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훈 칼럼] 윤석열 실패가 자유주의 패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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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대통령 잇따른 탄핵
현실 정치의 실패가
자유·시장 보수 가치 추락은 아냐
청년들 응원봉 시위 보면서
가장 자유롭고 윤택한 세상 확인
자유를 향한 여정 끝날 수 없어
조일훈 논설실장
현실 정치의 실패가
자유·시장 보수 가치 추락은 아냐
청년들 응원봉 시위 보면서
가장 자유롭고 윤택한 세상 확인
자유를 향한 여정 끝날 수 없어
조일훈 논설실장
우리 헌법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사회의 구성원리로 삼고 있다. 보수는 이것을 철석같이 지지한다. 사회주의보다 자유주의, 집단주의보다 개인주의, 결과적 평등보다 기회의 평등, 정부 개입보다 시장 자율이 훨씬 더 효율적이고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우파 이념은 시장경제가 작동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응원하고 신봉한다. 뭔가 새로운 것을 생각하고 만드는 사람들에게 보다 넓은 자유와 재산권을 허용하고 보장해준다.
보수는 ‘지킨다’는 말 뜻 그대로 헌법적 가치에 충실하다. 그 길이 수월한 것은 아니다. 좌파의 토양은 광대하고 수법도 격렬하다. 좌우 이념의 대치 속에서 적잖은 정치인과 유권자들이 중도로 빠진다. 하지만 헌법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표방하고 있는 한, 우리 사회의 지배이념은 우파적이고 나머지는 대안적 이념일 뿐이다. 현실정치는 대체로 보수에 불리하게 작동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그 혜택의 넓고 고른 확산에도 불구하고, 보수를 정치적 소수로 몰아넣는 속성이 있다. 소수의 자본가와 다수 노동자들 간 역학관계를 대입해보면 수긍이 간다.
양측은 원천적으로 생각과 태도가 다르다. 기업인은 전체 구성원들의 생존과 번영을 책임진다. 그들은 시장을 직접 상대한다. 고객의 표정과 선호가 변해가는 것을 보면서 세상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낀다. 반면 근로자들은 매월 꼬박꼬박 들어오는 급여가 우선이다. 생계 테이블이 그날을 중심으로 맞춰져 있으니 어쩔 수 없다. 회사가 인공지능(AI) 시대에 어떻게 대비해야 하느냐 같은 문제는 부차적이다. 괜히 근로자들을 타박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소득을 만들어내야 하는 사람과 정해진 날짜에 봉급을 받는 사람들의 세계관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런 차이가 대체로 우파와 좌파의 이념적 지향을 가른다. 물론 좌파 기업인, 우파 근로자들도 셀 수 없이 많다. 계층적 이해가 이념 선택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내 삶이 어떤 이념의 혜택을 받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수는 이 점에서 불리하다. 우파적 자유는 막연하고 당연하다. 빼앗겼을 때만 그 소중함을 아는 가치다. 반면 좌파적 평등은 눈에 보이고 측량 가능하다. 보수는 변화와 혁신에 민감하다. 좌파는 그것이 자신 삶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까 성가셔한다. 주 52시간제 규제 완화를 둘러싼 논쟁도 그런 경우다. 혁신은 사회주의 단체주의 평등주의에서 결코 배양되지 않는다. 자유 시장경제만이 경쟁을 북돋우고 혁신을 조장한다. 보수의 심장도 바로 그 지점에서 뛴다.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에 따른 국회 탄핵으로 보수는 졸지에 구심점을 잃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어 두 명의 보수 지도자가 연속 탄핵을 당했다. 진영 전체가 폐족으로 전락해 정치적 재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론도 나온다. 하지만 현실 정치의 실패를 보수적 가치의 추락이나 훼손으로 간주하거나 단정할 수는 없다. 보수의 위기는 자유주의를 수호하는 일이 그만큼 지난한 일임을 보여준다. ‘자유 전도사’ 윤 대통령이 엉뚱하게도 반헌법적이고 반자유적인 계엄 선포를 들고나온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대단히 역설적이라는 사실을 아프게 일깨운다.
비록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지만 자유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의 지배적 이념이라는 점엔 변함이 없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조차 한·미동맹이나 경제 분야에서 갑자기 안 하던 말을 할 정도로 강고한 이념이다. 이번 대통령 탄핵 집회에 응원봉과 대중가요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처음엔 너무 낯설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월드컵 거리 응원을 보는 것 같았다.
