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글로벌 리더 - 후지이 시게오 한국엡손 대표
"환경 우선은 회사의 DNA...2050년 탄소 네거티브로 전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한국엡손의 ‘디테일이 만드는 더 나은 내일’이라고 적힌 슬로건이 눈에 띈다. 시계 회사 때부터 지켜온 ‘省·小·精(성·소·정)’ 키워드로 작고 효율적이면서도 정밀해 디테일에 강한 제품으로 승부하겠다는 것이다. 엡손 로고 밑에 장식한 크리스마스트리에는 엡손 프린터로 출력한 팀 사진이 걸려 있었다. 매년 사진을 가장 잘 찍은 팀을 골라 사내 수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사무실 앞쪽에는 엡손의 대표 프린터 제품이 가운데 배치되어 있고, 한쪽에서는 일본에서 전날 도착했다는 로봇 커피 머신이 열심히 손을 휘저으며 커피를 만들었다.

기자를 보자마자 “안녕하세요”라고 정중하면서도 활달하게 인사한 후지이 시게오 대표는 ‘자연스럽게’ 말하는 사진을 찍으니 살짝 긴장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잠시 후 인터뷰를 진행하자 후지이 대표는 서두르지 않고 한 자 한 자 천천히 생각하며 말을 이어갔다. 친근하면서도 수줍음이 많고 매우 신중한 성격이 엿보였다.

후지이 대표는 1989년 세이코엡손 본사의 미니프린터 영업부에서 시작해 점차 아시아 해외 영업을 담당한 ‘영업통’이다. 2000년부터 2006년까지 홍콩과 중국에서 프린터 영업을 담당했고, 2012년부터는 중국엡손 프린터 영업부 대표를 거쳐 2021년 한국엡손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후지이 대표 부임 이후 한국엡손의 매출은 꾸준한 우상향을 그리고 있다. 후지이 대표를 만나 엡손의 친환경 전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엡손에 부임한 지 벌써 4년이 됐다.

“4년 전 한국지사 대표로 왔을 때는 마침 코로나19 시기였다. 처음 1년간은 코로나19 사태로 활동하지 못했지만, 점차 사업 영역을 넓혀 2023년 한국 매출 1950억 원을 달성했고, 부임 이후 3년간 사상 최대 매출을 경신했다. 한국엡손은 2025년까지 매출 2000억 원을 달성하는 것을 중기 목표로 하고 있다.“

한국 시장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보나.

“한국은 IT와 콘텐츠를 결합하는 능력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갖췄다. 예컨대 미디어 아트나 스크린 골프장 같은 사례가 그렇다. 그뿐 아니라 젊은 세대는 환경에 대한 인식이 높다. 또 가격만 중시하기보다 품질이나 퀄리티 측면에서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이런 한국 시장의 특징에 따라 프린터와 프로젝터의 컬러 표현력이 높은 제품, 그리고 환경을 배려한 제품이 타사 대비 강점을 지녔다고 본다. 엡손 프로젝터를 예로 들면, 광원 3개를 색 전용 LCD로 표현하는 엡손 자체의 원천 기술 ‘3LCD’로 만들어 다채로운 컬러 표현력을 보여준다. 앞으로도 이런 제품으로 인지도를 높이고 활로를 넓힐 생각이다.”

엡손의 친환경 전략이 인상적이다. 일찍이 2008년부터 목적 중심 경영을 선언하고 2050년에는 탄소 네거티브도 선언했다.

“엡손 본사인 세이코엡손은 일본 도쿄에서 전차로 2시간 정도 떨어진 나가노에 있다. 본사 앞에는 스와 호수가 있는데,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을 제작할 때 영감을 줄 정도로 크고 아름다운 호수다. 창립 당시부터 엡손이 이 호수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이처럼 환경을 배려하는 것은 회사에 DNA처럼 박힌 사명과도 같다. 2050년에는 탄소 네거티브로 전환하고 지하자원을 전혀 쓰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적으로 RE100(재생에너지 100% 사용)을 달성하는 데도 관심을 기울여왔다.”
"환경 우선은 회사의 DNA...2050년 탄소 네거티브로 전환"
지난해 글로벌 사업장에서 RE100을 달성했다. 어떤 어려움이 있었나.

“일반적으로 RE100은 달성하기 위한 비용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비용 또한 발생하는 만큼 달성하는 것 자체를 꺼리는 기업이 많다. 하지만 늘 환경을 고려하는 엡손은 무조건 달성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해왔다. 한국엡손에서도 본사가 지시하기 전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임대 오피스를 사용하기에 자체 태양광발전을 따로 설치하지 않고 재생에너지 공급 인증서(REC)를 구매하는 방식으로 달성했는데, 세계적으로도 수력·지열·바이오매스 등 각 나라의 사정에 맞게 다양한 방식을 강구하고 있다.”

환경 부문에서 높은 목표를 맞추기가 어렵지는 않은가.

“환경에 관한 한 높은 목표를 가지고 이를 달성하는 것이 기본 방침이다. 우선 목표를 설정한 뒤 그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지 고민하고 해결해나간 것 같다. 엡손은 이미 1990년대 프레온가스를 광범위하게 쓰고 있던 일본 제조업계에서 처음으로 탈프레온가스를 선언하고 5년 만에 제로로 만든 선례가 있다. RE100도 마찬가지다. 다들 엡손처럼 큰 규모의 기업이 RE100을 달성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보았지만, 엡손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실제로 RE100을 달성했다.”

