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이 세상의 축소판이다. 선생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아이들은 선생의 교육에 따르는 게 규칙이다. 규칙은 학교의 시스템이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는 최소한의 강제권이다. 여기서 강제권이란 아이들이 보호받을 수 있는 자율권의 마지노선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다. 하지만 그 경계는 모호해서 종종 이를 두고 갈등이 벌어지고는 한다.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는 바로 이 경계를 두고 발생한 어른들 간의 대립과 충돌에 관한 겨울비처럼 싸늘한 보고서다.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의 원제는 ‘아르망(Armand)’으로 극 중 엘리자베스(레나테 레인스베)의 초등학교 저학년 아들이다. 아르망은 얼마 전 친하게 지내는 친구와 사이가 틀어지면서 폭행 사건의 가해자로 몰렸다. 이 때문에 학교에 호출된 엘리자베스는 아르망의 의견은 듣지도 않고 왜 가해자로 몰아붙이냐며 화를 내고 피해를 주장하는 아이의 부모는 어이없어한다. 그 가운데서 어떻게든 일이 더 커지지 않게 중재하려던 담당 선생은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하면서 예상치 못하게 터뜨리는 양측의 폭로 앞에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영화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교육 현장에서 벌어지는 아이들끼리의 갈등과 폭력, 이 사태가 더 커지기를 바라지 않는 학교 측의 소극적인 대응, 상대 아이가 어떻게 되든 내 아이만은 지켜야 한다는 부모의 이기심 등은 한국 사회 또한 몸살을 앓고 있는 문제라 익숙한 배경이다. 이 영화를 다루는 하프단 울만 톤델 감독의 비전은 다른 데 있다. 제목의 ‘아르망’이 극 중에 실제로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것처럼 출구를 찾지 못하는 학교 폭력의 현실을 고발하는 대신 아르망이 연루된 사건으로 각자의 마음속에 펼쳐지는 관련 인물들의 검은 심리의 지옥도를 묘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제7의 봉인>(1957)으로 유명한 잉마르 베리만 감독과 그의 영화 <페르소나>(1966) <가을 소나타>(1978) 등에 출연했던 리브 울만의 손자인 하프단 울만 톤델은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의 주제와 관련해 “이 영화는 우리가 사람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작은 정보의 파편만을 활용하는지에 관한 것”이라고 밝혔다. 영화 쪽 일을 하기 전 초등학교에서 근무했던 하프단 울만 톤델은 어느 날 아이들끼리의 다툼을 목격했고 그때 한 아이의 공격적인 언행에 충격을 받으면서 그를 중심에 둔 주변 관계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성한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로 하프단 울만 톤델은 2024년 칸국제영화제에서 데뷔작만을 대상으로 한 황금카메라상 부문에서 최고상을 받으며 이목을 끌었다. 그 전에 감독의 재능을 알아본 이는 엘리자베스로 출연한 레나테 레인스베이었다. 한국 관객에게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2022)의 주인공으로 낯익은 배우다. 레나테 레인스베와 하프단 울만 톤델은 <사랑할 때 누구나 최악이 된다>에서 배우와 조감독으로 관계를 맺었다. 이를 계기로 레나테 레인스베는 하프단 울만 톤델이 데뷔작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실을 알고는 제작자로도 참여했다.

