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달궈지는 무쇠솥처럼, 대학로 하콘의 10년 여정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arte] 강선애의 스무살 하콘 기획자 노트
마로니에공원 한편에 자리한 아치형 창문의 건물. 1931년에 준공되어 1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이 건물의 이름은 일제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 본관이었다가, 서울대학교 건물이었다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구청사를 거쳐 2010년부터는 예술가의집이 되었다.
사적 제278호로 지정될 만큼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이곳에서 하콘은 2014년 12월 29일 제423회 하우스콘서트로 대학로에 첫발을 내디뎠다. 클래식 장르에서는 불모지와 같은 낯선 곳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여정이자, 하콘의 대학로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시작은 우연한 기회로
대학로 하콘은 우연한 기회에 시작됐다. 2014년 가을, 박창수 선생님과 함께 지금은 고인이 되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권영빈 위원장님을 뵈러 가게 된 것이 그 계기였다. 그동안 문예진흥기금 지원을 받으며 위원회와 관계를 맺어 오긴 했지만, 특별히 위원장과 대담할 일은 없었는데,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 주셨던 그 자리의 온기가 아직도 남아있다.
어떻게 하콘을 발전시켜 왔는지, 어떻게 유지할 수 있었는지 등 그동안의 활동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자리의 말미에서 위원장님은 예술가의집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이 있겠냐고 아이디어를 물어 오셨다. 눈만 껌벅거리며 고민에 빠진 듯한 박창수 선생님의 답을 자리에 참석한 모두가 기다리고만 있었다. 1초가 1분같이 긴 침묵이 이어졌다.
“하우스콘서트를 이곳에서 연다면…”
나도 모르게 눈동자가 커졌다. 예술가의집 활용 방안에 대해 질문을 받게 될 줄도 몰랐지만, 선생님의 답 또한 의외였기 때문이다. 빠르게 돌아가는 분위기를 감지하며 두 분의 대화에 집중했다. 공연으로 쓰여온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하우스콘서트를 담기에 적합한가 하는 점에 대한 우려는 오히려 하우스콘서트와 예술가의집의 정체성을 살리는 좋은 이유가 됐다.
무엇보다 바닥이 나무라는 점은 최적의 조건이었다. 하콘의 스타인웨이 피아노 반입 문제 등 여러 가지 조건을 조율하며 하콘의 대학로 시대가 그 자리에서 결정됐다. 고심 끝에 꺼낸 답변에 전광석화와 같은 승인이었다. 매주 월요일 공연이라는 실험, 대학로의 유일한 클래식 음악회
개인의 거실에서 시작된 하우스콘서트는 지금까지 몇 차례의 공간 이동을 거쳤다. 하우스콘서트의 원형인 연희동 박창수 선생님의 자택에서는 6년간 200회의 공연을 가졌고, 이후 광장동 녹음 스튜디오, 역삼동 사진 스튜디오, 도곡동 녹음 스튜디오에서 하우스콘서트를 했다. 1년을 미처 채우지 못한 광장동과 역삼동과는 달리 도곡동 녹음 스튜디오에서는 5년의 세월을 보냈고, 대학로 예술가의집은 우리의 다섯 번째 보금자리가 되어 하우스콘서트 역사 이래 가장 오랜 기간을 함께한 공간이 되고 있다.
대학로로 오며 우리는 두 가지를 실험했다. 하나는 대학로라는 낯선 지역 그 자체였고, 다른 하나는 월요일 공연이었다. 문화예술의 발원지였던 대학로를 다시 순수예술이 꽃피는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목표였던 만큼, 대학로의 유일한 클래식 음악회로 월요일 공연을 한다면 ‘불이 꺼지지 않는 대학로’를 만들어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여기에는 야외 버스킹, 행사 등 우리 선에서 어쩌지 못하는 외부요인이 금요일에 더 많다는 이유도 작용했다. 그러나 이전까지 금요일 공연을 진행했던 우리에게 클래식 공연이 전무한 ‘대학로’에서, 그것도 ‘월요일’ 공연은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현실적으로 관객을 모으는 일이 어려웠다. 그렇게 초반 몇 년간은 관객이 너무 적어 고전한 탓에 하콘을 운영하는 데에도 타격이 있었다. 이러다 파산할 것 같다는 기사도 이 시기에 나왔다. 다음날을 위해서 발길을 서두르는 관객이 많아 공연 후 와인 파티의 분위기도 금요일 공연 때와는 달랐다. 역사성이 깊은 공간에서, 충분한 대의를 가지고 온 만큼 하우스콘서트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한 고민도 깊어져 갔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듯… 그렇게 10년
첫술에 배부를 수 있을까. 천천히 달궈지는 무쇠솥처럼 하우스콘서트가 이어져 왔듯 대학로에서의 성과도 금방 뜨겁게 달아오르기를 기대해서는 안 됐다. 대신 우리는 특유의 꾸준함으로 월요일 공연을 고수했다. 하우스콘서트의 맛을 살리기 위해 공연 후 토크 시간을 새롭게 만들고 와인 파티까지 그 분위기가 이어질 수 있도록 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선생님과의 하우스콘서트 등 깜짝 공연을 이따금 배치했다. 대학로 예술가의집 하우스콘서트를 포지셔닝하는 나름의 전략이었다. 몇 년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하우스콘서트가 예술가의집에서 열린다는 것은 어느새 우리를, 또한 공간을 상징하는 하나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월요일이라는 한계는 여전히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겠지만, 이제 그것이 큰 장벽이 되지는 않는다고 느낀다.
