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인사이트] '사업' 아닌 '회계연도'에 맞춰진 연말 임원인사
연말이 다가오면서 한국 기업의 숨 가쁜 임원 인사 시즌이 마무리되고 있다. 그동안의 성과를 인정받아 최고 경영진으로 화려하게 영전하거나 임원으로서의 첫 발걸음인 상무로 임명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퇴임 코스로의 전환 배치나 안타까운 재계약 실패까지 임원 인사 리스트에선 희비가 엇갈린다.

연말 대규모 임원 인사와 전사적 조직 개편은 한국 기업의 오랜 독특한 인사 관행이다. 과거에는 나름의 장점이 있었다. 연말 회계연도 종료와 맞물려 승진을 통해 성과를 보상하고 조직을 재정비해 새해를 시작할 수 있다. 또 임원 순환 보직은 우수한 인재에게 다양한 경험을 제공해 사업가로 육성하고, 이종 산업의 장점을 융합하는 혁신을 도모할 기회로도 여겨졌다.

그러나 이 같은 인사 관행이 과연 인공지능(AI) 시대의 현대 사업 환경에 적합한지, 우리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해 개선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연말 임원 인사 관행의 가장 큰 문제는 인사 시즌이 되면 조직 전반에 ‘관망세’가 형성돼 의사 결정이 지연되고 새로운 프로젝트 착수가 미뤄지는 등 업무 공백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사장급 인사에 대한 하마평이 시작되는 11월부터 하부 조직 인사이동이 이뤄지는 12월, 이어지는 연말 휴가철까지는 일이 손에 잘 안 잡히는 시기가 계속된다. 사업은 회계연도라는 인위적 기준에 맞춰 움직이지 않는다.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사들이 전력 질주하는 동안 일어나는 이 같은 느슨한 업무 공백은 시장 변화에 대한 민첩한 대응을 어렵게 한다.

또한 첨단 산업의 기본 속성이 기업 간 거래(B2B) 비즈니스라는 점을 감안하면 기업의 주요 의사 결정자 사이에서 오랫동안 쌓아온 협력 기간과 인간적 신뢰는 중요한 강점이 된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미국 빅테크도 속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 사는 것은 매한가지인 인간 사회이기 때문이다.

지난 9월 오라클 창업자 래리 엘리슨 최고기술책임자(CTO)는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와 저녁 식사를 함께하면서 서로 “자기 돈을 가지고 가라(please take our money)”며 황 CEO에게 경쟁적으로 그래픽처리장치(GPU)를 ‘구걸’(begging)했다고 한다. 이는 이들이 실리콘밸리에서 오랫동안 협력하면서 축적된 신뢰와 우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한국 기업의 경영자들이 순환 보직으로 짧게는 1~2년 만에 교체되는 상황에서 글로벌 비즈니스 밸류 체인의 핵심 인사들과 네트워크를 쌓고 이너서클에 들어가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글로벌 혁신 기업은 체계적인 승계 계획을 바탕으로 다음 세대 리더를 육성한다. 팀 쿡 애플 CEO는 스티브 잡스의 신뢰 속에 오랜 기간 후계자로 성장했고, 2011년 취임 이후 지금까지 회사를 이끌며 애플의 운영 혁신 전략을 일관되게 추진해 왔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사티아 나델라는 2014년 당시 신사업 분야이던 클라우드에 대한 전문성을 인정받아 CEO로 깜짝 발탁됐다. 그리고 AI 중심의 혁신을 꾸준히 실행해 기업 가치를 크게 높였다. 리사 수 AMD CEO는 IBM에서 쌓은 반도체 전문성을 바탕으로 2012년 AMD에 합류한 뒤 과감한 기술 전환과 시장 전략 재편을 통해 파산 위기의 회사를 반도체산업 선도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이들의 공통점은 해당 분야에서 오랜 기간 쌓은 전문성을 기반으로 장기적 관점에서 일관되게 조직 혁신을 이끌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한국 기업도 기존의 연말 대규모 임원 인사 관행을 벗어나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연중 수시로 임원 인사와 조직 개편을 단행해 능력 있는 인재를 적시에 발탁하고 사업 이슈에 발 빠르게 대응해야 한다. 그래야만 조직 전체가 인사 불확실성에 휘둘리지 않고 업무 공백을 최소화할 수 있다.

또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이뤄지는 순환 보직과 연공서열 중심에서 벗어나 전문성과 성과에 기반한 장기적인 승계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통해 한 조직의 CEO와 C레벨 임원은 안정적이고 일관된 리더십을 구축하고, 글로벌 시장에서 지속할 수 있는 성장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기업의 인사 제도는 과거 제조업 중심의 사업 환경과 위계적인 조직 구조에서 고착된 것이 많다. AI 시대의 기술 주도권을 확보하고 산업 생태계를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는 인사 제도 전반의 효율성을 재검토해야 한다. 연말 대규모 임원 인사와 조직 개편에 대한 새로운 접근은 단순한 제도 개선이 아니라 미래 성장을 위한 인재경영 혁신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