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다시 읽는 부고-우리 곁을 떠난 별들이 남긴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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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유한하지만, 예술은 영원하다. 그래서 러시아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롤리타>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썼다.
올해도 많은 예술가가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들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들이 남긴 작품과 함께. 고흐가 그렇듯, 윤동주가 그렇듯 이들은 죽어서도 살아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그땐 그랬지’ 하며 추억을 떠올리는 그 순간에 우리와 함께 살며시 미소 짓는다.
2024년 우리가 떠나보낸 위대한 예술가와 그들이 남긴 말을 다시 읽는다. 그들은 예술의 힘을 믿었다. “석양이 아름다운 것은 동서양이 마찬가지듯, 음악은 인류 모두의 것”이라던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 “조각이란,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장소”라던 조각가 리처드 세라, “나는 ‘예술에 내 인생을 바쳤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예술이 내 삶을 ‘줬다’고 하고 싶다”고 말한 추상화의 거장 프랭크 스텔라.
그들은 사람들의 추억 속에 존재한다. “오겐키데스카? 와타시와 겐키데스(잘 지내나요? 나는 잘 지내요)”라는 영화 ‘러브 레터’ 속 나카야마 미호의 외침은 ‘태양의 가득히’ 속 알랭 들롱의 눈빛만큼이나 강렬하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라던 신경림 시, “난 뒷것이야, 너희는 앞것이고”라고 한 김민기의 노래와 연극도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다.
1년 동안 우리가 떠나보낸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아르떼>가 정리해봤다. 그리고 이곳에 다 담지 못한, 하늘의 별이 된 수많은 스타에게 전한다. R.I.P(Rest In Peace). ▷오자와 세이지(1935~2024)
“석양이 아름다운 것은 동서양이 마찬가지이듯,
음악은 인류 모두의 것입니다.”
백인 일색이던 세계 지휘계에서 오로지 실력 하나로 최정상 자리에 오른 동양인 마에스트로. 중국 선양(옛 만주국)에서 태어난 그는 1959년 프랑스 브장송 국제 지휘자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이름을 알렸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사사한 그는 레너드 번스타인 음악감독 재임 시절 뉴욕 필하모닉에서 부지휘자로 부임하면서 명성을 쌓았다. 그는 1973년 ‘미국 5대 명문 악단’으로 꼽히는 보스턴 심포니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이후 30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면서 세계적인 거장으로 인정받았다. 2002년엔 주빈 메타에 이어 아시아 지휘자로는 두 번째로 빈 필하모닉 신년 음악회를 이끄는 기록을 세웠으며, 그해부터 2010년까지 빈 국립 오페라 음악감독으로 활동하며 수많은 명연을 남겼다. ▷마우리치오 폴리니(1942~2024)
“예술은 사회의 꿈이다.”
반세기 동안 ‘피아노의 황제’로 활약해온 최고의 이탈리아 거장. 1960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만장일치로 우승을 거머쥐며 명성을 얻었다. 당시 18세인 폴리니를 두고 심사위원이던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저 소년이 여기 심사위원들 누구보다도 잘 친다”고 극찬한 일화는 유명하다. 우승 직후 폴리니는 1년간 연주하지 않고 은둔했다. 무대에서 스타가 되는 대신 당대의 거장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를 찾아가 배움을 청했고,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야 본격적인 연주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쇼팽의 교과서’로 불리며 그의 쇼팽 음반은 피아니스트가 들어야 할 필수 음반으로 꼽혀왔다. 쇤베르크, 스트라빈스키 등 현대 음악도 다루며 폭넓은 레퍼토리를 선보였다. 동향인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친밀해 그와 많은 콘서트 및 음반을 남기기도 했다. 예술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에른스트폰지멘스 음악상 등 여러 음악상을 수상하며 권위를 인정받았다. ▷리처드 세라(1938~2024)
“조각이란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미국의 현대 조각을 대표하는 예술가 중 한 명인 세라는 거대한 금속 조각 작품을 공공장소에 들여놓는 작업을 펼치며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가 세계 곳곳에 세운 초대형 금속 작품은 그 지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2005년 스페인 구겐하임미술관에 설치된 작업 ‘시간의 문제’는 그의 명함과도 같은 대표 작품이 됐다. 이 작품은 영구 전시가 결정돼 현재까지 그 자리에서 관객을 맞이하고 있다. 2014년에는 카타르 브루크 자연보호구역에 1㎞ 간격으로 14~16m 높이의 강철 기둥을 심는 ‘동-서/서-동(East-West/West-East)’ 작업을 펼치며 자연과 세상, 작품 사이의 조화에 대해 고심했다. 세라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근무하던 조선소를 자주 다니며 ‘철’이라는 재료에 매료됐고, 1970년대부터 철을 재료로 거대한 조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가 압도적 크기의 조각에 뛰어든 까닭은 그가 가진 신념이 바탕이 됐다. 예술은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 살아가는 공간과 환경에 변화를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빌 비올라(1951~2024)
“내 작품이 존재하는 가장 결정적인 곳은
미술관도, 상영관도, 텔레비전도, 심지어 스크린도 아니다.
