에서의 불안과 고통을 견디게 한다. 따라서 희망은 미래에 대한 기대, 결단과 행동을 낳는 조건, 도약하는 힘이다. 희망은 절망에 대한 처방약이다. 희망을 가진 이들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생명의 끈을 놓는 법이 없다. 에리히 프롬은 이렇게 말한다. “희망은 도약의 순간이 도래했을 때 도약하고자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와 같다.” 희망의 힘으로 고통을 견디는 이들은 가슴에 호랑이를 품고 사는 것과 같을 테다. 희망하지 않는 자는 끝내 제가 주저앉은 자리에서 도약하지 못한다. 희망하는 자들만 도약하기로 결심하고 그 결심을 실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을 태어나게 돕는 산파
가끔 우리와 함께 거주하는 고양이들에게도 희망이 있을까를 생각한다. 고양이들은 희망이라는 걸 모른다. 희망이란 미래에서 이뤄진 일에 대한 기대인데, 고양이들의 지략은 오늘이라는 시간에 갇혀 있다. 고양이들이 오늘 너머를 내다보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이 상상력에 기초한 광역 사고가 불가능한 탓이다. 고양이는 배가 고프면 칭얼거리고, 심심하면 사냥놀이를 하자고 끈질기게 조른다. 낯선 사람이 두려워 숨고 제 새끼와 헤어질 때는 슬퍼한다. 그렇건만 고양이들의 활동은 자극과 반응이라는 협소한 조건에서만 이뤄진다. 고양이는 외부 자극과 반응으로 이뤄진 즉물적인 세계에 속한 존재다. 우리는 고양이들과 내일의 어떤 일도 약속할 수 없다. 고양이들에겐 내일이란 개념조차 없는 탓이다. 오직 인간만이 오늘 너머에 있는 내일의 일에 기대를 품고 희망이라는 끈을 붙잡는다.희망은 무엇을 주는가? 철학자 한병철은 “희망은 새로운 것을 태어나게 돕는 산파”라고 말한다. 희망은 아직 아님을 넘어서서 꿈과 기적을 낳는다. 꿈과 기적은 희망을 타고 온다. 그런 맥락에서 희망이야말로 무에서 새로운 것을 빚어낸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미래를 향해 열린 정신이다. 희망은 쓰러진 바닥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힘이다. 희망하라! 그것이 기적과 가능성을 향해 날갯짓하게 우리를 도우리라. 희망은 미래에 대한 긍정의 산물이다. 미래는 지금보다 더 좋으리란 기대가 없다면 희망도 사라진다.
"영혼의 현을 팽팽히 당기소서"
희망의 의미는 새로운 태어남, 미래와의 약속, 나를 감싸는 불안과 난관을 뚫고 결단하고 나아가는 힘에 있다. 희망이 없는 자는 이미 죽은 자나 마찬가지다. 희망이 없는 것은 난파해 침몰하는 배에 타고 있는 것과 같은 처지다. 나는 절망의 순간에서 늘 하늘에 빛나는 별을 향해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그때마다 별들은 침묵으로 대답했다. 다시 일어서서 걸으라! 희망을 갖지 못한 자는 서둘러 패배를 선언하고, 불가능의 벽 앞에서 스스로 무너지고 좌초한다. 희망 없이는 존재의 갱신이나 난관을 넘어설 수는 없는 것, 그리고 의미의 생산도 불가능하다. 그들은 안타깝게도 고립 속에 자기를 가둔 채 탄식하며 절망의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희망은 나르시시즘이 주는 만족감이 아니라 그 자체로 충만함이다. 무언가를 희망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 안의 부재를 의미의 충만으로 채운다. 희망은 먹지 않아도 배부르게 하고, 지친 몸을 눕힐 자리가 없더라도 우리를 낙관적으로 만든다. 그러니 절망 앞에서 무릎 꿇지 마라! 희망은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삶의 무형자산이다. 희망은 삶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게 하며, 생의 약동을 유지하게 만든다. 아울러 희망은 우리의 자존감을 높이는 명예로운 그 무엇이다. 자, 오늘 다시 가망 없는 희망일지라도 그것을 품어보자.
오, 어머니, 여기 희망의 폐허에서 떨고 있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빛이 없는 곳에 빛을, 절망이 들끓는 곳에 희망을 주소서. 한 줌의 희망이라도 있는 한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 어머니, 시련에 무릎을 꿇은 우리를 일으켜 주소서. 그다음 우리 영혼의 현(弦)을 팽팽하게 당겨 주소서. 활시위에서 튕겨 나간 화살인 듯 우리 영혼은 어둠을 뚫고 저 먼 곳 희망의 나라로 날아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