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저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 당장 멈춰!”

1909년 오스트리아 빈의 쿤스트샤우 극장. 무대 위에서 남자가 여자를 공격하는 순간, 객석에서 분노에 찬 고함이 터져 나왔다. 무대 위로 뛰쳐 올라가는 관객도 있었다. 연기자들은 놀라 도망가고 혼란이 확산하면서 극장은 쑥대밭이 됐다.

경찰이 지목한 이 사건의 주범은 연극 포스터를 그리고 극본을 쓴 표현주의 예술가 오스카어 코코슈카(1886~1980). 죄목은 “사람들의 감정을 격렬하게 자극했다”는 것. 그의 작품에는 그만큼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능력이 있었다. 코코슈카가 누구고 표현주의가 뭐길래 이런 일까지 벌어졌을까.
막스 오펜하이머가 1911년 그린 전시 홍보 포스터.
막스 오펜하이머가 1911년 그린 전시 홍보 포스터.

“악마의 재능” 비엔나의 문제아, 코코슈카

오스카어  코코슈카가 1911년 그린 강연 홍보 포스터.
오스카어 코코슈카가 1911년 그린 강연 홍보 포스터.
서울 용산동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에곤 실레와 구스타프 클림트 등 거장의 작품 191점을 소개하는 전시다. 연일 매진 행렬을 이어가고 있는 이 전시 관람평에서는 “실레와 클림트를 보러 왔다가 코코슈카에게 반했다”는 후기가 자주 눈에 띈다. 그만큼 코코슈카의 작품엔 강렬한 매력이 있다.

코코슈카는 20세기 초 가장 중요한 미술 사조로 꼽히는 표현주의의 대표적 선구자다. 표현주의는 자기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색채와 형태를 과장하고 왜곡한다. 슬픔, 좌절, 번뇌 등 일반적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훨씬 더 강렬하고 복잡한 마음을 그려낸 ‘영혼의 풍경화’가 표현주의 그림이다.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사람은 이런 예술을 하기 어렵다. 제어할 수 없는 격렬한 감정과 열정이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쳐야 한다. 코코슈카가 그랬다.

코코슈카는 문제아였다. 미술계에 처음으로 이름을 알린 계기가 성적인 작품을 그려 미술학교에서 퇴학당한 것이었다. 그는 특유의 기괴하고 왜곡된 화풍으로 그림을 그렸다. 캔버스에 물감을 칠한 뒤 마르기 전에 붓 손잡이로 긁어서 휘젓고, 사람 얼굴과 배경을 얼룩덜룩하게 그려 넣고, 바늘로 다시 긁어내고…. 하지만 결과물은 더없이 세련된 예술품이었다.

사람들은 수군댔다. “악마의 재능이다. ‘엑스레이 눈’으로 잠재의식을 꿰뚫는 것 같다.” 클림트는 이렇게 칭찬했다. “젊은 세대 화가 중 가장 위대한 재능을 지녔다.” 어쨌거나 하나는 확실하다. 코코슈카는 ‘마음 편히 만날 수 있는 친구’는 아니었다.

막스 오펜하이머, 에곤 실레를 깨웠지만 …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막스 오펜하이머의 ‘자화상’(1911)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막스 오펜하이머의 ‘자화상’(1911)
코코슈카의 괴팍한 성품에 희생당한 대표적 피해자가 막스 오펜하이머(1885~1954)다. 한스 페터 비플링거 레오폴트미술관장은 “실레, 코코슈카와 함께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이번 전시에는 그의 그림 두 점이 코코슈카 그림과 나란히 걸렸다.

오펜하이머는 1908년 클림트의 대표작 ‘키스’가 처음 발표된 분리파 전시회에 출품해 미술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 역시 코코슈카와 마찬가지로 인물의 정신과 본질을 초상화에 담는 게 목적이었다. 황토색을 중심으로 칙칙한 색을 주로 쓴 것도 색채에 현혹되지 않고 대상의 내면과 심리를 섬세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화풍은 실레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실레가 클림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화풍을 찾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비플링거 관장)는 설명이다. 실레의 그림에서 ‘손’이 두드러지는 것도 오펜하이머의 영향이다. 얼굴 다음으로 인간 마음을 잘 보여주는 신체 부위가 손이라는 게 그의 철학이었다.

이렇게 중요한 화가인데도 우리가 오펜하이머의 이름을 잘 모르는 이유가 있다. 오펜하이머와 치열하게 경쟁하며 ‘표현주의 대장’ 자리를 노리던 코코슈카가 그를 견제하고 배제했기 때문이다. 코코슈카는 1911년 오펜하이머가 그린 포스터를 문제 삼아 “그는 내가 1909년 그린 포스터를 표절한 따라쟁이일 뿐”이라고 공격했다. 그리고 모든 인맥을 동원해 오펜하이머의 작품을 비판하고 전시를 거부하도록 했다. 어느새 빈에는 ‘오펜하이머는 코코슈카의 표절자’라는 말이 널리 퍼졌다.

정말 오펜하이머가 코코슈카의 작품을 표절했을까. 두 사람 작품에 공통점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영향을 받으며 경쟁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비슷해 보이는 작품이 나오는 건 지극히 정상. 게다가 코코슈카의 ‘상처 난 옆구리’라는 주제는 서양 미술에서 수백 년간 숱하게 다뤄왔다.

오펜하이머를 비난하는 일은 어느새 지식인 사회의 대세로 자리 잡았다. 사람들은 신나게 그를 물어뜯었다. 오펜하이머가 동성애자에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증오에 기름을 부었다. 이를 버티기에 오펜하이머의 감수성은 너무도 예민했다. 결국 그는 여론전을 버티지 못하고 빈 미술계를 떠나야 했다.

마음속 어둠 드러내는 예술 … 표현주의가 남긴 것들

코코슈카는 왜 이렇게까지 오펜하이머를 공격했을까. 잘 풀리지 않던 연애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당시 코코슈카의 연인은 알마 말러. 그녀는 코코슈카와 사귀면서도 수시로 다른 예술가와 바람을 피웠다. 이런 상황에서 코코슈카가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강조하기 위해 오펜하이머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는 헛수고였다. 코코슈카는 차이고, 그 충격으로 한동안 반폐인이 된다. 오펜하이머는 스위스와 독일 등을 오가다 나치 집권 이후 미국으로 이주했다. 미국에서 그는 가난과 무관심에 시달리다 1954년 외롭게 세상을 떠난다.

재미있는 건 두 사람의 화풍 변화다. 두 사람 모두 나이가 들고 비교적 여유를 찾은 뒤에는 화풍이 확연히 부드러워졌다. 독기가 빠졌지만 번뜩임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작품에만 한정했을 때 이들이 가장 빛나던 시절은 1910년을 전후한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표현주의는 마음속 어둠이 품은 에너지를 드러내는 예술이다. 감정이 격렬할수록 표현주의 예술은 강렬한 광채를 내뿜고, 예술가가 사라져도 그 빛은 영원히 계속된다. 미술사학자 노르베르트 볼프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훌륭한 예술 작품에는 인간의 감정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되새기게 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표현주의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