제품에도 이 같은 방향성이 녹아 있는 것 같다.

“엡손은 모든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환경에 대한 부하를 어떻게 저감할지 고민한다. 예를 들면, 컨슈머 프린터의 경우 엡손이 전 세계에서 처음 대용량 잉크 탱크 프린터를 만들었다. 대용량 잉크 탱크 프린터는 잉크 교환 없이도 3000~5000매 정도 인쇄할 수 있다. 잉크 교체 주기가 길어짐으로써 플라스틱 사용은 물론, 폐기물을 저감할 수 있다. 또 최근에는 열이 발생하지 않는 프린터 헤드를 만드는 히트프리 기술을 이용해 전력 사용을 줄이고 있다.”

종이를 재활용하는 페이퍼랩 등 제품을 상용화했는데, 어느 분야에서 수요가 있나.

“페이퍼랩은 사용한 종이를 다양한 크기, 두께로 업사이클링하도록 한 제품이다. 종이 재활용 과정에서 필요한 물 사용량을 획기적으로 줄인 것이 특징이다. 페이퍼랩은 어떻게 보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파쇄기라고 볼 수 있다. 일본과 유럽에서 비즈니스를 전개하고 있으며, 중요한 정보를 처리하는 은행·증권사·정부기관에 주로 공급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빠른 시일 안에 고객에게 데모 제품을 선보일 수 있도록 현재 일본 본사와 세부 사항을 논의 중이다.”

패션업계에도 재생 원단 수요가 늘고 있다고 들었다.

“옷감 원단에 직접 인쇄하는 엡손의 디지털 텍스타일 프린터는 아날로그 인쇄 방식에 비해 전후 처리와 날염 과정에서 사용되는 물과 에너지양이 대폭 감소했고, 작업 시간도 획기적으로 줄였다. 최근에는 패션업계에서 재생 원단 수요를 고려해 좀처럼 재활용하지 않던 코트 소재를 재활용하는 드라이파이버 테크놀로지를 연구 중이다. 양산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디자이너에게 테스트용으로 재생 원단을 제공해 파리 컬렉션에서 제품을 소개하기도 했다.”
"환경 우선은 회사의 DNA...2050년 탄소 네거티브로 전환"
최근 로봇 커피 머신을 만들기도 했는데, 로봇과 관련해서는 어떤 계획이 있나.

“한국은 생각보다 로봇 강국이다. 10만 명 대비 로봇이 몇 대나 보급되어 있는지 로봇 도입 지표로 쓰는데, 한국은 공장에서 산업용 로봇을 많이 쓰기 때문에 이 지표가 매우 높은 편이다. 한국 공장은 로봇을 통해 많은 부분 자동화되어 있다. 엡손이 개발한 엡손 로봇 제품은 가볍고 빠른 데다 움직임이 정확하다. 엡손은 서빙 등 실생활에서 활용되는 로봇보다는 산업용 로봇을 타깃으로 영업을 전개해나갈 계획이다.”

일본은 정부 차원의 저탄소 로드맵을 통해 기업에 전환을 주문하고 있다. 엡손도 동참하고 있나.

“엡손도 일본의 제조업 관련 협의체와 함께하고 있다. 일본 기업의 특징이지만, 정부 지침에 발맞춰 ESG 경영을 빠르게 도입했을 뿐 아니라 국제표준화기구(ISO) 인증도 서둘러 취득했다. 특히 유럽과 비즈니스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ISO 인증과 함께 ESG 경영을 도입해야 한다.”

중국, 홍콩에 이어 한국까지 글로벌 영업을 주로 담당하고 있다.

“해외 업무 방식은 일본에서 일할 때와 매우 다르다. 업무를 진행할 때 한국을 포함해 외국은 직접적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일본은 아직 그런 직설적 화법에 익숙지 않다. 개인적으로 해외 경험이 많다 보니 직설적 화법에 익숙해져 일본에 돌아갔을 때 오히려 적응하지 못할까 봐 고민이다. 1년에 4~5번 정도 일본 본사를 방문하는데, 코로나19 이후로는 방문 횟수가 2회 정도로 줄었다. 올해는 바쁜 업무 때문에 휴가를 못 냈는데, 기회가 된다면 일본에 다녀오고 싶다.”

미래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게 있다면.

“지난 4년간 미래를 위한 투자를 준비해왔으며, 스타트업과 협업하기 위한 해커톤 이벤트 ‘2024 이노베이션 챌린지’도 실시했다. 미국과 일본에서 세 번씩 열리는데, 한국에서는 일곱 번째로 진행한 것이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환경 테마 영화제, 인공지능(AI)을 활용한 프로젝션 매핑 콘테스트, 국내 패션 관련 대학 졸업 작품의 원단 프린팅을 지원하는 ‘내일을 위한 텍스타일’ 공모전 등을 진행하기도 했다. 또 환경 세미나를 주최하는 등 환경경영에도 힘쓰고 있다.”

끝으로 한 말씀 하신다면.

“30여 년간 제품 판매와 마케팅을 담당해왔는데, 5년 전만 해도 환경 관련 제품을 이해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최근에는 환경에 관심을 많이 가져주시는 것 같다. 엡손은 80년 전부터 일관되게 환경에 관심을 기울여온 만큼 앞으로도 환경부하 저하에 지속적으로 신경 쓸 것이다. 또 2050 환경 비전이라는 높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친환경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해나갈 것이다. 소비자들도 엡손에서 만드는 환경친화 제품에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구현화 기자 ku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