바로 그것을 보는 관객의 마음이다.”
비올라는 삶과 죽음, 물과 빛을 주제로 명상적이고 깊이 있는 비디오아트 작품을 만드는 작가다. ‘비디오 시대의 렘브란트’라는 별명을 얻은 거장이다.
비올라는 1995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미국관 작가로 선정되며 ‘미국 국가대표 작가’로 인정받았다.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는 그에게 전시 러브콜을 했다.
그는 1970년대 백남준 등 전위예술가들을 만난 뒤 비디오아트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1974년엔 백남준이 미국 뉴욕 에버슨미술관에서 작품을 선보일 때 그의 조수가 되기도 했다. 그는 인간이라면 한 번쯤 해봤을 근원적 고민을 작품으로 풀어낸다. 예컨대 삶과 죽음의 차이, 인생 속에서 우연히 만나는 사랑 등이 주제가 된다. 낯선 매체를 사용함에도 누구나 그의 작품에 공감할 수 있는 이유다. 2017년 빌바오 구겐하임에서 열린 개인전에는 71만 명의 관객이 다녀갈 만큼 대중에게도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미술관 역사상 세 번째로 많은 관람객 수였다. ▷퀸시 존스(1934~2024)
“음악은 나에게 자유를 준 유일한 세계였다.”
80차례 그래미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고 29번 수상한 팝 음악의 거장이자 20세기 대표 프로듀서. 흑인 음악가가 활약하기 쉽지 않던 1940년대부터 미국 대중음악계의 중심에 우뚝 선 거인. 1980년대 마이클 잭슨을 ‘팝의 황제’ 자리에 올린 명반인 ‘오프 더 월(Off The Wall)’과 ‘스릴러(Thriller)’, 그리고 ‘배드(Bad)’를 제작했다. 존스는 아프리카 대기근 구호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당대 스티비 원더, 밥 딜런, 빌리 조엘 등 미국 인기 가수 40여 명을 모아 밴드 ‘USA For Arfrica’를 결성했다. 이 음반에서 명곡 ‘위 아더 월드(We are the World)’가 탄생했다.
▷폴 오스터(1947~2024)
“소설은 작가와 독자, 낯선 두 사람이
지극히 친밀한 만남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소설과 시, 에세이, 번역, 평론, 시나리오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활약했다. 뉴욕을 배경으로 쓴 소설 <뉴욕 3부작>이 성공한 뒤 뉴욕을 상징하는 작가로 자리잡았다. 오스터의 인기는 빈민가이던 뉴욕 브루클린이 예술가의 도시로 탈바꿈하는 데도 기여했다. 사실주의와 신비주의를 결합해 동시대의 일상과 열망, 고독, 강박 등을 형상화했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오스터를 천재라고 극찬하는 등 수많은 현대 작가에게 영감을 줬다. 생전에 글을 쓸 때 컴퓨터 대신 만년필과 오래된 타자기를 사용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신경림(1935~2024)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동국대 영문과 재학 시절 <갈대>란 시로 등단했지만 이후 10여년간 시를 쓰지 않았다. 고향 충주에서 농사일부터 공사장 인부, 장사, 학원 강사 등 갖은 일을 하며 지냈다. 이때 경험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삶을 시에 담아내는 데 자양분이 됐다. 그의 시는 질박한 생활 언어로 현실을 노래한다. 민중과 농민의 애환을 서정적으로, 동시에 가슴 아프게 그린다. ▷김민기(1951~2024)
“난 뒷것이야, 너희는 앞것이고.”
