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리스트가 확실히 제너널리스트보다 좋은 점이 많다 [이윤학의 일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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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머니이스트
열 네번째 이야기
열 네번째 이야기
커리어가 꼭 계획대로 흘러가진 않습니다. 운명처럼 스페셜리스트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멕시코 출신 화가 프리다 칼로는 원래 의사를 꿈꾸며 의과대학 예비 과정을 밟던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다 18세에 교통사고로 크게 다쳐 병원에서 긴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때 우울과 고립감을 이겨내고자 그림을 그렸고, 거기서 자신감을 얻어 화가의 길에 들어섰지요. 그에게 화가라는 꿈은 미리 계획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면 어릴 때부터 꿈꾸던 일로 스페셜리스트가 된 사람도 있지요. 소설 '해리 포터' 시리즈를 쓴 조앤 롤링이 그렇습니다. 롤링은 영국 웨일스의 작은 시골 마을에 사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상상력이 풍부하고 이야기를 좋아했지요. 그녀의 부모는 어린 롤링에게 시간 날 때마다 책을 많이 읽어 줬는데, 그녀는 이야기를 듣는 것뿐 아니라 만들어 내는 것도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롤링의 삶이 순조롭지만은 않았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에 지원했으나 떨어진 뒤 엑시터 대학으로 진학합니다. 대학 졸업 후 비정규직 비서로 일하다 해고당했으며 가정 폭력으로 순탄치 못했던 결혼 생활을 뒤로하고 결국 이혼해 워킹맘이자 싱글맘으로 힘들게 살아갑니다. 롤링은 생후 4개월 된 딸과 에든버러에 초라한 방 한 칸에서 머물렀습니다. 일자리가 없어 1년 동안 주당 약 10만원의 정부 생활 보조금으로 살아갑니다. 딸에게 줄 분유가 부족해 맹물밖에 주지 못한 적도 있고, 자신도 굶는 일이 허다했다고 하지요. 그래도 그녀는 작가라는 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녀는 스페셜리스트가 되기 위해 끊임없는 글쓰기와 자기훈련을 했습니다. 그녀는 작은 카페에서 딸을 유모차에 태우고 글을 쓸 정도로 치열했습니다. 자신의 글쓰기 실력을 향상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연습하고, 다양한 이야기와 캐릭터를 창조하는 등 자기 스타일과 능력을 발전시켰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철저한 연구로 방대한 세계관을 구축했습니다. 마법과 신화, 역사 등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해리포터 세계를 설계했습니다. 서로 다른 캐릭터, 장소, 마법 등을 매우 정교하게 설정했는데, 이렇게 특별한 세계관 구축은 독자들이 해리포터 세계에 깊이 몰입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롤링은 자기 신념과 끈기로 어려움을 극복했습니다. 첫 번째 해리포터 책인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출판할 무렵, 여러 출판사에서 거절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가 가치가 있다고 믿었고, 끈기를 가지고 계속해서 출판사를 찾았습니다. 결국, '블룸즈버리' 출판사에서 책을 출판하게 되었고, 이는 엄청난 성공으로 이어졌지요. 그녀는 실패 속에서도 그녀 자신을 단단하게 만들었고 하나에 집중해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프리다 칼로처럼 우연한 계기로 스페셜리스트가 되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무슨 인생의 혜안을 가지고, 먼 미래는 이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계획하고 준비해서 되었던 것도 아닙니다. 대부분은 롤링처럼 꿈을 포기하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평균 이상의 인내심을 갖고, 깊고도 깊게 팔 때 비로소 스페셜리스트가 됩니다. 때때로 평균 이상의 열정과 애정을 갖고 묵묵히 일할 때, 운명 같은 기회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제 후배 중에 프로그래머 출신 금융상품 전문가가 있습니다. 지방대를 나와서 중소기업에 프로그래머로 입사했습니다. 그런데 그 회사가 제가 일하던 대형 증권회사로부터 용역을 받게 됩니다. 당시 저는 금융 상품 관련 시스템을 개발하던 중이었는데, 외부 용역을 준 업체 직원이었던 그와 이때 처음 만나 한 사무실에서 3개월간 협업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 프로그래밍만 잘하는 게 아닙니다. 상품 이해력이 아주 뛰어난 거예요. 대부분의 파견 나온 엔지니어들은 배정받은 일만 처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 직원은 오히려 이렇게 하면 어떠냐, 저렇게 바꾸면 더 좋을 것 같다 등등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더구나 친화력도 좋아서 부서의 모든 직원과 친하게 지냈지요. 3개월이 지나 용역 파견이 끝나던 날, 제가 그 직원에게 우리 회사에 경력직으로 입사하지 않겠냐고 제안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직원은 본인이 상대 출신도 아니고 금융을 모른다며 굉장히 당황했습니다. 저는 매너리즘에 빠진 상경계 출신보다 오히려 당신이 낫다. 당신은 프로그래밍을 잘하니 상품을 바로바로 디자인할 수도 있지 않냐고 말하며 설득했습니다.
