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거 아냐?"...죽어가는 연인 만난 男, 대체 뭘 했길래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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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의 마지막 순간
200점 그림에 담은
스위스 '국민 화가'
페르디난트 호들러(1853~1918)
200점 그림에 담은
스위스 '국민 화가'
페르디난트 호들러(1853~1918)
그 여성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병명은 자궁암. 곳곳에 퍼진 암세포들은 야윈 몸을 마지막까지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있었습니다. 풍성했던 머리카락은 겨울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게 시들었습니다. 움푹 팬 눈 속 흐릿한 눈동자는 빛을 잃었고, 미소 짓던 입은 힘없이 벌어졌습니다. 그 사이로 숨결이 빠져나갈 때마다 희미한 생명의 불꽃은 조금씩 꺼져갔습니다.
그 앞에 눈을 부릅뜬 화가가 앉아 있었습니다. 화가는 그녀의 연인이었습니다. 그는 매일같이 병원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시들어가는 모습을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그려댔습니다. 병이 처음 발견됐을 때부터 2년간 화가가 그린 그림은 200장 이상. 세상 사람들은 그런 화가를 두고 수군댔습니다. “아무리 연인의 마지막 모습을 남기고 싶었더라도 너무한 것 아니냐, 병이 도지겠다”, “너무 슬퍼서 정신이 이상해진 게 분명하다”, 심지어는 “연인의 죽음마저 작품 소재로 활용하는 냉혈한이다”…. 누가 뭐라 하든 화가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릴 뿐이었습니다. 집착에 가까운 열정으로 연인의 마지막 모습을 남긴 그 화가의 이름은 페르디난트 호들러(1853~1918). 스위스의 ‘국민 화가’로 불리는 그는 왜 이런 그림들을 남겼던 걸까요. 호들러와 죽음, 상실, 그리고 영원에 관한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호들러가 화가의 길에 들어선 것도 가족들의 죽음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는 간판과 기념품 그림 등을 그리는 화가와 재혼했습니다. 호들러는 양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그림과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양아버지는 먹일 입을 덜기 위해 호들러를 화가 친구의 작업실에 견습생으로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기념품용 풍경화를 그려 밥벌이하던 호들러는, 우연히 미대 교수(바르텔레미 멘)의 눈에 띄어 정식으로 미술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는 미술에 몰두했습니다. 미대 친구가 “호들러는 모든 시대의 모든 화가를 다 꿰고 있는 것 같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가족이 없는 호들러에게 그림은 유일한 생계 수단이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자신의 존재를 이 세상에 남길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호들러가 가장 자주 그렸던 주제는 역시나 죽음. 호들러가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도 마찬가지로 알프스산맥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고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30대 후반이 되도록 그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훌륭한 스승에게 열심히 배우고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갖췄지만, 그의 작품은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기엔 너무 특이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간절히 바라며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여전히 무명이라는 울분과 초조함,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들처럼 자신도 언제 갑자기 폐병으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겹쳐 그는 매일 밤을 설쳤습니다. 1890년 서른일곱 살 때 그린 ‘밤’은 그 공포가 응집된 작품.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의 냄새가 풀풀 풍기는 이 작품이, 그에게 예술가로서 새 삶을 주게 됩니다.
이 강렬한 작품은 발표 직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여성의 나체 묘사가 천박하다”는 비판을 하는 보수적인 비평가들도 여전히 있었지만 극찬을 보내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그의 이름도 서서히 중서부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난생처음 얻은 명성은 호들러에게 크나큰 안도감을 줬습니다. ‘혹시나 내가 죽어도, 적어도 이 작품을 통해 내 존재가 기억될 수는 있겠지.’ 그래서 호들러는 ‘밤’을 두고 말했습니다. “이 작품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내 첫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품의 성공을 계기로 호들러의 삶은 성공 궤도에 올라탔습니다. 명성이 생겼고 그림도 잘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호들러가 그린 단단한 느낌의 작품은 비슷한 감성을 지닌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특히 인기가 많았습니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비엔나 1900’ 전시에서 만날 수 있는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 콜로만 모저 같은 화가들과 함께 작품을 전시하며 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독일 한 지방의 미대에서는 그를 교수로 초빙했습니다. 1900년 호들러가 47세 때 발표한 ‘낮’은 호들러의 이런 성공을 기념하는 작품입니다. 안개가 자욱한 산 초원 위, 꽃밭에 앉은 여인들은 무릎을 꿇은 채 앉아 몸짓으로 동이 트는 순간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수십 년 간의 가난과 무관심, 비판, 죽음과 실패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마침내 창조적인 예술가로서 우뚝 선 자신의 새출발을 호들러 스스로 축하하는 의미입니다.