레나테 레인스베가 연기한 엘리자베스는 아들의 가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몰염치한 엄마 이미지로 출발하지만, 이 영화는 앞서 언급한 대로 사안을 이분법으로 판단하지 않는 까닭에 관객이 그녀를 이해할 수 있는 여지의 배경이 상당수 등장한다. 피해자의 엄마로 등장하는 사라(엘렌 도리트 페테르센)는 엘리자베스의 남편 토마스의 여동생이고, 사라의 남편 앤더스(엔드레 헬레스트베이트)는 자식의 피해가 안타까우면서도 엘리자베스를 향한 남다른 감정으로 중간에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거기에 얼마 전 토마스가 자살인지, 타살인지 명확하지 않은 사고로 사망한 일도 아르망이 연루된 일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데 변수로 작용한다.
영화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이들의 복잡한 관계는 사적인 감정을 유발하는 촉매제로 작용해서 학교 폭력의 참담한 현실로 출발한 영화는 이내 자신의 입장에 맞춰 사건을 재해석하고 왜곡하는 등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어른들의 감정싸움으로 번져 결과를 내기는커녕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무한 회전의 미로 속에서 헤매는 양상으로 진행된다. 예컨대, 사라는 엘리자베스가 배우라는 사실을 들어 그녀의 감정과 행동이 모두 연기라며 주관적인 의견을 제시해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하고 중재자로 나선 선생 순나(테아 람브레히트 바울렌)는 사건과 그에 반응하는 부모들의 감정을 감당하기 힘들었는지 비밀로 해야 할 일을 주변에 알려 학교 전체에 사건을 퍼트린다.

아직 생각이 여물지 않은 아이들이야 그렇다고 해도 이와 관련한 어른들의 반응 또한, 그들 나이에 견주어 성숙함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오히려 감정에 직접적인 아이들이 솔직한 것과 다르게 자신과 가족에 유리한 쪽으로 계산적인 어른들의 반응이 위선적으로 느껴진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의심해야 할 부분은 선생의 주장처럼 아르망과 친구가 연루된 사건을 폭력의 관점에서만 접근해야 하는가, 라는 점이다. 혹시 아르망과 친구는 어른들이 바라보는 것과 다른 특별한 관계가 아니었을까? 아르망이 일부러 눈에 띄는 행위를 통해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모를 일이다. 눈여겨봐야 할 건 어른들이 아르망과 친구의 관계에 대해 이해하려는 의도보다는 이를 계기 삼아 서로에게 담아뒀던 묵은 감정을 풀어내려 대립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극 중 학교라는 공간은 뒤틀린 어른들의 심리를 물리적으로 표현한 것 같은 상징성을 갖는다. 복도를 걷는 또각또각 발소리가 초조한 심리를 드러내는 심장박동과 같은 효과를 내고, 인물을 비추는 카메라는 약간 비틀어져 있어 비뚤어진 심보를 드러내는 듯하다. 환한 외부와 다르게 공간이 구획되어 있어 폐쇄된 느낌을 주는 내부는 어둠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퍼져 있어 의도를 파악하기 힘든 인물들의 마음속을 구체화한 듯하다.
영화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이런 환경에서 진실을 좇는다는 건 무의미하다. 대신 남는 건 쉽게 답하기 힘든 회색빛 질문이다. 누구의 말이 진실이고, 거짓인가? 아르망은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아르망과 친구 사이에 있었던 일은 폭력인가, 그들만의 은밀한 놀이인가? 엘리자베스와 앤더스는 단순한 친척 사이일까, 아니면 부적절한 관계일까? 등등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가 제기하는 질문은 난제에 가까울 정도로 판단하기 어렵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과 그곳에서 맺은 인연에 영향받는 까닭에 갈수록 복잡해지고 특히 고도로 조직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이해관계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 심리와 관계를 규정하는 일은 미로를 헤매는 경우와 비슷해졌다.
영화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그게 사람이고, 인간관계의 핵심이다. 선과 악, 흑과 백 그사이에 존재하는 가치, 하프단 울만 톤델은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를 만들면서 “‘경계’라는 개념과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깊이 탐구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라고 전한다. 덧붙여, “우리에게 옳고 그름 사이의 경계가 이렇게까지 불분명했던 적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이토록 상반되는 개념들이 이렇게 가까이 공존했던 적이 있었을까요?” 그 자신 또한 답을 구하지 못하는 의문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관객과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학교를 배경으로 하되 한정된 공간에만 머물지 않고 이 사회를 포괄해 인간 존재를 탐구한다.

[영화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 메인 예고편]


허남웅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