33년 동안 서울 대학로 소극장 학전(學田·배움의 밭)을 이끌던 연출가 겸 가수. 1971년 발표한 데뷔 음반 ‘김민기’의 수록곡 ‘상록수’ ‘꽃 피우는 아이’ 등이 금지곡으로 지정되며 ‘영원한 저항 가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연출가로서 커리어는 1991년 학전을 개관하며 시작했다. 학전은 소극장 문화를 만들어낸 공신이자 문화예술인의 ‘못자리’로 불리는 장소가 됐다. 대표작은 1994년 초연한 ‘지하철 1호선’. ‘학전 독수리 5형제’로 불린 김윤석 설경구 장현성 조승우 황정민과 가수 김광석을 배출했다. ▷알랭 들롱(1935~2024)
“나는 모든 것을 알았고, 모든 것을 받았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주는 것이더라.”
‘스크린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배우’라는 수식이 따르는 프랑스 대표 영화배우. 파리 교외에서 태어난 그는 네 살 때 부모가 이혼하면서 입양 보내졌다가 양아버지의 사망으로 생모에게 돌아와 자랐다. 이런 가정사 여파인지 가톨릭 기숙학교에서 여섯 번이나 퇴학당하는 등 반항적인 10대 시기를 보내며 성장했다. 1958년 영화배우로 데뷔한 알랭 들롱은 1960년 르네 클레망 감독의 영화 ‘태양은 가득히’로 세계적 스타 반열에 올랐다. 주인공 톰 리플리 역할을 맡은 알랭 들롱은 완벽한 외모에 냉철하고 슬픈 눈빛을 가진 인물로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세계가 주목하는 스타가 됐지만, 미남 배우로만 그를 각인시킬 만한 영화는 거부했다. 차가운 눈빛과 퇴폐적인 매력을 앞세워 살인자, 범죄자 역할을 주로 맡으며 프렌치 누아르의 전성시대를 여는 데 기여했다. ▷도리야마 아키라(1955~2024)
“너무 많은 판타지는 현실성을 잃고 너무 많은 희망은 어딘가 공허해 보일 수 있다.”
만화 ‘드래곤볼’ ‘닥터 슬럼프’를 그린 일본 작가. 45년 이상 창작활동을 했고, 어른도 아이도 만화를 읽고 즐길 수 있는 시대를 만든 사람이란 평가를 받는다. ‘드래곤볼’은 세계에서 인기를 끈 일본 만화로, 단행본 판매량이 3억 부에 달한다. 일본 만화가 최초로 개인 납세금액 최상위 10인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드래곤볼’의 탄생 비화는 팬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닥터 슬럼프’를 주간지 소년점프에 연재하던 중 소재 고갈로 힘들어하던 그에게 당시 편집자가 “‘닥터 슬럼프’보다 더 재밌는 작품을 가져오면 완결을 허락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무술 영화를 틀어놓고 작업하던 도리야마 아키라는 서유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드래곤 보이’라는 단편을 그렸고, ‘드래곤볼’의 시초가 됐다. ‘원피스’ 작가 오다 에이치로 등 많은 후배가 꼽는 가장 존경하는 만화가다. ▷이두용(1941~2024)
“한물간 감독, 이두용입니다.”
20세기 세계 영화사에 한국의 이름을 새긴 거장. 액션부터 사극, 멜로 등을 넘나든 ‘장르 개척자’. ▷나카야마 미호(1970~2024)
“오겐키데스카? 와타시와 겐키데스
(お元気ですか?, 私は元気です·잘 지내나요? 나는 잘 지내요).”
