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유럽인이 즐겨 먹은 생선 '대구'…세계 역사를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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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마크 쿨란스키 지음 / 박중서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 380쪽|2만8000원
대구 통해 세계사 조명한 명저
바이킹 대이동·노예무역 활성화
배타적 경제수역 선포 등 이끌어
마크 쿨란스키 지음 / 박중서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 380쪽|2만8000원
대구 통해 세계사 조명한 명저
바이킹 대이동·노예무역 활성화
배타적 경제수역 선포 등 이끌어
캐나다 동부 대서양 연안에 있는 섬 뉴펀들랜드에는 바이킹 거주지의 유적이 있다. 10세기께 바이킹은 스칸디나비안 반도를 떠나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거쳐 북아메리카 섬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약 500년 전이다.
이들이 항해한 경로는 정확하게 대서양 대구의 서식 범위와 같았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그들은 대구 어족을 발견하고 그걸 잡아서 추운 바람에 말려 대구를 오래 보존했다. 이들이 북대서양과 유럽 일대를 주름잡으며 먼 항해를 할 수 있던 것은 대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간 <대구>는 바이킹의 대이동이 있던 8세기부터 최근까지 인류와 함께한 대구의 연대기를 세계사 흐름과 함께 풀어낸다. 어부 집안 출신으로 대구잡이 어선에 승선한 경험이 있는 마크 쿨란스키는 7년간 시카고트리뷴 카리브해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해 이 책을 썼다.
한때 요리사로서 일한 그는 각 장이 끝날 때마다 다양한 국가의 대구 요리법을 소개한다. 이 책은 1997년 미국에서 초판이 출간되자마자 수많은 찬사를 받으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의 감수를 더해 재출간됐다.
다른 생선에 비해 커다랗고 번식이 왕성한 대구는 머리부터 알, 위, 간, 껍질까지 식용으로 사용되기에 유럽인들에게 식재료로 인기를 끌었다. 대구를 둘러싼 유럽 국가의 경쟁이 심해졌고, 대구 어획을 둘러싼 치열한 갈등이 이어졌다.
15세기 영국, 한자동맹 등 유럽 국가들은 북대서양 대구 어장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하지만 스페인 북부의 바스크인은 이들과 충돌 없이 유유히 대서양 멀리에서 말린 대구를 가져왔다. 콜럼버스 이전에 이미 뉴펀들랜드를 발견해 대구를 그곳에서 말렸다. 프랑스인들이 1534년 캐나다 동해안에 도착해 자기네 땅이라고 선언할 때 바스크 어선 1000척이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 바스크인들은 그들의 영업비밀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그곳이 자기네 땅이라고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아메리카 대륙 연안 대서양에서 엄청나게 잡히던 대구는 결과적으로 노예무역의 활성화에 한몫했다. 중노동을 견디기 위해서는 단백질과 소금이 필요했다. 소금에 절인 대구는 노예에게 값싸게 먹일 수 있는 양질의 영양 공급원이었다. 영국 식민지였던 미국은 카리브해에 대구를 수출하면서 독립적인 무역지대로 성장했다. 이를 달가워하지 않던 영국이 1700년대 대구 무역을 제한하는 법을 만든 게 미국 독립전쟁 발발의 원인 중 하나다.
산업혁명의 발달로 어업 기술이 발달하자 대서양의 대구 개체수는 급감했다. 아이슬란드와 영국은 대구 어업권을 둘러싸고 세 차례에 걸쳐 ‘대구 전쟁’을 벌였다. 이는 세계 각국이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을 선포하는 계기가 됐다.
1000년간 이어진 대구 어업은 이제 끝물로 가고 있다. 남획으로 인해 이제 대구를 먹을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했던 어종인 대구가 인간의 욕심에 의해 사라지고 있다. 저자는 자연의 선물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경고하면서 책을 마친다.
최종석 기자 ellisica@hankyung.com
이들이 항해한 경로는 정확하게 대서양 대구의 서식 범위와 같았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그들은 대구 어족을 발견하고 그걸 잡아서 추운 바람에 말려 대구를 오래 보존했다. 이들이 북대서양과 유럽 일대를 주름잡으며 먼 항해를 할 수 있던 것은 대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간 <대구>는 바이킹의 대이동이 있던 8세기부터 최근까지 인류와 함께한 대구의 연대기를 세계사 흐름과 함께 풀어낸다. 어부 집안 출신으로 대구잡이 어선에 승선한 경험이 있는 마크 쿨란스키는 7년간 시카고트리뷴 카리브해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해 이 책을 썼다.
한때 요리사로서 일한 그는 각 장이 끝날 때마다 다양한 국가의 대구 요리법을 소개한다. 이 책은 1997년 미국에서 초판이 출간되자마자 수많은 찬사를 받으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의 감수를 더해 재출간됐다.
다른 생선에 비해 커다랗고 번식이 왕성한 대구는 머리부터 알, 위, 간, 껍질까지 식용으로 사용되기에 유럽인들에게 식재료로 인기를 끌었다. 대구를 둘러싼 유럽 국가의 경쟁이 심해졌고, 대구 어획을 둘러싼 치열한 갈등이 이어졌다.
15세기 영국, 한자동맹 등 유럽 국가들은 북대서양 대구 어장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하지만 스페인 북부의 바스크인은 이들과 충돌 없이 유유히 대서양 멀리에서 말린 대구를 가져왔다. 콜럼버스 이전에 이미 뉴펀들랜드를 발견해 대구를 그곳에서 말렸다. 프랑스인들이 1534년 캐나다 동해안에 도착해 자기네 땅이라고 선언할 때 바스크 어선 1000척이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 바스크인들은 그들의 영업비밀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그곳이 자기네 땅이라고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아메리카 대륙 연안 대서양에서 엄청나게 잡히던 대구는 결과적으로 노예무역의 활성화에 한몫했다. 중노동을 견디기 위해서는 단백질과 소금이 필요했다. 소금에 절인 대구는 노예에게 값싸게 먹일 수 있는 양질의 영양 공급원이었다. 영국 식민지였던 미국은 카리브해에 대구를 수출하면서 독립적인 무역지대로 성장했다. 이를 달가워하지 않던 영국이 1700년대 대구 무역을 제한하는 법을 만든 게 미국 독립전쟁 발발의 원인 중 하나다.
산업혁명의 발달로 어업 기술이 발달하자 대서양의 대구 개체수는 급감했다. 아이슬란드와 영국은 대구 어업권을 둘러싸고 세 차례에 걸쳐 ‘대구 전쟁’을 벌였다. 이는 세계 각국이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을 선포하는 계기가 됐다.
1000년간 이어진 대구 어업은 이제 끝물로 가고 있다. 남획으로 인해 이제 대구를 먹을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했던 어종인 대구가 인간의 욕심에 의해 사라지고 있다. 저자는 자연의 선물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경고하면서 책을 마친다.
최종석 기자 ellisic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