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얼빈’ 스틸컷.  CJ ENM/하이브 미디어코프 제공
영화 ‘하얼빈’ 스틸컷. CJ ENM/하이브 미디어코프 제공
여기 방황하는 인간이 있다. 만주에서 불어오는 삭풍을 맞으며 꽁꽁 언 두만강을 걷는 서른 살 청년 안중근(현빈)이다. 그는 수없이 지쳐 쓰러진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확신할 수 없어 포기하고 싶다. 하지만 언젠가 올 광복을 위해 그는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묵묵히 발걸음을 옮긴다.

지난 24일 개봉한 영화 ‘하얼빈’의 얼개는 단순하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이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프랭키 릴리)를 처단하러 러시아 하얼빈으로 가는 여정이다. 누구나 아는 역사여서 색다른 것도 없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하면 관객들은 낯선 광경을 보게 된다. 영화 ‘영웅’(2022)을 비롯해 그간 연극, 소설에서 익숙하게 봐온 초인(超人)은 온데간데없고 나약한 인간이 덩그러니 놓여 있어서다.

안중근은 우덕순(박정민), 공부인(전여빈) 같은 조력자가 없으면 거사는커녕 목숨도 장담할 수 없을 만큼 능력도 빼어나지 않다. ‘동양평화론’을 꿈꿨던 그답게 포로로 잡은 일본군을 만국공법에 따라 풀어줬다가 동지들이 목숨을 잃는 비극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감독을 맡아 각본까지 쓴 우민호 감독은 “그간 안중근을 다룬 작품들과 다르게 찍고 싶었다”며 “거사에 성공할지, 성공한다고 해서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마음을 강조하려 했다”고 설명한다.

‘내부자들’(2015), ‘마약왕’(2018), ‘남산의 부장들’(2020) 등 우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대체로 권력, 돈, 출세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찬 악인을 그린 피카레스크적 로망으로 가득했다. 전형적인 선인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건 이번이 처음. 그래서 그를 흥행감독으로 만들어준 전작의 자극적인 연출 대신 건조한 호흡으로 차분하게 절제하는 영화적 도전이 엿보인다. 극단적인 명암 대비와 길게 가져가는 컷, 주연 배우의 단독 클로즈업 대신 여러 인물을 한 화면에 담는 연출 스타일은 다분히 연극적이다.

“한 폭의 명화처럼 찍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바로크 느낌이 짙은 회화적 장면들이 눈에 들어온다. 담배 연기 자욱한 골방에서 안중근을 둘러싸고 격론을 벌이는 독립군의 모습에선 카라바조의 ‘성 마태오의 소명’이 떠오른다. 자꾸만 계획이 틀어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거사를 마치겠다며 최재형(유재명)을 붙잡고 절규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햇빛이 비치지 않는 방 한쪽 어둠 속에 있던 안중근이 창가로 나와 마치 고해성사하듯 최재형 앞에 무릎을 꿇는 모습은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가 연상된다.

개봉 이틀 만에 100만여 명의 관객을 끌어모으며 흥행을 예고했지만, 지루하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다. ‘어떤 역경이 닥쳐도 절대 멈춰선 아니 된다’는 안중근의 내레이션은 비상계엄 사태와 맞물려 비장미를 더하지만, 시종일관 고뇌하는 안중근에게 초점을 맞추다 보니 러닝타임보다 영화가 길다고 느껴진다.

방황하는 인간은 안중근만 있는 게 아니다. 안중근에서 벗어나 시야를 넓히면 영화를 이해하는 해상도가 높아진다. 야망을 품고 독립군에 뛰어들었지만 압도적인 폭력에 굴복해 밀정이 된 김상현(조우진)은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다. 믿음을 갖고 용서해준 안중근과 동지들에게 끝내 보답하는 그의 모습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욕망과 유혹, 고난, 부조리 속에서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유승목 기자 mo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