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가 현지 맞춤형 소형 전기차를 앞세워 뒷걸음질 치고 있는 유럽 시장 재공략에 나선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최근 중국 전기차에 최대 45%의 상계관세 부과를 결정해 새로운 기회가 열렸다는 판단에서다. 유럽을 글로벌 완성차 업체의 ‘무덤’으로 만든 중국산 전기차의 가격 메리트가 떨어지는 만큼 상품성 있는 전기차로 현지 수요를 기아로 돌려세우겠다는 계획이다.
기아 슬로바키아 공장
기아 슬로바키아 공장

EV2, 유럽에서만 연 10만 대

22일 자동차업계에 따르면 기아는 내년 1분기 슬로바키아 공장에서 생산에 들어가는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EV2의 연간 생산 대수를 10만 대로 확정했다. 내년 8만 대를 생산한 뒤 2026년부터 10만 대로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슬로바키아에서 생산한 EV2는 전량 유럽에서만 판매한다. 지난해 기아의 유럽 판매량(57만여 대)의 17.5%를 EV2 한 차종으로 채운다는 얘기다.

EV2는 기아에서 현재 가장 작은 전기차인 EV3보다 작은 엔트리급 전기 SUV다. 전장 4000㎜, 휠베이스 2555㎜ 정도다. ‘가성비’로 승부하는 중국 전기차를 겨냥해 삼원계(NCM) 배터리보다 저렴한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를 장착한 모델을 추가한 게 특징이다. LFP 모델 가격은 2만~3만유로(약 3000만~4500만원) 수준이 될 것으로 업계는 추정하고 있다. 1회 충전으로 주행할 수 있는 거리는 LFP 모델 300㎞, NCM 모델 440㎞다.

EV2의 라이벌은 비야디(BYD) 돌핀(2만9900유로), 미니 일렉트릭(3만7000유로), 푸조 e-2008(3만8000유로), 폭스바겐 ID.2(2만5000유로) 등이다. 테슬라가 2만달러대로 내놓겠다고 선언한 모델Q와 최근 도요타가 중국에서 출시한 bZ3X도 잠재적 경쟁자다.

기아는 EV2가 가격과 품질 측면에서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자신한다. 유럽을 휩쓸고 있는 중국 전기차에 45% 상계관세가 부과되면 상대적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중국산 전기차는 저렴한 가격을 앞세워 2020년 2.9%였던 유럽 전기차 시장 점유율을 올 상반기 18.2%로 끌어올렸다. 그 여파로 거의 모든 완성차 업체의 점유율이 하락했다. 기아도 올 들어 11월까지 판매량(49만 대)이 작년 동기보다 8.1% 줄었다. 회사 관계자는 “유럽에서 최근 출시한 EV3에 이어 내년 초 EV2가 투입되면 소형 전기차 시장에서 기아가 가장 가성비 있는 브랜드가 될 것”이라며 “4년 뒤 유럽 판매량 80만 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전략 모델을 추가로 내놓을 계획”이라고 했다.

멕시코 생산 K4, 전량 미국으로

기아는 멕시코 공장에서 생산하는 준중형 세단 K4(K3 후속) 생산·수출 계획도 수정하지 않기로 했다. “멕시코산 수입품에 25% 관세를 물리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엄포에도 내년 멕시코 공장에서 생산한 자동차를 미국에 전량 수출하겠다는 것이다. 기아 고위 관계자는 “제너럴모터스(GM)와 포드, 닛산, 스텔란티스 등도 멕시코 공장에서 만든 물량을 미국에 수출한다”며 “모두 똑같은 조건인 만큼 굳이 감산하거나 수출 지역을 돌릴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 기아는 연 40만 대 생산 규모를 갖춘 멕시코 공장에서 K4 12만 대를 생산해 미국에 수출하고 있다.

내년 글로벌 자동차 시장이 주춤해질 것이란 예상에도 기아가 글로벌 ‘빅2’ 시장 공략을 강화하기로 한 것은 그만큼 기아의 품질과 브랜드 파워가 높아졌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 고위 관계자는 “자동차 경쟁력의 핵심은 ‘잔존가치’에 달렸고, 이는 중고차 가격으로 결정된다”며 “제품 품질과 애프터서비스, 딜러망 등의 총합인 중고차 가격 측면에서 기아는 중국 업체나 웬만한 미국·유럽 브랜드보다 낫다”고 말했다. 최근 미국 JD파워가 발표한 잔존가치에서 텔루라이드가 4년 연속 1위로 선정되는 등 기아 브랜드의 잔존가치는 최근 몇 년 새 크게 상승했다.

김재후/김진원 기자 h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