호들러가 얼마나 기뻐했는지는 1904년 오스트리아 빈 분리파 전시에서 그를 본 사람의 목격담에서 실감 나게 전해집니다. “작품은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모두 숭고한 걸작 대우를 받았고, 호들러는 화가들에게 엄청난 존경을 받았습니다. 처음으로 이런 대우를 받는 호들러의 눈은 반짝였고 콧구멍은 벌름댔으며 입은 벌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행복한 흥분 상태였습니다.” 그토록 갈망하던 부와 성공이 드디어 찾아오면서, 마침내 호들러는 인생에 드리운 죽음의 공포에서 마침내 자유로워진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잠시 모습을 숨겼을 뿐. 언제나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수많은 여인 중에서도 호들러가 가장 사랑했던 단 한명이 있었습니다. 1908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만난 스무 살 연하의 발렌틴 고데-다렐이었습니다. 프랑스 파리의 명문가 출신인 발렌틴은 전남편과 이혼한 뒤 제네바에서 생계를 잇기 위해 모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그녀를 만난 호들러는 발렌틴의 교양과 현명함, 강단 있는 성격과 아름다움에 반했습니다. 둘은 곧 사랑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5년 뒤, 잊고 살던 죽음은 호들러가 가장 사랑한 발렌틴의 모습을 빌려 다시 찾아옵니다. 발렌틴의 몸에서 자궁암이 발견된 겁니다. 지금도 암은 가장 무서운 질병. 20세기 초반의 의학으로 암을 치료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암은 이미 곳곳에 전이돼 있었습니다. 두 번에 걸친 수술, 당시로서는 최신 기술이었던 방사선 치료에도 불구하고 발렌틴은 급속히 쇠약해졌습니다.
호들러는 홀린 듯이 발렌틴이 죽어가는 모습을 기록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곧 사라질 사랑하는 그녀의 존재를 자신의 곁에 남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림을 그리다 좌절에 빠져 자신이 그린 그림을 걷어차며 이렇게 소리쳤다는 기록이 증거입니다. “이따위 만질 수도 없는 그림이 무슨 소용이라고! 그림이 아니라 조각을 할 걸 그랬어….” 그가 남긴 그림 수는 유화와 스케치를 비롯해 총 200점 이상. 누군가가 죽어가는 과정을 이토록 끊임없이 여러 번 묘사한 화가는 그전에도, 후에도 없었습니다. 그림에 몰두하는 건 한편으로는 마음을 달래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면 그는 연인을 잃는 공포, 죽음에 대한 공포를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었습니다. 그 거대한 감정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그림으로 하나둘씩 변하면서 ‘누군가의 죽음’이라는 객관적인 개념으로 점차 정리됐습니다. 그러면서 호들러는 점차 삶과 죽음의 공존을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삶은 죽음이 있기에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메모장에 적었습니다. “죽음이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은, 보는 이에게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갈라놓는 모든 공통점보다 더 큰 건, 우리 모두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죽음은 절대적인 통합이다.”
호들러는 아름다운 풍경을 반복적인 무늬처럼 만들어서 캔버스 바깥까지 계속 풍경이 이어질 듯한 느낌을 연출하고, 이를 통해 유한한 캔버스에 무한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파란색을 쓴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호들러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하늘을 상징하는 파란색을 가장 좋아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파란색은 무한을 상징하는 장엄한 색이다.”