결국 이 직원은 예상치 못한 경로로 대형 증권사에 좋은 조건으로 입사했습니다. 그 후로 저와 함께 굵직한 금융 상품 시스템과 자산 관리 플랫폼을 만들었지요. 이제는 시스템을 이해하고 코딩을 잘하는 엔지니어 기반 위에, 뛰어난 상품 이해력과 구성력까지 갖춘, 말하자면, 이과적 능력과 문과적 응용력이 더해져 업계에서 보기 드문 스페셜리스트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일이 미리 계획한 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파다 보면 이렇게 예상치도 못한 기회가 운명처럼 찾아오기도 하지요.
다시 제 얘기로 돌아오면, 미국 연수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저는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국내엔 기술적 분석에 관해 제대로 된 서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대다수 금융 서적은 미국이나 일본 원서를 베끼는 수준이었는데 이마저도 내용이 부실했고, 시대에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6개월간 한국 주식 시장에 맞춰 새로운 이론과 틀을 적용하는 작업을 밤새워 미친 듯이 했습니다. 그렇게 나온 책이 '프로만을 위한 신차트 분석'입니다.
이 책은 제가 스페셜리스트로 살아가게 만든 첫 번째 원점(原點)이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회사에서 기본적 분석을 기반으로 한 기업 분석 업무와 금리 환율 주가 전망 등의 투자 전략 업무 등 거의 전천후로 모든 업무를 하고 있었는데, 그 책을 출간한 이후 투자 전략, 또 그중에서도 기술적 분석 기반의 주가 분석에서 저는 확실히 이니셔티브를 쥐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두 번째, 스페셜리스트로서의 제 길을 재확인하는 사건이 또 한 번 발생합니다. 바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입니다. 국가 부도 사태 이후 대한민국의 경제는 서구 자본주의에 밀려, 소위 '글로벌 스탠다드'에 따라 새롭게 디자인되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증권사는 미국식 구조와 문화로 빠르게 바뀌었습니다. 골드만 삭스, 모건 스탠리식의 분업이 이뤄지고, 리서치센터의 업무와 인력을 전문적으로 구성했습니다. 예컨대 기존의 투자전략 부서에선 한 명의 애널리스트가 경제, 금리, 환율, 원자재까지 전망했습니다. 거기다 코스피 등 국내 지수와 주가 전망, 시장 분석까지 했고 더 작은 조직에선 업종 분석까지 맡았지요. 완전 멀티플레이어였습니다.