이와이 슌지 감독이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로맨스 영화 ‘러브레터’(1995)의 주인공이자 아이돌 출신 배우. 오타루의 설원에서 외치는 한 마디는 명장면으로 남았다. 소설가 쓰지 히토나리의 부인이었다. ▷김광림(1929~2024)
“꽃은 꺾인 대로 화병에 담아 채우면 금시 향기로워 오는 목숨인데
사람은 한번 꺾어지면 그만 아닌가.”
한국 현대시의 모더니즘을 이끈 시인. ▷블라디미르 쉬클리야로프(1985~2024)
‘발레 황태자’로 불리던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 수석무용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정치인은 민간인을 쏘거나 죽이지 않고 협상할 수 있어야 한다.” ▷에릭 카먼(팝 싱어송라이터, 1949~2024)
“12세 때 작곡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늘 존경하던 사람은 레너드 번스타인이다.”
1970년대 파워 팝 장르의 선구적 밴드 ‘라즈베리스’를 이끌었고,
‘올 바이 마이셀프’로 솔로 가수로 큰 성공을 거둔 세기의 아이콘이다. ▷프랭크 스텔라(1936~2024)
“나는 ‘예술에 내 인생을 바쳤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예술이 내 삶을 ‘줬다’고 하고 싶다.”
추상표현주의 시대의 문을 닫고 미니멀리즘의 시작을 알린 거장 ▷앤드루 데이비스(1944~2024)
“오케스트라가 감당할 수 있는 모든 색상의 음악을 들려주고 싶었다.”
BBC 프롬스 폐막 무대를 10여 차례 이끈 ‘英 지휘 명장’ ▷임영웅(연극 연출가·1934~2024)
"고도를 기다리는 우리야말로 인생의 광대다."
1969년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한국에 처음으로 선보이고, 이듬해 극단 산울림을 창단한 한국 연극계 대부. '고도..'는 50여 년간 1500여 회 공연했고, 이외에도 60여 편의 작품을 연출했다. “연극만이 살아있는 느낌을 준다”는 이 땅에 사실주의 연극을 뿌리내리게 했다.
**아르떼 취재팀
임근호 신연수 이해원 김수현 최다은 유승목 안시욱 성수영 최지희 조동균
“지금 나는 들소와 천사를,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물감의 비밀을, 예언적인 소네트를, 그리고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떠올린다. 너와 내가 함께 불멸을 누리는 길은 이것뿐이구나, 나의 롤리타.”
올해도 많은 예술가가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들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들이 남긴 작품과 함께. 고흐가 그렇듯, 윤동주가 그렇듯 이들은 죽어서도 살아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그땐 그랬지’ 하며 추억을 떠올리는 그 순간에 우리와 함께 살며시 미소 짓는다.
2024년 우리가 떠나보낸 위대한 예술가와 그들이 남긴 말을 다시 읽는다. 그들은 예술의 힘을 믿었다. “석양이 아름다운 것은 동서양이 마찬가지듯, 음악은 인류 모두의 것”이라던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 “조각이란,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장소”라던 조각가 리처드 세라, “나는 ‘예술에 내 인생을 바쳤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예술이 내 삶을 ‘줬다’고 하고 싶다”고 말한 추상화의 거장 프랭크 스텔라.
그들은 사람들의 추억 속에 존재한다. “오겐키데스카? 와타시와 겐키데스(잘 지내나요? 나는 잘 지내요)”라는 영화 ‘러브 레터’ 속 나카야마 미호의 외침은 ‘태양의 가득히’ 속 알랭 들롱의 눈빛만큼이나 강렬하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라던 신경림 시, “난 뒷것이야, 너희는 앞것이고”라고 한 김민기의 노래와 연극도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다.
1년 동안 우리가 떠나보낸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아르떼>가 정리해봤다. 그리고 이곳에 다 담지 못한, 하늘의 별이 된 수많은 스타에게 전한다. R.I.P(Rest In Peace). ▷오자와 세이지(1935~2024)
“석양이 아름다운 것은 동서양이 마찬가지이듯,
음악은 인류 모두의 것입니다.”
