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26일 대국민 담화를 위해 정부서울청사 브리핑룸으로 들어오고 있다. /김범준 기자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26일 대국민 담화를 위해 정부서울청사 브리핑룸으로 들어오고 있다. /김범준 기자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사진)은 26일 “여야가 합의해 안을 제출할 때까지 헌법재판관 임명을 보류하겠다”고 밝혔다. 야당이 단독으로 헌법재판관 국회 선출안을 처리한 상황에서는 임명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의미다. 이에 반발한 더불어민주당은 한 권한대행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발의했다.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권한대행 탄핵이 현실로 다가오자 행정부 기능이 사실상 마비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한 권한대행은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대국민 담화를 열어 “우리 역사를 돌아볼 때 여야 합의 없이 임명된 헌법재판관은 단 한 분도 안 계셨다”며 “여야가 합의해 안을 제출하면 즉시 헌법재판관을 임명하겠다”고 말했다. 야당은 이날 마은혁·정계선·조한창 헌법재판관 후보자 세 명의 국회 선출안을 본회의에서 단독 처리하고 한 권한대행에게 즉시 임명할 것을 요구했다.

"권한대행도 탄핵"…국정마비 초읽기
한 권한대행은 “대통령 권한대행은 헌법기관 임명을 포함한 대통령의 중대한 고유 권한 행사는 자제하라는 것이 우리 헌법과 법률에 담긴 일관된 정신”이라며 “만약 불가피하게 이런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면 국민의 대표인 국회에서 여야 합의가 먼저 이뤄지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 헌정사에서 단 한 번도 깨진 적 없는 관례”라고 설명했다.

담화 직후 민주당은 “권한대행이 아니라 내란대행임을 인정한 담화였다”며 한 권한대행 탄핵소추안을 발의했다. 이날 본회의에 보고된 탄핵안은 27일 본회의에서 표결에 부쳐질 전망이다. 다만 국회의장실이 이날 의결 정족수에 대해 “151석으로 확정한 바 없다”고 밝혀 본회의 상정이 보류될 가능성도 있다. 국민의힘은 여전히 권한대행 탄핵 의결 정족수가 대통령과 같은 ‘재적 의원 3분의 2(200명) 찬성’이라는 입장이다.

탄핵 압박에도…韓 "여야 합의 없이 임명된 헌법재판관 없었다"
합의만이 민주적 정당성 확보…국민통합 이끌 '마지막 둑' 강조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더불어민주당의 탄핵소추를 감수하면서 헌법재판관 임명을 보류한 것은 ‘정치적 사안은 정치권이 풀어야 한다’는 인식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민에게 선출되지 않은 대통령 권한대행이 ‘현상 유지’를 넘어서 첨예한 정치적 사안까지 결정하는 것은 헌정 질서상 부적절하다는 의미다. 26일 대국민 담화에서 ‘여야 합의’라는 단어를 여덟 번이나 꺼낸 것도 이런 인식을 반영한 것이란 설명이다.

○“여야 합의 우선돼야”

한 권한대행은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담화에서 헌법재판관 임명 보류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그는 우선 “권한대행은 헌법기관 임명을 포함한 대통령의 중대한 고유 권한 행사는 자제하라는 것이 우리 헌법과 법률에 담긴 일관된 정신”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2017년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사례를 언급했다. 한 권한대행은 “당시에도 헌재의 탄핵심판 결정에 영향을 주는 임명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헌재 결정 전에는 헌법재판관 임명을 하지 않았고 결정이 나온 뒤 임명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권한대행이 대통령의 중대한 고유 권한을 행사하기에 앞서 여야가 합의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시간을 들여 사법적 판단을 기다릴 만한 여유가 없을 때 국민의 대표인 여야의 합의야말로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국민의 통합을 이끌어낼 수 있는 마지막 둑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 권한대행은 우원식 국회의장, 권영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이재명 민주당 대표 이름을 거론한 뒤 “여야 정치인들이 반드시 그런 리더십을 보여주실 것이고 또 보여줘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고 말했다.

○여야 정국 가시밭길

한 권한대행의 임명 보류를 두고 정무적 판단이 작용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야당이 그간 말로만 경고해 온 권한대행 탄핵 카드를 실제로 꺼내 들면서 여당과의 관계마저 깨지면 안 된다는 인식이 영향을 미쳤다는 설명이다. 국민의힘은 권한대행에게 헌법재판관 임명 권한이 없다며 인사청문회와 국회 표결을 보이콧해왔다. 한 권한대행은 실제로 담화에서 “야당은 여야 합의 없이 헌법기관 임명이라는 대통령의 고유권한을 행사하라고 권한대행을 압박하고 있다”고 야당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번 헌법재판관 임명 보류는 향후 정국 방향을 결정짓는 요인이 될 전망이다. 이날 한 권한대행 탄핵소추안을 발의한 민주당은 27일 본회의에서 표결에 부친다는 방침이다. 여야는 벌써부터 권한대행의 탄핵 의결 정족수를 놓고 이견을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권한쟁의심판 등 법적 다툼이 벌어질 가능성이 적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이 재판관 ‘6인 체제’로 이뤄질 가능성이 커진 것도 민주당으로선 부담이다. 재판관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탄핵이 기각되기 때문이다.

○탄핵 가시화에 충격 휩싸인 정부

사상 초유의 권한대행 탄핵이 가시화되면서 정부 부처는 혼란에 빠졌다. 탄핵 카드가 현실화하면 다음 대통령 권한대행은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넘어간다. 문제는 최 부총리가 권한대행까지 떠안게 될 경우 경제팀 컨트롤타워 부재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다는 점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계엄 이후에도 당장 금융·외환시장에 큰 영향이 없었던 것은 경제팀이 빠르게 움직인 영향이 컸다”며 “경제를 담당하는 부총리가 외교·국방까지 맡게 되면 경제 집중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당장 다음주 발표를 앞둔 2025년도 경제정책 방향에 차질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경제정책과 시장 관리에 주력해야 할 기재부가 국정 전반을 관리해야 한다는 점도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한은 부총재를 지낸 이승헌 숭실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국내 기업과 가계도 혼란스럽겠지만 무엇보다 외국인 투자자가 동요하고 있다”며 “투자자들이 최 부총리를 중심으로 한 경제팀의 정책 역량을 안심하고 믿을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양길성/강경민 기자 vertig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