1917년 폐병으로 쓰러진 이후 호들러의 그림에서는 점차 형상이 희미해집니다. 대신 색감은 더욱 다채로워집니다. 마치 육체의 세계를 떠나 점차 우주와 하나가 되어 가는 것처럼. 그는 아파트 방 침대에서 제네바 호수 위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마지막까지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속에서 현실과 이상, 삶과 죽음, 시간과 영원은 모두 하나가 되는 듯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8년, 호들러는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다행히도 마지막 순간 호들러는 마침내 평생에 드리웠던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도구는 예술이었습니다. 유한한 그림으로 무한에 닿으려는 노력 끝에, 호들러는 유한한 인생에 영원한 예술을 담았습니다. 그 해 호들러는 떨리는 손으로 노트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죽음 외에도 이 세상에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술입니다. 제가 평생에 걸쳐 표현한 게 바로 그것이었다는 사실을 이제 깨달았습니다. 예술 만세!”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이번 기사 내용은 Ferdinand Hodler - View to Infinity(Jill Lloyd 등 지음), Ferdinand Hodler(프랑스 오르셰미술관 전시 도록), Ferdinand Hodler (Art Council 등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그 앞에 눈을 부릅뜬 화가가 앉아 있었습니다. 화가는 그녀의 연인이었습니다. 그는 매일같이 병원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시들어가는 모습을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그려댔습니다. 병이 처음 발견됐을 때부터 2년간 화가가 그린 그림은 200장 이상. 세상 사람들은 그런 화가를 두고 수군댔습니다. “아무리 연인의 마지막 모습을 남기고 싶었더라도 너무한 것 아니냐, 병이 도지겠다”, “너무 슬퍼서 정신이 이상해진 게 분명하다”, 심지어는 “연인의 죽음마저 작품 소재로 활용하는 냉혈한이다”…. 누가 뭐라 하든 화가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릴 뿐이었습니다. 집착에 가까운 열정으로 연인의 마지막 모습을 남긴 그 화가의 이름은 페르디난트 호들러(1853~1918). 스위스의 ‘국민 화가’로 불리는 그는 왜 이런 그림들을 남겼던 걸까요. 호들러와 죽음, 상실, 그리고 영원에 관한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밤이면 찾아오던 죽음
호들러는 1853년 스위스 베른에서 가난한 목수 아버지와 농장 일꾼인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부터 그에게 죽음은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자매 모두를 병으로 잃고 홀로 세상에 남겨졌으니까요. 일곱살 때 아버지와 두 형제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비극이 시작됐습니다. 결핵은 가족을 하나씩 천천히 쓰러트렸습니다. 열네살 때는 밭에서 일하던 어머니가 쓰러져 세상을 떠났습니다. 훗날 그는 회고했습니다. “작은 수레 위에 놓인 어머니의 관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죽음은 항상 우리 가족 곁에 있었다.”호들러가 화가의 길에 들어선 것도 가족들의 죽음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는 간판과 기념품 그림 등을 그리는 화가와 재혼했습니다. 호들러는 양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그림과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양아버지는 먹일 입을 덜기 위해 호들러를 화가 친구의 작업실에 견습생으로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기념품용 풍경화를 그려 밥벌이하던 호들러는, 우연히 미대 교수(바르텔레미 멘)의 눈에 띄어 정식으로 미술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는 미술에 몰두했습니다. 미대 친구가 “호들러는 모든 시대의 모든 화가를 다 꿰고 있는 것 같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가족이 없는 호들러에게 그림은 유일한 생계 수단이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자신의 존재를 이 세상에 남길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호들러가 가장 자주 그렸던 주제는 역시나 죽음. 호들러가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도 마찬가지로 알프스산맥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고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30대 후반이 되도록 그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훌륭한 스승에게 열심히 배우고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갖췄지만, 그의 작품은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기엔 너무 특이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간절히 바라며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여전히 무명이라는 울분과 초조함,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들처럼 자신도 언제 갑자기 폐병으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겹쳐 그는 매일 밤을 설쳤습니다. 1890년 서른일곱 살 때 그린 ‘밤’은 그 공포가 응집된 작품.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의 냄새가 풀풀 풍기는 이 작품이, 그에게 예술가로서 새 삶을 주게 됩니다.