백인 일색이던 세계 지휘계에서 오로지 실력 하나로 최정상 자리에 오른 동양인 마에스트로. 중국 선양(옛 만주국)에서 태어난 그는 1959년 프랑스 브장송 국제 지휘자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이름을 알렸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사사한 그는 레너드 번스타인 음악감독 재임 시절 뉴욕 필하모닉에서 부지휘자로 부임하면서 명성을 쌓았다. 그는 1973년 ‘미국 5대 명문 악단’으로 꼽히는 보스턴 심포니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이후 30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면서 세계적인 거장으로 인정받았다. 2002년엔 주빈 메타에 이어 아시아 지휘자로는 두 번째로 빈 필하모닉 신년 음악회를 이끄는 기록을 세웠으며, 그해부터 2010년까지 빈 국립 오페라 음악감독으로 활동하며 수많은 명연을 남겼다. ▷마우리치오 폴리니(1942~2024)
“예술은 사회의 꿈이다.”
반세기 동안 ‘피아노의 황제’로 활약해온 최고의 이탈리아 거장. 1960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만장일치로 우승을 거머쥐며 명성을 얻었다. 당시 18세인 폴리니를 두고 심사위원이던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저 소년이 여기 심사위원들 누구보다도 잘 친다”고 극찬한 일화는 유명하다. 우승 직후 폴리니는 1년간 연주하지 않고 은둔했다. 무대에서 스타가 되는 대신 당대의 거장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를 찾아가 배움을 청했고,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야 본격적인 연주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쇼팽의 교과서’로 불리며 그의 쇼팽 음반은 피아니스트가 들어야 할 필수 음반으로 꼽혀왔다. 쇤베르크, 스트라빈스키 등 현대 음악도 다루며 폭넓은 레퍼토리를 선보였다. 동향인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친밀해 그와 많은 콘서트 및 음반을 남기기도 했다. 예술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에른스트폰지멘스 음악상 등 여러 음악상을 수상하며 권위를 인정받았다. ▷리처드 세라(1938~2024)
“조각이란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미국의 현대 조각을 대표하는 예술가 중 한 명인 세라는 거대한 금속 조각 작품을 공공장소에 들여놓는 작업을 펼치며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가 세계 곳곳에 세운 초대형 금속 작품은 그 지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2005년 스페인 구겐하임미술관에 설치된 작업 ‘시간의 문제’는 그의 명함과도 같은 대표 작품이 됐다. 이 작품은 영구 전시가 결정돼 현재까지 그 자리에서 관객을 맞이하고 있다. 2014년에는 카타르 브루크 자연보호구역에 1㎞ 간격으로 14~16m 높이의 강철 기둥을 심는 ‘동-서/서-동(East-West/West-East)’ 작업을 펼치며 자연과 세상, 작품 사이의 조화에 대해 고심했다. 세라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근무하던 조선소를 자주 다니며 ‘철’이라는 재료에 매료됐고, 1970년대부터 철을 재료로 거대한 조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가 압도적 크기의 조각에 뛰어든 까닭은 그가 가진 신념이 바탕이 됐다. 예술은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 살아가는 공간과 환경에 변화를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빌 비올라(1951~2024)
“내 작품이 존재하는 가장 결정적인 곳은
미술관도, 상영관도, 텔레비전도, 심지어 스크린도 아니다.
바로 그것을 보는 관객의 마음이다.”
비올라는 삶과 죽음, 물과 빛을 주제로 명상적이고 깊이 있는 비디오아트 작품을 만드는 작가다. ‘비디오 시대의 렘브란트’라는 별명을 얻은 거장이다.
비올라는 1995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미국관 작가로 선정되며 ‘미국 국가대표 작가’로 인정받았다.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는 그에게 전시 러브콜을 했다.
그는 1970년대 백남준 등 전위예술가들을 만난 뒤 비디오아트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1974년엔 백남준이 미국 뉴욕 에버슨미술관에서 작품을 선보일 때 그의 조수가 되기도 했다. 그는 인간이라면 한 번쯤 해봤을 근원적 고민을 작품으로 풀어낸다. 예컨대 삶과 죽음의 차이, 인생 속에서 우연히 만나는 사랑 등이 주제가 된다. 낯선 매체를 사용함에도 누구나 그의 작품에 공감할 수 있는 이유다. 2017년 빌바오 구겐하임에서 열린 개인전에는 71만 명의 관객이 다녀갈 만큼 대중에게도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미술관 역사상 세 번째로 많은 관람객 수였다. ▷퀸시 존스(1934~2024)
“음악은 나에게 자유를 준 유일한 세계였다.”
