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 대항마’로 떠오른 미국 주문형 반도체(ASIC) 제조업체 브로드컴이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에 차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 제품인 HBM4를 공급해 달라는 ‘러브콜’을 보냈다. 엔비디아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자체 인공지능(AI) 가속기 개발에 나선 구글 메타 등 빅테크가 브로드컴에 잇달아 설계를 맡기면서 AI 가속기에 따라붙는 고성능 HBM이 대거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엔비디아 한곳만 바라보던 삼성과 하이닉스도 고성능 HBM 수요처 확대에 따른 수혜를 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브로드컴, 삼성·하이닉스에 HBM4 러브콜

HBM4 확보 나선 브로드컴

22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브로드컴에서 범용·맞춤형 HBM4 공급 요청을 받고 시제품 개발 준비에 들어갔다. SK하이닉스의 내년 HBM 물량은 엔비디아가 싹쓸이했지만, 브로드컴의 영향력이 커지자 생산 계획을 수정해 일부 물량을 내년 하반기 공급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도 브로드컴과 HBM4 공급 논의를 시작했다. 업계에선 SK하이닉스 생산 능력이 브로드컴 수요를 다 맞출 수 없는 만큼 상당한 물량을 삼성전자가 확보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브로드컴이 내년 하반기에 나올 HBM4 시장의 ‘큰손’이 된 건 ASIC 시장 확대와 궤를 같이한다. 시장에 나온 AI 가속기는 엔디비아가 만드는 범용 그래픽처리장치(GPU)에 HBM을 붙여 제작하는데, 엔비디아 제품의 턱없이 높은 가격에 질린 빅테크들이 앞다퉈 브로드컴에 맡긴 ASIC에 HBM을 붙이는 식으로 AI 가속기 제작에 나섰기 때문이다. ASIC은 엔비디아 GPU보다 처리 속도는 떨어지지만 에너지 효율이 뛰어나고 가격이 싸다는 장점이 있다.

빅테크들이 이런 점에 주목해 ASIC 주문을 늘리면서 브로드컴은 ‘차세대 엔비디아’로 떠올랐다. 구글 메타의 신경망처리장치(NPU) 등 다양한 AI 반도체를 개발한 ASIC 분야 최강자인 브로드컴은 최근 실적 발표에서 빅테크 세 곳과 ASIC을 개발 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들 기업은 구글 메타 바이트댄스 애플 등으로 거론된다.

업계에선 빅테크들이 브로드컴과 손잡고 ‘AI 가속기 독립’에 나선 만큼 엔비디아 독주 체제가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씨티증권은 2028년 AI 가속기 시장에서 ASIC 비중이 20~30%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웃음 짓는 삼성·하이닉스

ASIC을 활용한 AI 가속기 시장이 본격 열리면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만드는 ‘맞춤형 HBM’인 HBM4 수요도 당초 예상보다 커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특정 기능에 초점을 맞춘 반도체인 만큼 HBM 역시 맞춤형으로 제작해야 AI 가속기 성능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브로드컴이 하이닉스와 삼성에 요청한 맞춤형 HBM4도 빅테크들이 주문한 AI 가속기에 들어갈 것으로 알려졌다.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맞춤형 AI 가속기 시장 규모는 올해 120억달러(약 17조4000억원)에서 2027년 300억달러(약 43조5000억원)로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여기에 새로운 수요가 더해지는 만큼 시장 규모는 더 커질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HBM 시장 판도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도 있다. 삼성전자가 브로드컴의 맞춤형 HBM4 메인 공급사로 선정되면 전체 HBM 시장 60%를 차지한 SK하이닉스와의 격차를 좁힐 수 있어서다.

김채연/박의명 기자 why2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