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쾌한 냄새가 나는 광산을 멀리했고 염소 우유의 지독한 냄새도 싫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만들어주시는 민트 맛 사탕의 향기는 너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지난 8월 별세한 고(故) 김필주 박사의 쪽지는 이런 문장으로 끝난다.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난 그는 월남한 뒤 미국에서 평생을 농학자로 살았다. 고인은 텅스텐 공장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아침마다 건네주던 염소 우유를 떠올렸다. 그때 북녘의 냄새를 기억한다고 했다.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기간이었던 지난 4~11월 한국관에서 열렸던 '구정아-오도라마 시티' 전시 전경. /아르코미술관 제공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기간이었던 지난 4~11월 한국관에서 열렸던 '구정아-오도라마 시티' 전시 전경. /아르코미술관 제공
올해 4~11월 이탈리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울려 퍼진 '고향의 향기'가 서울로 이어졌다. 한국관에서 열렸던 '구정아-오도라마 시티' 전시가 서울 동숭동 아르코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다. 구정아 작가가 지난해 김 박사 등 전 세계인 600여명을 대상으로 수집한 '한국의 향'에 관한 기억으로 만든 17가지 향기로 구성한 전시다.

이번 한국관 전시는 참신함과 난해함 사이에 있었다. 주변 나라들이 앞다퉈 대형 미디어아트와 설치미술로 국가관을 꾸밀 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향기로 전시장을 채웠다. 전시 제목의 '오도라마'는 향기를 뜻하는 오도(Odor)와 드라마(drama)를 합친 단어다. 2년마다 열리는 베네치아 비엔날레 국제미술전에 참가한 나라들은 저마다 국가관을 설치해 자국 미술을 알린다.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귀국전 '구정아-오도라마 시티'가 서울 동숭동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렸다. 전시장에 걸린 포스터에 작가가 전시를 준비하며 수집한 향기에 얽힌 사연들이 적혀있다. 사진 고정균. /아르코미술관 제공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귀국전 '구정아-오도라마 시티'가 서울 동숭동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렸다. 전시장에 걸린 포스터에 작가가 전시를 준비하며 수집한 향기에 얽힌 사연들이 적혀있다. 사진 고정균. /아르코미술관 제공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구 작가의 이력을 살펴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그는 본인을 '어디서나 살고 작업하는 작가'로 소개한다. 전 세계를 활보하며 건축 언어 드로잉 회화 조각 영상 등 분야를 넘나들며 활동하기 때문이다. 향기를 다룬 것도 1996년 대학 재학 시절부터다. 옷장 속 나프탈렌을 주제로 다룬 실험적인 전시를 당시 선보였다.

아르코미술관 1층 전시장엔 작가가 수집한 사연들이 현수막에 걸렸다. 1920년대부터 최근까지 세계인들이 한국에 대해 기억하는 냄새가 적혀 있다. 평범한 학생과 직장인부터 탈북민, 해외동포까지 다양하다. 정원의 살구와 목욕탕 소독약, 퀴퀴하면서도 포근한 할머니의 내복 등 저마다 추억을 기록했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스며든 '한국의 향'…서울서 재회
전시장 2층은 텅 비어있던 한국관 전시장을 재현했다. 뫼비우스 띠 형상을 본떠 만든 17개의 나뭇조각이 전시장 천장에 걸려 있다. 각 조각에는 조향사 16명이 참여해 만든 향을 입혔다. 칸막이가 없는 만큼 여러 향이 뒤엉킨 것처럼 느껴진다. 작가의 한국관 전시를 공동 기획한 이설희 큐레이터는 "국가와 세대 등 경계를 넘어 퍼지는 향기를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구 작가의 전시는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는 올해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대주제에 맞춰 기획됐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한국계 이방인들의 목소리를, 어디로든 퍼질 수 있는 향기로 재현했다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비엔날레 기간 중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전 세계인의 통합을 위한 뼈대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구정아-오도라마 시티' 전시 전경. /베네치아=안시욱 기자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구정아-오도라마 시티' 전시 전경. /베네치아=안시욱 기자
이전과 달라진 부분도 있다. 한국관에 설치됐던 검은색 브론즈 조각 '우스(Ouss)'가 이번 전시에는 없다. 날갯짓하는 인물 형태인 우스의 코에선 주기적으로 향기가 분사되곤 했다. 이 큐레이터는 "같은 전시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작가의 신념에 의한 것"이라며 "이번 전시의 주인공은 우스가 아니라 사연을 보내준 600명의 이방인"이라고 설명했다.

굳이 아쉬운 점을 꼽자면 전시장 2층 벽에 칠한 청옥색 페인트 냄새다. 한국관의 실내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미술관이 이번에 새로 칠했다. 후각이 예민한 관람객이라면 특유의 유성 페인트 냄새가 불청객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전시는 내년 3월 23일까지.
전시를 기획한 (왼쪽부터) 이설희 예술감독과 구정아 작가, 야콥 파브리시우스 예술감독이 지난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구정아-오도라마 시티' 전시를 둘러보고 있다. /아르코미술관 제공
전시를 기획한 (왼쪽부터) 이설희 예술감독과 구정아 작가, 야콥 파브리시우스 예술감독이 지난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구정아-오도라마 시티' 전시를 둘러보고 있다. /아르코미술관 제공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구정아-오도라마 시티' 전시 전경. /베네치아=안시욱 기자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구정아-오도라마 시티' 전시 전경. /베네치아=안시욱 기자
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