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의 9번 교향곡은 초연 이후 고매한 정치적 역할을 부여받았다. 1,2차 세계대전과 전 세계 혁명의 현장 그리고 올림픽에 이르기까지 현대사의 주요 장면에서 연주됐다. 특히,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난 직후인 1989년 12월 25일에는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이 레너드 번스타인의 지휘로 환희의 송가를 연주했는데, 이때는 ‘환희’가 ‘자유’로 바뀌어 불려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9번 교향곡의 모태가 된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환희의 송가(Ode An die Freude)’의 본래 제목이 ‘자유의 송가(Ode An die Freiheit)’였다는 해석도 있다. 프로이센 군주정의 검열을 피하고자 출간 직전 ‘자유’를 ‘환희’로 고쳤다는 것이다.
사진. ⓒjiseok 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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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너드 번스타인은 환희의 송가가 작곡된 지 200년이 된 해를 기념해 뉴욕타임스에 칼럼을 기고하면서 “베토벤이 정치 문제에 많은 관심을 둔 활동가는 아니지만, 그의 걸작은 정치적으로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며 “베토벤은 가장 광범위한 의미에서 정치적인 인물”이라고 말했다. 정치는 평화와 번영을 이루기 위해 투쟁하는 고상한 인간의 행위라는 점에서 말이다. 베토벤 교향곡은 합창을 비롯해 악단의 각 파트가 오롯이 자신의 소리에 집중하면서도 치밀하게 조화를 구성해나가야 하는,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논리를 가진 곡이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적인 부분을 차치하고서라도 9번 교향곡은 손에 꼽는 정치적인 음악이다.

한경 아르떼 필하모닉이 지난 2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연말을 맞아 준비한 베토벤 9번 교향곡 연주에서 지휘봉을 든 것은 홍석원이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티롤 주립극장 수석 카펠마이스터로 경력을 쌓기도 했는데, 국내 지휘자로는 드물게 오케스트라, 합창 등 경계를 넘나들며 레퍼토리를 늘려가고 있다. 평화와 번영을 위한 이 교향곡 연주에 있어 음표를 가장 잘 조율할 수 있는 지휘자가 지휘대에 오른 것이다.

잘 준비된 오케스트라여도 환희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예열이 필요하다. 우선, 관악기의 팡파레로 힘차게 시작한 베르디의 <운명의 힘> 서곡에서는 금관의 힘찬 합주와 섬세한 목관 파트의 독주가 대비되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절도 있고 박력 있게 몰아부치는 오케스트라의 사운드는 이날의 공연이 전반적으로 어떻게 흐를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했다. 이어진 구노의 <아, 꿈속에 살고 싶어라>를 부른 소프라노 이혜정은 앞선 오케스트라의 연주처럼 여린 저음과 대비되는 선명한 고음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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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 전승현의 <험담은 미풍처럼>과 백재은의 <하바네라>는 오페라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생동감 있는 노래와 안무로 객석까지도 예열했다. 그 감동을 강조하기 위해 두 성악곡 사이에 연주된 마스카니의 간주곡은 담백함을 유지하고 극적인 변화를 최소화하는 데 중점을 뒀다. 전반부의 마지막 곡인 <공주는 잠 못 이루고>에서 테너 김재형이 울려 퍼트린 청아하고 청명한 음색은 오케스트라마저 취하게 만든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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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위기에 너무 치우치지 않게, 후반부의 베토벤 9번 교향곡 연주에서 오케스트라는 1악장의 연주부터 섬세함보다 선명함을 내세웠다. 본디 탄생의 순간을 노래하는 만큼 미약한 소리로 극적인 변화를 주는 기존의 해석과는 차별화된 접근이었다. 본격적인 주제 연주가 시작되자 오케스트라의 각 파트는 템포를 올렸다. 지휘자 홍석원은 음의 강약보다는 각 파트 간의 절묘한 완급 조절로 긴장감을 조성하며 관객의 몰입을 자아냈는데, 마치 태초의 순간부터 환희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 같았다.

충분히 예열되고 속도가 붙은 오케스트라는 2악장으로 넘어가며 힘찬 연주를 이어갔다. 팀파니의 높고 선명한 음에 뒤지지 않는 현악 파트의 뚜렷한 음색이 환희로의 여정을 더욱 힘차게 이끌었다. 관악기들도 그 열기에 휩싸여 아슬아슬하게 화음을 쌓아갔는데, 특히 목관 악기들이 발군의 연주로 균형감을 유지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앞서 보여준 생동감 있는 표현과 적극적인 연주는 세밀한 표현이 중요한 3악장에서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듯했다. 절제된 연주(Mezza Voce)라는 지시가 있는 바이올린의 첫 번째 주제 연주가 힘이 넘치다 보니, 보다 표현력을 강조해야 하는(Espressivo) 두 번째 주제와의 대비가 아쉬웠다.

하지만 마지막 악장의 연주가 시작되면서 그동안 오케스트라가 만들어온 사운드가 이해됐다. 차분함보다는 극적인 표현으로 긴장감을 만들어온 것이다. 공포스러운 팡파레가 시작을 알리자, 콘트라베이스와 첼로가 응답하며 오케스트라는 클라이맥스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마치 이 악장을 위해 달려온 것처럼 홍석원은 지휘봉을 흔들었고, 오케스트라는 군무를 추듯 강한 에너지를 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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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 전승현의 깊이 있는 울림은 그 군무에 못지않은 강렬함으로 합창의 시작을 알렸다. 대단원에 이르러 4중창과 합창, 오케스트라가 환희의 송가를 울려대니, 마치 행진곡을 연주하듯 시종일관 이어진 강한 에너지가 극에 달했다. 마치 어느 오페라의 가장 화려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이 장면은 홍석원의 지휘가 가장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베토벤 9번 교향곡이 유독 연말마다 자주 울려 퍼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하지만 대부분이 환희와 자유를 위한 투쟁의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전하는 레퍼토리로 이만한 곡이 없다는 말로 귀결된다. 각각의 멜로디가 어우러지며 우주의 탄생과 삶의 즐거움을 노래하고, 때로는 치열하게 경쟁하고 서로를 뽐내며 환희의 주제로 달려 나갈 때 청중들은 말로 전하지 못할 위로를 받는다.

지휘자 홍석원이 양손으로 지휘봉을 높게 든 순간,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은 각자 그리고 함께 환희를 노래했다. 그 순간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된 환희가 박수 소리로 바뀌어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반복되는 연말의 레퍼토리라 할지라도, 이 순간은 늘 새롭게 감격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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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