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존엄성을 지키며 산다는 것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쓴 작가이며 철학자인 페터 비에리는 저서 <삶의 격>에서 ‘존엄’을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특정한 방식으로 정의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남을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의 세 가지 차원에서 자신에게 자문하는 데서 존엄이 인식된다고 했다.

인간은 자신의 존엄성을 해친다고 느끼는 사건을 겪으면 그 사건으로 잃어버린 주체를 찾기 위해 발버둥 친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 삶을 가로막는 방해물은 언제든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가 존엄을 지키지 못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압박한다. 이런 조건 속에서 되고 싶은 자기 모습을 지향하는 과정이 바로 삶이다. 그러므로 ‘존엄’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영화 ‘소수의견’으로 신인감독상과 각본상을 휩쓴 김성제 감독이 만든 ‘보고타’는 ‘1997년 국가는 부도가 났다’라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라는 폭풍을 피하지 못한 스무 살 국희(송중기 분)와 그의 가족은 지구 반대편 콜롬비아 보고타로 향한다. 베트남전 참전용사인 아버지 송근태(김종수 분)는 그가 박 병장(권해효 분)이라고 부르는 한인 상인회의 권력을 쥔 자를 찾아가 그에게 의지하고자 한다. 하지만 ‘우리는 전우 아닌가’라는 아버지의 말에도 박 병장의 태도는 냉담하다.

아무런 능력도 인정받지 못하고 내쳐진 아버지를 보며, 낯선 땅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존엄성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체감한 국희는 바로 박 병장에게 굽히고 그의 밑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다. 죽기 살기 근성으로 박 병장의 눈에 띈 국희는 박 병장의 테스트로 의류 밀수 현장에 가담하게 된다. 그리고 콜롬비아 세관에 걸릴 위기 상황 속에서 목숨 걸고 박 병장의 물건을 지켜낸다. 이 일은 박 병장은 물론 통관 브로커인 수영(이희준 분)도 국희를 신뢰하게 한다. 국희가 맡게 된 일은 위험천만의 부담이 있지만, 잘만 해내면 보고타 한인 사회의 판도를 바꿀 수 있음을 체감한 국희는 하나하나 장애물을 넘어서며 더 큰 성공을 지향하게 된다. 국희는 점차 위험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고, 배신의 드라마는 파국을 향한다.

자신의 주체와 존엄을 지키기 위한 국희의 선택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 우리는 삶에서 이룬 결과와 그것을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를 저울질해 볼 때 과연 무엇을 위한 결과인가 하는 아이러니에 봉착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비장한 삶은 존엄성보다 결과에 치중하도록 한다. 비에리가 말한 ‘삶 속에서 가장 위협받기 쉬운 가치’인 삶의 존엄성을 지켜나가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 것인가. ‘존엄’이라는 양날의 검은 매 순간 삶의 현장에서 우리를 칼날 위에 서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