관객들은 날이 무더운 여름에도, 날이 매서운 겨울에도 월요일의 예술가의집 마룻바닥을 찾는다. 연세가 있는 분들은 이전에 서울대학교 건물이었던 것을 기억하며 반가워하시고, 젊은 층은 왠지 역사가 느껴지는 새로운 공간을 찾는 경험을 즐거워한다. 하콘을 자주 찾는 팬들은 이 공간을 친숙하게 느끼고, 예술가의집을 찾는 예술가들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름마저도 예술가를 위한 집이니 말이다.
대학로에서 머문 기간 동안 하콘은 500회, 1,000회 하우스콘서트라는 커다란 분기점을 두 번이나 지났다. 20주년 기념 공연도 이곳에서 했고, 오케스트라 공연 등을 통해 공간 규모의 한계에 도전하는 프로그램도 지속적으로 선보였다. 신진으로 첼리스트 한재민, 피아니스트 임윤찬, 박재홍을 발굴해 소개한 무대도, 줄라이 페스티벌의 시작도 이곳에서였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오는 2024년 12월로 만 10년이 채워진다. 10년이 되기까지 예술가의집에서 512번의 하우스콘서트를 했고, 2,720명의 연주자와 31,804명의 관객이 이곳에 다녀갔다. 천천히 달궈질 때를 기다려준 위원회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학로에서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나는 박창수 선생님께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때 위원장님은 왜 바로 하우스콘서트를 하자고 하셨을까요?”
그러자 그동안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대담 후 위원장실을 나서는 길에 자신의 뭘 믿고 바로 맡기셨냐고 질문하셨고, 그때 위원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했다.
“진정성이 느껴졌습니다.”
강선애 더하우스콘서트 대표
사적 제278호로 지정될 만큼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이곳에서 하콘은 2014년 12월 29일 제423회 하우스콘서트로 대학로에 첫발을 내디뎠다. 클래식 장르에서는 불모지와 같은 낯선 곳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여정이자, 하콘의 대학로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시작은 우연한 기회로
대학로 하콘은 우연한 기회에 시작됐다. 2014년 가을, 박창수 선생님과 함께 지금은 고인이 되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권영빈 위원장님을 뵈러 가게 된 것이 그 계기였다. 그동안 문예진흥기금 지원을 받으며 위원회와 관계를 맺어 오긴 했지만, 특별히 위원장과 대담할 일은 없었는데,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 주셨던 그 자리의 온기가 아직도 남아있다.
어떻게 하콘을 발전시켜 왔는지, 어떻게 유지할 수 있었는지 등 그동안의 활동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자리의 말미에서 위원장님은 예술가의집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이 있겠냐고 아이디어를 물어 오셨다. 눈만 껌벅거리며 고민에 빠진 듯한 박창수 선생님의 답을 자리에 참석한 모두가 기다리고만 있었다. 1초가 1분같이 긴 침묵이 이어졌다.
“하우스콘서트를 이곳에서 연다면…”
나도 모르게 눈동자가 커졌다. 예술가의집 활용 방안에 대해 질문을 받게 될 줄도 몰랐지만, 선생님의 답 또한 의외였기 때문이다. 빠르게 돌아가는 분위기를 감지하며 두 분의 대화에 집중했다. 공연으로 쓰여온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하우스콘서트를 담기에 적합한가 하는 점에 대한 우려는 오히려 하우스콘서트와 예술가의집의 정체성을 살리는 좋은 이유가 됐다.