80차례 그래미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고 29번 수상한 팝 음악의 거장이자 20세기 대표 프로듀서. 흑인 음악가가 활약하기 쉽지 않던 1940년대부터 미국 대중음악계의 중심에 우뚝 선 거인. 1980년대 마이클 잭슨을 ‘팝의 황제’ 자리에 올린 명반인 ‘오프 더 월(Off The Wall)’과 ‘스릴러(Thriller)’, 그리고 ‘배드(Bad)’를 제작했다. 존스는 아프리카 대기근 구호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당대 스티비 원더, 밥 딜런, 빌리 조엘 등 미국 인기 가수 40여 명을 모아 밴드 ‘USA For Arfrica’를 결성했다. 이 음반에서 명곡 ‘위 아더 월드(We are the World)’가 탄생했다.
▷폴 오스터(1947~2024)
“소설은 작가와 독자, 낯선 두 사람이
지극히 친밀한 만남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소설과 시, 에세이, 번역, 평론, 시나리오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활약했다. 뉴욕을 배경으로 쓴 소설 <뉴욕 3부작>이 성공한 뒤 뉴욕을 상징하는 작가로 자리잡았다. 오스터의 인기는 빈민가이던 뉴욕 브루클린이 예술가의 도시로 탈바꿈하는 데도 기여했다. 사실주의와 신비주의를 결합해 동시대의 일상과 열망, 고독, 강박 등을 형상화했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오스터를 천재라고 극찬하는 등 수많은 현대 작가에게 영감을 줬다. 생전에 글을 쓸 때 컴퓨터 대신 만년필과 오래된 타자기를 사용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신경림(1935~2024)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동국대 영문과 재학 시절 <갈대>란 시로 등단했지만 이후 10여년간 시를 쓰지 않았다. 고향 충주에서 농사일부터 공사장 인부, 장사, 학원 강사 등 갖은 일을 하며 지냈다. 이때 경험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삶을 시에 담아내는 데 자양분이 됐다. 그의 시는 질박한 생활 언어로 현실을 노래한다. 민중과 농민의 애환을 서정적으로, 동시에 가슴 아프게 그린다. ▷김민기(1951~2024)
“난 뒷것이야, 너희는 앞것이고.”
33년 동안 서울 대학로 소극장 학전(學田·배움의 밭)을 이끌던 연출가 겸 가수. 1971년 발표한 데뷔 음반 ‘김민기’의 수록곡 ‘상록수’ ‘꽃 피우는 아이’ 등이 금지곡으로 지정되며 ‘영원한 저항 가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연출가로서 커리어는 1991년 학전을 개관하며 시작했다. 학전은 소극장 문화를 만들어낸 공신이자 문화예술인의 ‘못자리’로 불리는 장소가 됐다. 대표작은 1994년 초연한 ‘지하철 1호선’. ‘학전 독수리 5형제’로 불린 김윤석 설경구 장현성 조승우 황정민과 가수 김광석을 배출했다. ▷알랭 들롱(1935~2024)
“나는 모든 것을 알았고, 모든 것을 받았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주는 것이더라.”
‘스크린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배우’라는 수식이 따르는 프랑스 대표 영화배우. 파리 교외에서 태어난 그는 네 살 때 부모가 이혼하면서 입양 보내졌다가 양아버지의 사망으로 생모에게 돌아와 자랐다. 이런 가정사 여파인지 가톨릭 기숙학교에서 여섯 번이나 퇴학당하는 등 반항적인 10대 시기를 보내며 성장했다. 1958년 영화배우로 데뷔한 알랭 들롱은 1960년 르네 클레망 감독의 영화 ‘태양은 가득히’로 세계적 스타 반열에 올랐다. 주인공 톰 리플리 역할을 맡은 알랭 들롱은 완벽한 외모에 냉철하고 슬픈 눈빛을 가진 인물로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세계가 주목하는 스타가 됐지만, 미남 배우로만 그를 각인시킬 만한 영화는 거부했다. 차가운 눈빛과 퇴폐적인 매력을 앞세워 살인자, 범죄자 역할을 주로 맡으며 프렌치 누아르의 전성시대를 여는 데 기여했다. ▷도리야마 아키라(1955~2024)
“너무 많은 판타지는 현실성을 잃고 너무 많은 희망은 어딘가 공허해 보일 수 있다.”