그러다 2000년 이후엔 금융 회사들이 체계적으로 전문화된 리서치센터로 탈바꿈합니다. 경제 및 금리 환율 전망은 이코노미스트가, 원자재 전망은 원자재 애널리스트가, 전체적인 투자 전략 수립은 스트래티지스트가, 채권 시장 전망은 채권 애널리스트가, 정량 분석은 퀀트 애널리스트가, 기술적 분석은 테크니컬 애널리스트가 하는 식입니다. 여기에 국내담당 따로, 해외담당 따로, 해외도 선진국 따로, 이머징마켓 따로. 제가 과장 시절 혼자 하던 일을 지금은 7~8명이 하는 거지요. 그만큼 한국 금융시장이 고도화되었고, 대형화 선진화 되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러한 분업 과정이 애널리스트들을 당황하게 했습니다. 외국인들의 한국 시장 투자가 봇물이 이루면서 영어로 자료작성이나 프리젠테이션이 안되는 애널리스트는 설 자리가 크게 줄어 들었지요. 이렇게 업무가 분화되는 과정에서 애널리스트들은 어떤 업무를 선택할지 고민해야 하는 시기였고 저는 투자전략을 택하여 스트레티지스트의 길을 가기로 했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누구와도 차별할 수 있는 기술적 분석, 즉 테크니컬 애널리스트에 추가적인 포지셔닝을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스페셜리스트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스페셜리스트는 확실히 제너럴리스트보다 좋은 점이 많습니다. 스페셜리스트(Specialist)는 특정 분야에서 깊이 있는 지식과 기술을 통해 높은 성과를 낼 수 있지만,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는 여러 분야의 폭넓은 이해를 통해 문제 해결에 창의적이고 융합적인 접근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둘 중 회사 생활, 혹은 사회생활을 할 때 어떤 포지션이 좋을까요?
정답은 없습니다. 모범 답안은 '둘 다 필요하다'입니다만, 저에게 굳이 묻는다면 먼저 스페셜리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답하겠습니다. 사실 본인만의 주특기, 주전공이 없다면 일단 생존 자체가 어려워집니다. 사회초년병 시절을 지나 30~40대가 되었는데. 회사 생활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그저 그렇게 하고 있다면 그건 곤란합니다.
본인만의 스페셜티가 없는 제너럴리스트는 모든 것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본인만의 컬러가 없는 무채색의 그림 같습니다. 진정한 제너럴리스트는 스페셜리스트로서의 경험이 여러 분야에서 누적이 될 때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스페셜리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이윤학 전 BNK 자산운용 대표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반면 어릴 때부터 꿈꾸던 일로 스페셜리스트가 된 사람도 있지요. 소설 '해리 포터' 시리즈를 쓴 조앤 롤링이 그렇습니다. 롤링은 영국 웨일스의 작은 시골 마을에 사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상상력이 풍부하고 이야기를 좋아했지요. 그녀의 부모는 어린 롤링에게 시간 날 때마다 책을 많이 읽어 줬는데, 그녀는 이야기를 듣는 것뿐 아니라 만들어 내는 것도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롤링의 삶이 순조롭지만은 않았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에 지원했으나 떨어진 뒤 엑시터 대학으로 진학합니다. 대학 졸업 후 비정규직 비서로 일하다 해고당했으며 가정 폭력으로 순탄치 못했던 결혼 생활을 뒤로하고 결국 이혼해 워킹맘이자 싱글맘으로 힘들게 살아갑니다. 롤링은 생후 4개월 된 딸과 에든버러에 초라한 방 한 칸에서 머물렀습니다. 일자리가 없어 1년 동안 주당 약 10만원의 정부 생활 보조금으로 살아갑니다. 딸에게 줄 분유가 부족해 맹물밖에 주지 못한 적도 있고, 자신도 굶는 일이 허다했다고 하지요. 그래도 그녀는 작가라는 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녀는 스페셜리스트가 되기 위해 끊임없는 글쓰기와 자기훈련을 했습니다. 그녀는 작은 카페에서 딸을 유모차에 태우고 글을 쓸 정도로 치열했습니다. 자신의 글쓰기 실력을 향상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연습하고, 다양한 이야기와 캐릭터를 창조하는 등 자기 스타일과 능력을 발전시켰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철저한 연구로 방대한 세계관을 구축했습니다. 