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밤
김동환

–제1부
1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탈 없이 건넜을까?

저리 국경 강안(江岸)을 경비하는
외투 쓴 검은 순사가
왔다- 갔다-
오르명 내리명 분주히 하는데
발각도 안 되고 무사히 건넜을까?”

소금실이 밀수출 마차를 띄워 놓고
밤새가며 속 태우는 젊은 아낙네,
물레 젓던 손도 맥이 풀려서
‘파!’ 하고 붙는 어유(魚油) 등잔만 바라본다.
북국의 겨울밤은 차차 깊어 가는데.

2
어디서 불시에 땅 밑으로 울려 나오는 듯,
“어-이!” 하는 날카로운 소리 들린다.
저 서쪽으로 무엇이 오는 군호(軍號)라고
촌민들이 넋을 잃고 우두두 떨 적에,
처녀(妻女)만은 잡히우는 남편의 소리라고
가슴 뜯으며 긴 한숨을 쉰다.
눈보라에 늦게 내리는
영림창 산림실이 벌부(筏夫) 떼 소리언만.

(이하 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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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고두현의 아침 시편]
매서운 한파 속의 두만강 국경지대. 설을 쇨 돈을 구하러 소금 밀수출에 나선 남편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하는 젊은 아낙. 첫 문장부터 ‘아하’라는 영탄조의 불안 심리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국경 순사가 ‘왔다– 갔다–’ 하는 모습과 ‘파!’ 하고 붙는 어유 등잔에도 화들짝 놀라는 여인의 심정은 어떨까요. “어–이!” 하는 날카로운 소리에 행여 남편이 잡혔을까 ‘가슴 뜯으며’ 긴 한숨을 쉬는 모습이 애처롭습니다. 여기서 ‘처녀(妻女)’는 미혼의 처녀(處女)가 아니라 젊은 아낙네를 의미합니다.

김동환(1901~?)의 ‘국경의 밤’은 모두 3부 72장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1부에서 남편을 걱정하는 순이의 심리적 갈등에 이어 2부에는 순이와 남편, 그녀의 첫사랑 청년 이야기가 회상 형식으로 펼쳐집니다. 3부는 그 청년이 나타나 재결합을 호소하지만 이를 거절하는 순이와 마적의 총에 희생된 남편의 장례로 구성돼 있습니다.

그 배경에는 북국의 겨울밤이라는 암울한 이미지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일제 치하 우리 민족의 고통과 불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최초의 서사시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1920년대 초까지 서정시로 일관한 한국 현대시사에 이야기를 도입한 새로운 시도였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물론 반론도 있지요. 괄목할 만한 시적 성과를 거둔 것은 분명하나 서사시 본연의 영웅적 주인공을 창출하지 못하고 서사시다운 장중함도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8년 전 신분 차이로 헤어진 첫사랑이 혹한을 뚫고 먼 국경 지역까지 순이를 찾아오는데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지체 높은 집안 출신으로 서울에서 공부하며 신문물을 접한 그가 “당신이 없다면 8년 후도 없고 세상도 없다”며 유부녀가 된 시골 순이를 찾아와 절절하게 구애하는데, 왜 그렇게 매정한 태도를 보였을까요. 정절을 목숨보다 중시하는 유교 이데올로기 때문일까요.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순이의 핏줄은 놀랍게도 여진족입니다. 여진족의 후예로 혹독한 현실에서 생존 감각을 익힌 순이는 이 사랑이 비현실적인 ‘환영’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1920년대 조선의 청년 지식인, 허울뿐인 근대를 바라보는 식민지 시인의 시선이 여기에 겹쳐지는군요. 참으로 암울한 시대의 애달픈 사연입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