만화 ‘드래곤볼’ ‘닥터 슬럼프’를 그린 일본 작가. 45년 이상 창작활동을 했고, 어른도 아이도 만화를 읽고 즐길 수 있는 시대를 만든 사람이란 평가를 받는다. ‘드래곤볼’은 세계에서 인기를 끈 일본 만화로, 단행본 판매량이 3억 부에 달한다. 일본 만화가 최초로 개인 납세금액 최상위 10인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드래곤볼’의 탄생 비화는 팬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닥터 슬럼프’를 주간지 소년점프에 연재하던 중 소재 고갈로 힘들어하던 그에게 당시 편집자가 “‘닥터 슬럼프’보다 더 재밌는 작품을 가져오면 완결을 허락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무술 영화를 틀어놓고 작업하던 도리야마 아키라는 서유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드래곤 보이’라는 단편을 그렸고, ‘드래곤볼’의 시초가 됐다. ‘원피스’ 작가 오다 에이치로 등 많은 후배가 꼽는 가장 존경하는 만화가다. ▷이두용(1941~2024)
“한물간 감독, 이두용입니다.”
20세기 세계 영화사에 한국의 이름을 새긴 거장. 액션부터 사극, 멜로 등을 넘나든 ‘장르 개척자’. ▷나카야마 미호(1970~2024)
“오겐키데스카? 와타시와 겐키데스
(お元気ですか?, 私は元気です·잘 지내나요? 나는 잘 지내요).”
이와이 슌지 감독이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로맨스 영화 ‘러브레터’(1995)의 주인공이자 아이돌 출신 배우. 오타루의 설원에서 외치는 한 마디는 명장면으로 남았다. 소설가 쓰지 히토나리의 부인이었다. ▷김광림(1929~2024)
“꽃은 꺾인 대로 화병에 담아 채우면 금시 향기로워 오는 목숨인데
사람은 한번 꺾어지면 그만 아닌가.”
한국 현대시의 모더니즘을 이끈 시인. ▷블라디미르 쉬클리야로프(1985~2024)
‘발레 황태자’로 불리던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 수석무용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정치인은 민간인을 쏘거나 죽이지 않고 협상할 수 있어야 한다.” ▷에릭 카먼(팝 싱어송라이터, 1949~2024)
“12세 때 작곡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늘 존경하던 사람은 레너드 번스타인이다.”
1970년대 파워 팝 장르의 선구적 밴드 ‘라즈베리스’를 이끌었고,
‘올 바이 마이셀프’로 솔로 가수로 큰 성공을 거둔 세기의 아이콘이다. ▷프랭크 스텔라(1936~2024)
“나는 ‘예술에 내 인생을 바쳤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예술이 내 삶을 ‘줬다’고 하고 싶다.”
추상표현주의 시대의 문을 닫고 미니멀리즘의 시작을 알린 거장 ▷앤드루 데이비스(1944~2024)
“오케스트라가 감당할 수 있는 모든 색상의 음악을 들려주고 싶었다.”
BBC 프롬스 폐막 무대를 10여 차례 이끈 ‘英 지휘 명장’ ▷임영웅(연극 연출가·1934~2024)
"고도를 기다리는 우리야말로 인생의 광대다."
1969년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한국에 처음으로 선보이고, 이듬해 극단 산울림을 창단한 한국 연극계 대부. '고도..'는 50여 년간 1500여 회 공연했고, 이외에도 60여 편의 작품을 연출했다. “연극만이 살아있는 느낌을 준다”는 이 땅에 사실주의 연극을 뿌리내리게 했다.
**아르떼 취재팀
임근호 신연수 이해원 김수현 최다은 유승목 안시욱 성수영 최지희 조동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