마법과 신화, 역사 등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해리포터 세계를 설계했습니다. 서로 다른 캐릭터, 장소, 마법 등을 매우 정교하게 설정했는데, 이렇게 특별한 세계관 구축은 독자들이 해리포터 세계에 깊이 몰입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롤링은 자기 신념과 끈기로 어려움을 극복했습니다. 첫 번째 해리포터 책인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출판할 무렵, 여러 출판사에서 거절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가 가치가 있다고 믿었고, 끈기를 가지고 계속해서 출판사를 찾았습니다. 결국, '블룸즈버리' 출판사에서 책을 출판하게 되었고, 이는 엄청난 성공으로 이어졌지요. 그녀는 실패 속에서도 그녀 자신을 단단하게 만들었고 하나에 집중해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프리다 칼로처럼 우연한 계기로 스페셜리스트가 되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무슨 인생의 혜안을 가지고, 먼 미래는 이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계획하고 준비해서 되었던 것도 아닙니다. 대부분은 롤링처럼 꿈을 포기하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평균 이상의 인내심을 갖고, 깊고도 깊게 팔 때 비로소 스페셜리스트가 됩니다. 때때로 평균 이상의 열정과 애정을 갖고 묵묵히 일할 때, 운명 같은 기회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제 후배 중에 프로그래머 출신 금융상품 전문가가 있습니다. 지방대를 나와서 중소기업에 프로그래머로 입사했습니다. 그런데 그 회사가 제가 일하던 대형 증권회사로부터 용역을 받게 됩니다. 당시 저는 금융 상품 관련 시스템을 개발하던 중이었는데, 외부 용역을 준 업체 직원이었던 그와 이때 처음 만나 한 사무실에서 3개월간 협업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 프로그래밍만 잘하는 게 아닙니다. 상품 이해력이 아주 뛰어난 거예요. 대부분의 파견 나온 엔지니어들은 배정받은 일만 처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 직원은 오히려 이렇게 하면 어떠냐, 저렇게 바꾸면 더 좋을 것 같다 등등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더구나 친화력도 좋아서 부서의 모든 직원과 친하게 지냈지요. 3개월이 지나 용역 파견이 끝나던 날, 제가 그 직원에게 우리 회사에 경력직으로 입사하지 않겠냐고 제안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직원은 본인이 상대 출신도 아니고 금융을 모른다며 굉장히 당황했습니다. 저는 매너리즘에 빠진 상경계 출신보다 오히려 당신이 낫다. 당신은 프로그래밍을 잘하니 상품을 바로바로 디자인할 수도 있지 않냐고 말하며 설득했습니다.
결국 이 직원은 예상치 못한 경로로 대형 증권사에 좋은 조건으로 입사했습니다. 그 후로 저와 함께 굵직한 금융 상품 시스템과 자산 관리 플랫폼을 만들었지요. 이제는 시스템을 이해하고 코딩을 잘하는 엔지니어 기반 위에, 뛰어난 상품 이해력과 구성력까지 갖춘, 말하자면, 이과적 능력과 문과적 응용력이 더해져 업계에서 보기 드문 스페셜리스트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일이 미리 계획한 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파다 보면 이렇게 예상치도 못한 기회가 운명처럼 찾아오기도 하지요.
다시 제 얘기로 돌아오면, 미국 연수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저는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국내엔 기술적 분석에 관해 제대로 된 서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대다수 금융 서적은 미국이나 일본 원서를 베끼는 수준이었는데 이마저도 내용이 부실했고, 시대에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6개월간 한국 주식 시장에 맞춰 새로운 이론과 틀을 적용하는 작업을 밤새워 미친 듯이 했습니다. 그렇게 나온 책이 '프로만을 위한 신차트 분석'입니다.