마침내 밤은 지나가고
1889년 겨울부터 1년에 걸쳐 그린 ‘밤’. 이 작품을 그리던 호들러는 오랜 무명 생활에 지치고 가난에 굶주린 상태였습니다. 밤마다 그는 이런 불안에 사로잡혔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폐결핵으로 죽었으니, 분명히 나도 폐결핵으로 갑자기 어느 날 밤 죽을 거야. 그러면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 그림은 그 불안을 그대로 캔버스에 옮긴 것입니다. 한밤중 곤히 잠든 호들러를 누군가가 깨웁니다. 일어나보니 검은 옷을 입은 죽음이 몸 위에 올라타 있습니다. “일어나. 이제 갈 시간이야.” 호들러의 얼굴은 공포로 일그러집니다. “안돼!”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습니다.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은 주변 사람들은 그것도 모른 채 곤히 잠들어 있습니다.이 강렬한 작품은 발표 직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여성의 나체 묘사가 천박하다”는 비판을 하는 보수적인 비평가들도 여전히 있었지만 극찬을 보내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그의 이름도 서서히 중서부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난생처음 얻은 명성은 호들러에게 크나큰 안도감을 줬습니다. ‘혹시나 내가 죽어도, 적어도 이 작품을 통해 내 존재가 기억될 수는 있겠지.’ 그래서 호들러는 ‘밤’을 두고 말했습니다. “이 작품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내 첫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품의 성공을 계기로 호들러의 삶은 성공 궤도에 올라탔습니다. 명성이 생겼고 그림도 잘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호들러가 그린 단단한 느낌의 작품은 비슷한 감성을 지닌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특히 인기가 많았습니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비엔나 1900’ 전시에서 만날 수 있는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 콜로만 모저 같은 화가들과 함께 작품을 전시하며 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독일 한 지방의 미대에서는 그를 교수로 초빙했습니다. 1900년 호들러가 47세 때 발표한 ‘낮’은 호들러의 이런 성공을 기념하는 작품입니다. 안개가 자욱한 산 초원 위, 꽃밭에 앉은 여인들은 무릎을 꿇은 채 앉아 몸짓으로 동이 트는 순간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수십 년 간의 가난과 무관심, 비판, 죽음과 실패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마침내 창조적인 예술가로서 우뚝 선 자신의 새출발을 호들러 스스로 축하하는 의미입니다.
호들러가 얼마나 기뻐했는지는 1904년 오스트리아 빈 분리파 전시에서 그를 본 사람의 목격담에서 실감 나게 전해집니다. “작품은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모두 숭고한 걸작 대우를 받았고, 호들러는 화가들에게 엄청난 존경을 받았습니다. 처음으로 이런 대우를 받는 호들러의 눈은 반짝였고 콧구멍은 벌름댔으며 입은 벌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행복한 흥분 상태였습니다.” 그토록 갈망하던 부와 성공이 드디어 찾아오면서, 마침내 호들러는 인생에 드리운 죽음의 공포에서 마침내 자유로워진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잠시 모습을 숨겼을 뿐. 언제나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연인의 죽음을 그리다
잠깐 호들러의 성격과 연애사를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호들러는 전형적인 ‘자수성가한 작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존심이 강하고 꼬장꼬장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까지 겪었던 가난과 무시 탓에 성격에 꼬인 구석이 있었고 까다로울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여러 단점을 덮을 만큼, 그는 예술가로서의 재능과 열정이 넘치는 매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인기 있는 나쁜 남자’ 유형입니다. 그는 애인이 있는데 결혼을 하거나, 아내가 있는데 애인을 만드는 등 멋대로 잔뜩 연애하고 돌아다녔습니다. 이런 성향 탓에 그가 30대 초반 했던 첫 번째 결혼은 2년 만에 불행하게 끝났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호들러의 바람기가 문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몇 년 뒤 호들러는 다른 여성과 재혼했습니다. 그 후에도 그는 계속 바람을 피웠고, 그래도 호들러를 잡고 싶었던 아내는 이를 묵인해 줬다고 합니다.그 수많은 여인 중에서도 호들러가 가장 사랑했던 단 한명이 있었습니다. 1908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만난 스무 살 연하의 발렌틴 고데-다렐이었습니다. 프랑스 파리의 명문가 출신인 발렌틴은 전남편과 이혼한 뒤 제네바에서 생계를 잇기 위해 모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그녀를 만난 호들러는 발렌틴의 교양과 현명함, 강단 있는 성격과 아름다움에 반했습니다. 둘은 곧 사랑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5년 뒤, 잊고 살던 죽음은 호들러가 가장 사랑한 발렌틴의 모습을 빌려 다시 찾아옵니다. 발렌틴의 몸에서 자궁암이 발견된 겁니다. 지금도 암은 가장 무서운 질병. 20세기 초반의 의학으로 암을 치료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암은 이미 곳곳에 전이돼 있었습니다. 두 번에 걸친 수술, 당시로서는 최신 기술이었던 방사선 치료에도 불구하고 발렌틴은 급속히 쇠약해졌습니다.