무엇보다 바닥이 나무라는 점은 최적의 조건이었다. 하콘의 스타인웨이 피아노 반입 문제 등 여러 가지 조건을 조율하며 하콘의 대학로 시대가 그 자리에서 결정됐다. 고심 끝에 꺼낸 답변에 전광석화와 같은 승인이었다. 매주 월요일 공연이라는 실험, 대학로의 유일한 클래식 음악회
개인의 거실에서 시작된 하우스콘서트는 지금까지 몇 차례의 공간 이동을 거쳤다. 하우스콘서트의 원형인 연희동 박창수 선생님의 자택에서는 6년간 200회의 공연을 가졌고, 이후 광장동 녹음 스튜디오, 역삼동 사진 스튜디오, 도곡동 녹음 스튜디오에서 하우스콘서트를 했다. 1년을 미처 채우지 못한 광장동과 역삼동과는 달리 도곡동 녹음 스튜디오에서는 5년의 세월을 보냈고, 대학로 예술가의집은 우리의 다섯 번째 보금자리가 되어 하우스콘서트 역사 이래 가장 오랜 기간을 함께한 공간이 되고 있다.
대학로로 오며 우리는 두 가지를 실험했다. 하나는 대학로라는 낯선 지역 그 자체였고, 다른 하나는 월요일 공연이었다. 문화예술의 발원지였던 대학로를 다시 순수예술이 꽃피는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목표였던 만큼, 대학로의 유일한 클래식 음악회로 월요일 공연을 한다면 ‘불이 꺼지지 않는 대학로’를 만들어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여기에는 야외 버스킹, 행사 등 우리 선에서 어쩌지 못하는 외부요인이 금요일에 더 많다는 이유도 작용했다. 그러나 이전까지 금요일 공연을 진행했던 우리에게 클래식 공연이 전무한 ‘대학로’에서, 그것도 ‘월요일’ 공연은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현실적으로 관객을 모으는 일이 어려웠다. 그렇게 초반 몇 년간은 관객이 너무 적어 고전한 탓에 하콘을 운영하는 데에도 타격이 있었다. 이러다 파산할 것 같다는 기사도 이 시기에 나왔다. 다음날을 위해서 발길을 서두르는 관객이 많아 공연 후 와인 파티의 분위기도 금요일 공연 때와는 달랐다. 역사성이 깊은 공간에서, 충분한 대의를 가지고 온 만큼 하우스콘서트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한 고민도 깊어져 갔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듯… 그렇게 10년
첫술에 배부를 수 있을까. 천천히 달궈지는 무쇠솥처럼 하우스콘서트가 이어져 왔듯 대학로에서의 성과도 금방 뜨겁게 달아오르기를 기대해서는 안 됐다. 대신 우리는 특유의 꾸준함으로 월요일 공연을 고수했다. 하우스콘서트의 맛을 살리기 위해 공연 후 토크 시간을 새롭게 만들고 와인 파티까지 그 분위기가 이어질 수 있도록 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선생님과의 하우스콘서트 등 깜짝 공연을 이따금 배치했다. 대학로 예술가의집 하우스콘서트를 포지셔닝하는 나름의 전략이었다. 몇 년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하우스콘서트가 예술가의집에서 열린다는 것은 어느새 우리를, 또한 공간을 상징하는 하나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월요일이라는 한계는 여전히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겠지만, 이제 그것이 큰 장벽이 되지는 않는다고 느낀다.
관객들은 날이 무더운 여름에도, 날이 매서운 겨울에도 월요일의 예술가의집 마룻바닥을 찾는다. 연세가 있는 분들은 이전에 서울대학교 건물이었던 것을 기억하며 반가워하시고, 젊은 층은 왠지 역사가 느껴지는 새로운 공간을 찾는 경험을 즐거워한다. 하콘을 자주 찾는 팬들은 이 공간을 친숙하게 느끼고, 예술가의집을 찾는 예술가들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름마저도 예술가를 위한 집이니 말이다.
대학로에서 머문 기간 동안 하콘은 500회, 1,000회 하우스콘서트라는 커다란 분기점을 두 번이나 지났다. 20주년 기념 공연도 이곳에서 했고, 오케스트라 공연 등을 통해 공간 규모의 한계에 도전하는 프로그램도 지속적으로 선보였다. 신진으로 첼리스트 한재민, 피아니스트 임윤찬, 박재홍을 발굴해 소개한 무대도, 줄라이 페스티벌의 시작도 이곳에서였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오는 2024년 12월로 만 10년이 채워진다. 10년이 되기까지 예술가의집에서 512번의 하우스콘서트를 했고, 2,720명의 연주자와 31,804명의 관객이 이곳에 다녀갔다. 천천히 달궈질 때를 기다려준 위원회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학로에서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나는 박창수 선생님께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때 위원장님은 왜 바로 하우스콘서트를 하자고 하셨을까요?”
그러자 그동안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대담 후 위원장실을 나서는 길에 자신의 뭘 믿고 바로 맡기셨냐고 질문하셨고, 그때 위원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했다.
“진정성이 느껴졌습니다.”
강선애 더하우스콘서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