많은 언론들이 젊은 MZ세대의 새로운 시위 문화라고 평했지만, 내겐 조금 달리 보였다. 가난하고 억압적인 나라의 시위가 이렇게 즐거운 축제일 수 없다. 홍콩 자유를 빼앗은 중국이 언론과 학생들의 항의를 얼마나 폭압적으로 다뤘는지 떠올려 보시라. 수많은 사람들이 즐겁고 평화롭게 시위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대한민국의 성취를 증거하는 또 다른 장면이다. 유사 이래 가장 자유롭고 가장 윤택한 세상 아닌가. 이런 모습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를 국가 기본질서로 채택한 헌법적 가치가 옳았다는 사실을 웅변해준다. 자유를 향한 여정은 결코 멈출 수 없다. 보수의 심장도 다시 뛸 것이다.
보수는 ‘지킨다’는 말 뜻 그대로 헌법적 가치에 충실하다. 그 길이 수월한 것은 아니다. 좌파의 토양은 광대하고 수법도 격렬하다. 좌우 이념의 대치 속에서 적잖은 정치인과 유권자들이 중도로 빠진다. 하지만 헌법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표방하고 있는 한, 우리 사회의 지배이념은 우파적이고 나머지는 대안적 이념일 뿐이다. 현실정치는 대체로 보수에 불리하게 작동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그 혜택의 넓고 고른 확산에도 불구하고, 보수를 정치적 소수로 몰아넣는 속성이 있다. 소수의 자본가와 다수 노동자들 간 역학관계를 대입해보면 수긍이 간다.
양측은 원천적으로 생각과 태도가 다르다. 기업인은 전체 구성원들의 생존과 번영을 책임진다. 그들은 시장을 직접 상대한다. 고객의 표정과 선호가 변해가는 것을 보면서 세상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낀다. 반면 근로자들은 매월 꼬박꼬박 들어오는 급여가 우선이다. 생계 테이블이 그날을 중심으로 맞춰져 있으니 어쩔 수 없다. 회사가 인공지능(AI) 시대에 어떻게 대비해야 하느냐 같은 문제는 부차적이다. 괜히 근로자들을 타박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소득을 만들어내야 하는 사람과 정해진 날짜에 봉급을 받는 사람들의 세계관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런 차이가 대체로 우파와 좌파의 이념적 지향을 가른다. 물론 좌파 기업인, 우파 근로자들도 셀 수 없이 많다. 계층적 이해가 이념 선택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내 삶이 어떤 이념의 혜택을 받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수는 이 점에서 불리하다. 우파적 자유는 막연하고 당연하다. 빼앗겼을 때만 그 소중함을 아는 가치다. 반면 좌파적 평등은 눈에 보이고 측량 가능하다. 보수는 변화와 혁신에 민감하다. 좌파는 그것이 자신 삶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까 성가셔한다. 주 52시간제 규제 완화를 둘러싼 논쟁도 그런 경우다. 혁신은 사회주의 단체주의 평등주의에서 결코 배양되지 않는다. 자유 시장경제만이 경쟁을 북돋우고 혁신을 조장한다. 보수의 심장도 바로 그 지점에서 뛴다.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에 따른 국회 탄핵으로 보수는 졸지에 구심점을 잃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어 두 명의 보수 지도자가 연속 탄핵을 당했다. 진영 전체가 폐족으로 전락해 정치적 재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론도 나온다. 하지만 현실 정치의 실패를 보수적 가치의 추락이나 훼손으로 간주하거나 단정할 수는 없다. 보수의 위기는 자유주의를 수호하는 일이 그만큼 지난한 일임을 보여준다. ‘자유 전도사’ 윤 대통령이 엉뚱하게도 반헌법적이고 반자유적인 계엄 선포를 들고나온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대단히 역설적이라는 사실을 아프게 일깨운다.
비록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지만 자유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의 지배적 이념이라는 점엔 변함이 없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조차 한·미동맹이나 경제 분야에서 갑자기 안 하던 말을 할 정도로 강고한 이념이다. 이번 대통령 탄핵 집회에 응원봉과 대중가요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처음엔 너무 낯설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월드컵 거리 응원을 보는 것 같았다.
많은 언론들이 젊은 MZ세대의 새로운 시위 문화라고 평했지만, 내겐 조금 달리 보였다. 가난하고 억압적인 나라의 시위가 이렇게 즐거운 축제일 수 없다. 홍콩 자유를 빼앗은 중국이 언론과 학생들의 항의를 얼마나 폭압적으로 다뤘는지 떠올려 보시라. 수많은 사람들이 즐겁고 평화롭게 시위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대한민국의 성취를 증거하는 또 다른 장면이다. 유사 이래 가장 자유롭고 가장 윤택한 세상 아닌가. 이런 모습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를 국가 기본질서로 채택한 헌법적 가치가 옳았다는 사실을 웅변해준다. 자유를 향한 여정은 결코 멈출 수 없다. 보수의 심장도 다시 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