호들러는 홀린 듯이 발렌틴이 죽어가는 모습을 기록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곧 사라질 사랑하는 그녀의 존재를 자신의 곁에 남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림을 그리다 좌절에 빠져 자신이 그린 그림을 걷어차며 이렇게 소리쳤다는 기록이 증거입니다. “이따위 만질 수도 없는 그림이 무슨 소용이라고! 그림이 아니라 조각을 할 걸 그랬어….” 그가 남긴 그림 수는 유화와 스케치를 비롯해 총 200점 이상. 누군가가 죽어가는 과정을 이토록 끊임없이 여러 번 묘사한 화가는 그전에도, 후에도 없었습니다. 그림에 몰두하는 건 한편으로는 마음을 달래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면 그는 연인을 잃는 공포, 죽음에 대한 공포를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었습니다. 그 거대한 감정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그림으로 하나둘씩 변하면서 ‘누군가의 죽음’이라는 객관적인 개념으로 점차 정리됐습니다. 그러면서 호들러는 점차 삶과 죽음의 공존을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삶은 죽음이 있기에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메모장에 적었습니다. “죽음이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은, 보는 이에게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갈라놓는 모든 공통점보다 더 큰 건, 우리 모두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죽음은 절대적인 통합이다.”
영원한 색깔, 파랑
호들러는 이런 깨달음에 비하면 자신이 추구하던 부와 명성은 생각보다 별것 아니었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4년, 독일이 프랑스의 랭스 대성당에 대포를 쏘자 “인류의 문화유산을 파괴하는 야만적인 행동”이라는 항의 성명을 낸 것도 이런 영향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호들러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예술계에서 왕따가 됐고, 그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도 금지됐습니다. 자신의 가장 큰 지지 기반인 두 나라에서 밥줄이 끊기는 걸 감수한 용감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1915년 발렌틴은 2년 남짓한 투병 생활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발렌틴이 죽던 날, 호들러는 그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화 중 하나를 완성합니다. 세상의 끝자락에 서서 영원과 교감하는 듯한 이 그림. 그리고 호들러는 이제 풍경화를 그리기로 마음먹습니다. “나를 위한 그림을 그릴 거야.”호들러는 아름다운 풍경을 반복적인 무늬처럼 만들어서 캔버스 바깥까지 계속 풍경이 이어질 듯한 느낌을 연출하고, 이를 통해 유한한 캔버스에 무한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파란색을 쓴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호들러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하늘을 상징하는 파란색을 가장 좋아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파란색은 무한을 상징하는 장엄한 색이다.”
1917년 폐병으로 쓰러진 이후 호들러의 그림에서는 점차 형상이 희미해집니다. 대신 색감은 더욱 다채로워집니다. 마치 육체의 세계를 떠나 점차 우주와 하나가 되어 가는 것처럼. 그는 아파트 방 침대에서 제네바 호수 위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마지막까지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속에서 현실과 이상, 삶과 죽음, 시간과 영원은 모두 하나가 되는 듯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8년, 호들러는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다행히도 마지막 순간 호들러는 마침내 평생에 드리웠던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도구는 예술이었습니다. 유한한 그림으로 무한에 닿으려는 노력 끝에, 호들러는 유한한 인생에 영원한 예술을 담았습니다. 그 해 호들러는 떨리는 손으로 노트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죽음 외에도 이 세상에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술입니다. 제가 평생에 걸쳐 표현한 게 바로 그것이었다는 사실을 이제 깨달았습니다. 예술 만세!”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이번 기사 내용은 Ferdinand Hodler - View to Infinity(Jill Lloyd 등 지음), Ferdinand Hodler(프랑스 오르셰미술관 전시 도록), Ferdinand Hodler (Art Council 등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6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