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과 TV, 가전 생산·판매를 담당하는 삼성전자 디바이스경험(DX)부문 경영진에 요즘 ‘실시간 환율 체크’는 일상이 됐다. 지난 9월 말 달러당 1320원이던 원·달러 환율이 ‘도널드 트럼프 2.0 시대’ 개막과 비상계엄 여파로 석 달 만에 달러당 1459원으로 10.5% 뛰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국내외에서 사들이는 부품 매입액은 연 60조~70조원 수준. 회사 관계자는 “환율 상승으로 대부분 달러로 구입하는 부품값이 대폭 올랐지만 치열한 경쟁 탓에 제품 가격에 반영하기 힘든 상황”이라며 “환율이 10% 오를 때마다 DX부문 손실이 조(兆) 단위로 불어난다”고 말했다.

원·달러 환율이 2009년 금융위기 이후 최고 수준으로 뛰어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국내 주력 기업의 수익성이 떨어지고 있다. ‘스마트폰의 두뇌’로 불리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등 값비싼 핵심 부품을 달러로 들여오는 만큼 환율 상승으로 부품 구입비가 크게 늘어났는데 미국 외 현지 통화로 판매하는 비중이 대폭 높아져 제품 판매 때 환율 효과를 누리지 못해서다.

그동안 국내 수출기업에 환율 상승은 ‘수익성 확대’와 동의어였다. 환율이 10% 오르면 미국에서 1000달러에 스마트폰을 팔 때 손에 쥐는 원화 환산 수익이 그만큼 늘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율 상승=수익성 확대’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공식이 됐다. 전체 매출에서 유럽, 동남아시아, 중남미 등 미국 외 시장 비중이 커진 데다 ‘현지 생산·현지 판매’ 방식이 확산돼서다.

삼성전자의 지난 3분기 미국 외 매출 비중은 71.3%였고, 주요 제품 생산지역도 인도 베트남 등 미국 외 지역이 대부분이다. 제품을 현지 통화로 판매하는 만큼 환율 상승 수혜가 거의 없는데 핵심 부품은 여전히 달러로 구입해 부품 구입비만 늘어나는 ‘역(逆) 환율 효과’에 노출됐다는 얘기다.
치솟는 환율에 원재료비 급등…해외 출장비 40% 절감 '극약 처방'

환율 오르면 兆단위 손실…수출 기업들 '비상 경영'
가격 인상 쉽지 않은 기업들…마케팅비 등 고정비 절감 '사활'

‘고(高)환율 대응 방안’. 최근 LG전자 수뇌부가 총출동한 경영 회의 주제다. 최근 석달간 원·달러 환율이 10.5%(9월말 1320원→25일 1459원)나 뛰면서 달러로 지급하는 물류비와 원재료비가 그만큼 늘어서다. 하지만 일개 기업이 컨트롤할 수 없는 거시 변수인 탓에 장시간 회의에도 뾰족한 수를 찾지 못했다. 결국 LG전자는 해외 출장비를 40% 줄이고 비용이 상대적으로 적게 드는 지역에서 제품 생산을 늘리는 식으로 실적 악화를 방어하기로 했다.

IT 기업 수익성에 비상등

25일 산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 LG전자 등이 최근 개최한 내년 경영 전략회의의 최대 화두는 ‘고환율’이었다. 급격한 원·달러 환율 상승 여파로 수익성에 비상등이 켜졌기 때문이다.

삼성과 LG그룹의 주요 계열사들은 핵심 부품을 주로 해외에서 달러로 구입한다. 스마트폰의 ‘두뇌’ 역할을 하는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를 미국 퀄컴에서 들여오는 삼성전자 모바일경험(MX)사업부가 대표적이다. MX사업부의 연간 AP 구매액은 11조7320억원(2023년 기준)에 이른다. 환율이 10% 오르면 사실상 1조원이 넘는 추가 부담이 생긴다는 얘기다.

해외 공장 투자비도 급증

그동안 원·달러 환율 상승(원화 약세)은 국내 수출 기업에는 호재로 통했다. 같은 가격에 팔면 원화 환산 수익이 늘고, 여의치 않으면 판매가격을 내릴 여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가격을 낮춰 매출이 늘면 ‘규모의 경제’를 활용해 부품 구입 단가를 낮추기도 했다.

하지만 글로벌 생산·판매 구도가 바뀌면서 이런 공식은 옛말이 됐다. 한국 IT 기업이 글로벌 플레이어로 성장하면서 해외에서 생산해 현지 통화로 판매하는 게 일반화됐기 때문이다. 환율이 상승하면 달러로 건네는 핵심 부품의 조달비용만 늘어날 뿐 수익성 확대엔 별다른 효과가 없다는 얘기다.

산업연구원은 지난 3월 발간한 ‘환율 변동이 국내 제조업 기업의 성과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서 “원·달러 환율이 10% 상승하면 대기업 영업이익률은 0.29%포인트 하락한다”고 분석했다. 연구원은 “수출전략이 ‘기술 경쟁’으로 변하면서, 원화 가치 하락에 의한 매출 효과가 사라졌음을 시사한다”고 설명했다.

환율 상승은 원화로 환산한 해외 투자비 부담도 늘린다. 미국에 수백억달러를 들여 공장 건설에 나선 반도체, 배터리 기업들이 ‘속도 조절’을 고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항공·철강 등 환율 직격탄

환율 상승이 ‘짐’이 되는 건 IT 수출기업 뿐이 아니다. 수입산 원자재 비중이 크고 수출 비중이 작은 동국제강과 현대제철에선 “허리가 휠 지경”이란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온다. 환율이 10% 오르면 현대제철은 3000억원, 동국제강은 400억원 가량 손실이 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항공도 환율이 오르면 타격받는 대표 업종이다. 리스비와 유류비 등을 달러로 지출하기 때문이다. 지난 3분기 말 기준으로 33억달러에 달하는 순외화부채를 안고 있는 대한항공은 환율이 10원 오를 때마다 330억원의 외화평가손실을 입는다. 유지류 등 원재료 가격 상승에 더해 원·달러 환율까지 급등하면서 식품업계도 비상이 걸렸다. 대부분의 식자재를 수입하는 국내 식품업계 생산 원가에서 원재료 가격이 차지하는 비중은 60~70%에 이른다.

통상 기업들은 원가 부담이 커지면 제품 가격을 올려 대응하지만, 요즘엔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해외 기업과의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소비 시장마저 위축돼서다. 전자업체 관계자는 “지금 판매가를 올리는 건 자살골을 넣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래서 기업마다 고육지책으로 택하는 게 고정비 절감이다. 삼성전자, LG전자 등 해외 출장자가 많은 기업은 필수 인력만 보내는 식으로 비용 절감에 나섰다.

황정수/하헌형/성상훈/신정은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