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검증위해 예술가 부부 도청하다 정 붙여 버린 비밀경찰
1980년대 독일은 냉전이 한창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 동독의 집권당 사회주의통일당은 ‘사상’이라는 서슬 퍼런 칼날을 시민의 목에 겨눴다. 사상 검증과 국가 안보를 이유로 국민의 일상을 빈틈없이 감시했고 출판과 공연을 철저히 통제했다. 국가보위부(슈타지)에는 10만 명의 비밀경찰과 20만 명 넘는 정보원이 활동할 정도였다.

연극 ‘타인의 삶’ 속 주인공 비즐러는 그중에서도 유독 차갑고 철두철미한 슈타지 비밀경찰이다.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도 서슴지 않고, 고문이 좋은 취조 전략이라고 가르치는 냉혈한이다. 그런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감청과 감시. 그 대상은 연인 사이인 동독 최고의 극작가 드라이만과 인기 배우 크리스타다.

드라이만의 집에 빈틈없이 도청기를 설치한 비즐러는 두 연인의 삶에 깊숙이 들어간다. 일상적인 대화와 사소한 다툼부터 사랑을 나누는 소리까지 듣는다. 비즐러의 마음은 미묘하게 동요한다. 사랑과 열정이 가득한 이들이 권력에 짓밟히고 저항하려는 모습을 목격하면서다. 점차 당을 향한 충성심까지 흔들리기 시작한다.

영화가 원작인 작품이 무대에 오르며 미묘한 매력이 더해졌다. 도청으로 이야기를 엿듣는 비즐러는 두 연인 바로 옆에 서서 귀를 기울이지만 드라이만과 크리스타는 눈앞의 그를 보지 못한다. 같은 공간에서 모든 비밀을 공유하면서도 서로를 보지 못하는 이들의 관계가 좁은 무대에 놓여 더욱 숨 막힌다. 영화처럼 다양한 배경을 사용하지 못하는 연극 무대의 한계가 단점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더욱 피 말리게 그리는 장치가 된다.

이 숨 막히는 무대에서 발악하는 주인공들의 딜레마가 관객의 가슴을 옥죈다. 비즐러, 드라이만, 크리스타가 동시에 신념과 생존, 충성과 양심 사이에서 저울질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관객들은 객석에 앉아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지만, 서로를 배신해야 자신이 살 수 있는 ‘범죄자의 딜레마’에 빠진 주인공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종잡을 수 없다.

이번 작품으로 연극에 데뷔한 이동휘의 비즐러는 매력적이다. 얼음같이 차가운 비밀경찰이 조금씩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비즐러는 상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취조하는 듯 엉거주춤한 거북목에 뻣뻣한 걸음걸이로 걸어 다닌다. 그런 딱딱한 인간이 동요하면서 불안함에 바짓자락을 구기적거리고 눈을 피하기 시작한다. 의심받자 아무렇지도 않은 체하지만 목소리는 불안함에 미세하게 떨린다. 마음속 흔들림을 억누르는 모습이 아주 미묘하지만 객석에 확실히 전해진다. 어두운 분위기 속 툭툭 던지는 무미건조한 말투 덕에 소소하게 등장하는 유머도 간결하게 웃음을 유발한다. 폭넓은 연기를 보여주는 조연들의 일인다역도 감초 같다.

연극의 한계를 역으로 영화에서 느끼지 못하는 새로운 장점으로 승화한 ‘타인의 삶’. 피 말리는 딜레마에 객석은 숨 쉬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숨죽이게 된다.

구교범 기자 gugyobeo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