이 책은 제가 스페셜리스트로 살아가게 만든 첫 번째 원점(原點)이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회사에서 기본적 분석을 기반으로 한 기업 분석 업무와 금리 환율 주가 전망 등의 투자 전략 업무 등 거의 전천후로 모든 업무를 하고 있었는데, 그 책을 출간한 이후 투자 전략, 또 그중에서도 기술적 분석 기반의 주가 분석에서 저는 확실히 이니셔티브를 쥐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두 번째, 스페셜리스트로서의 제 길을 재확인하는 사건이 또 한 번 발생합니다. 바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입니다. 국가 부도 사태 이후 대한민국의 경제는 서구 자본주의에 밀려, 소위 '글로벌 스탠다드'에 따라 새롭게 디자인되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증권사는 미국식 구조와 문화로 빠르게 바뀌었습니다. 골드만 삭스, 모건 스탠리식의 분업이 이뤄지고, 리서치센터의 업무와 인력을 전문적으로 구성했습니다. 예컨대 기존의 투자전략 부서에선 한 명의 애널리스트가 경제, 금리, 환율, 원자재까지 전망했습니다. 거기다 코스피 등 국내 지수와 주가 전망, 시장 분석까지 했고 더 작은 조직에선 업종 분석까지 맡았지요. 완전 멀티플레이어였습니다.
그러다 2000년 이후엔 금융 회사들이 체계적으로 전문화된 리서치센터로 탈바꿈합니다. 경제 및 금리 환율 전망은 이코노미스트가, 원자재 전망은 원자재 애널리스트가, 전체적인 투자 전략 수립은 스트래티지스트가, 채권 시장 전망은 채권 애널리스트가, 정량 분석은 퀀트 애널리스트가, 기술적 분석은 테크니컬 애널리스트가 하는 식입니다. 여기에 국내담당 따로, 해외담당 따로, 해외도 선진국 따로, 이머징마켓 따로. 제가 과장 시절 혼자 하던 일을 지금은 7~8명이 하는 거지요. 그만큼 한국 금융시장이 고도화되었고, 대형화 선진화 되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러한 분업 과정이 애널리스트들을 당황하게 했습니다. 외국인들의 한국 시장 투자가 봇물이 이루면서 영어로 자료작성이나 프리젠테이션이 안되는 애널리스트는 설 자리가 크게 줄어 들었지요. 이렇게 업무가 분화되는 과정에서 애널리스트들은 어떤 업무를 선택할지 고민해야 하는 시기였고 저는 투자전략을 택하여 스트레티지스트의 길을 가기로 했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누구와도 차별할 수 있는 기술적 분석, 즉 테크니컬 애널리스트에 추가적인 포지셔닝을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스페셜리스트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스페셜리스트는 확실히 제너럴리스트보다 좋은 점이 많습니다. 스페셜리스트(Specialist)는 특정 분야에서 깊이 있는 지식과 기술을 통해 높은 성과를 낼 수 있지만,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는 여러 분야의 폭넓은 이해를 통해 문제 해결에 창의적이고 융합적인 접근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둘 중 회사 생활, 혹은 사회생활을 할 때 어떤 포지션이 좋을까요?
정답은 없습니다. 모범 답안은 '둘 다 필요하다'입니다만, 저에게 굳이 묻는다면 먼저 스페셜리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답하겠습니다. 사실 본인만의 주특기, 주전공이 없다면 일단 생존 자체가 어려워집니다. 사회초년병 시절을 지나 30~40대가 되었는데. 회사 생활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그저 그렇게 하고 있다면 그건 곤란합니다.
본인만의 스페셜티가 없는 제너럴리스트는 모든 것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본인만의 컬러가 없는 무채색의 그림 같습니다. 진정한 제너럴리스트는 스페셜리스트로서의 경험이 여러 분야에서 누적이 될 때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스페셜리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이윤학 전 BNK 자산운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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