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형택 기자
임형택 기자
“정부의 상황이 어떻든 기업에 활력을 불어넣는 정책을 흔들림 없이 지속해야 합니다. 그게 한국 증시를 키우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올해 국내 증시의 가장 큰 줄기 중 하나로 기업 밸류업 정책을 꼽을 수 있다. 고질적인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겠다며 정부가 올 2월 도입을 발표했고 각종 세부 정책이 잇따르면서 금융주 등 저주가순자산비율(PBR) 종목 주가가 급등하기도 했다. 하지만 밸류업의 ‘방식’을 두고 논란도 이어지고 있다. 이사의 충실 의무를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 논란, 주주환원에 따른 기업의 단기적 경영 우려 등이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일본은 한국보다 10년 앞서 기업 가치 제고 정책을 추진해왔고 이 같은 논란을 앞서 경험했다. 또한 정책이 효과를 발휘해 2019년 말 23,656.62이던 닛케이225지수는 이달 13일 39,470.44로 두 배 가까이 올랐다. 이 같은 일본의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방한한 야마지 히로미 일본증권거래소(JPX) 대표를 최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인터뷰했다. 그는 36년간 노무라증권에서 일한 뒤 오사카증권거래소 대표, 도쿄증권거래소 대표를 거쳐 지난해 4월 JPX 대표로 취임한 일본 밸류업 정책의 산증인이다.

▷한국이 일본을 본뜬 밸류업 정책을 시행 중입니다.

“옳은 방향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10년 전부터 추진된 일본의 밸류업 정책도 시작 단계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만큼 밸류업 정책은 장기 프로젝트입니다.”

▷일본 밸류업 정책으로 닛케이지수가 크게 올랐습니다.

“주가 상승은 여러 가지 요인이 겹친 데 따른 것이라고 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임금 상승으로 디플레이션이 상당히 해소됐고, 미·중 갈등에 따른 지정학적 리스크 때문에 중국 투자금이 일본으로 흘러들어왔습니다. 인플레이션으로 가계 또한 물가 상승률보다 높은 수익을 얻기 위해 저축 대신 투자에 나섰습니다.”

▷대부분 한국에도 해당되는데, 주가가 오르지 않습니다.

“기업 거버넌스 차이가 중요한 문제라고 봅니다. 최근 5년 사이 일본 시장의 문화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일본 국내 기관투자가들이 주주총회에서 반대표를 던지기 시작한 겁니다.”

▷그 결과는 어땠나요.

“과거에는 회사 제안이 95% 이상 그대로 통과됐다면 지금은 주주들에게 막히는 게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됐습니다. 경영자들도 주주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눈을 뜨고 있습니다.”

▷주주 요구가 장기적 경영을 어렵게 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도쿄증권거래소가 기업에 요청한 ‘자본효율성과 주가를 고려한 경영’에는 배당 증가나 자사주 매입 같은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중장기적 성장을 위해 설비 투자와 사업 재편, 인수합병 등을 해달라고 적혀 있죠. 주주환원은 이 같은 중장기적 투자를 하고 난 뒤 잉여 자본으로 하라는 게 분명한 원칙입니다. 먼저 중장기적 투자를 해서 기업 가치를 높여달라는 겁니다.”

▷한국에선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주주로 확대하자는 의견이 있습니다.

“일본 상법(회사법)에도 이사의 충실 의무 조항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상은 회사로 명문화돼 있습니다(일본 회사법 제355조·이사는 주주총회의 법령, 정관 및 결의를 준수하고 주식회사에 대해 성실하게 그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 주주도 물론 중요한 이해관계자지만 경영자, 직원, 사회 등 다른 많은 이해관계자가 있죠.”

▷일본이 택한 방식은 뭔가요.

“법제화가 아니라 가이드라인 제시입니다. 관련한 원칙을 세워놓고 이를 준수하지 않으면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거죠. 일본의 밸류업 정책은 법률적 강제가 아니라 이 같은 ‘피어 프레셔(peer pressure)’ 방식으로 추진돼왔습니다. 일본 내에서도 법으로 강제하자는 의견이 나오고는 있지만 아직까진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한국 투자자들은 상법 개정을 원하는 듯합니다.

“기업과 주식투자자의 관점과 타임라인(시간표)에는 꽤 많은 차이가 존재합니다. 기업에 비해 투자자들은 사실 단기적 과실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밸류업은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는 정책이죠. 성과가 나오기까지는 최소 2~3년, 아니면 더 걸릴 수도 있습니다.”

▷기업들도 반발합니다.

“기업들이 강제적으로 뭔가를 하도록 하는 정책은 지속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기업이 스스로 가치 향상을 위해 움직여야 하는 거죠. 이런 생각이 일본 밸류업 정책 근저에 깔려 있는 철학입니다.”

▷한국 기업이 주주가치에 무신경하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일본도 모회사가 사업부를 떼어 내 자회사로 만든 뒤 상장하는 사례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법령화보다는) 연구소를 설립해 소액주주의 권리를 어떻게 보호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기업과 투자자의 시각과 시간에 차이가 있다는 걸 전제로 이 차이를 어떻게 좁힐지 고민하는 게 시장 운영자의 역할입니다.”

▷기업은 장기적 경영이 어려워진다고 호소합니다.

“일본에서도 시장의 압박이 커지면서 상장을 지속하는 게 맞는지 고민하는 기업이 늘어났습니다. 2020년까지는 약 50개 기업이 상장폐지를 결정했지만 2021~2023년 평균 72개사로 늘었고 올해는 91개사로 증가했습니다.”

▷투자자 요구도 타당한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이죠. 여러 갈등이 있지만 이해관계자 요구를 조정하면서 성장해 나가는 것이 상장기업의 사명입니다. 저성장 국면에 놓인 탓에 어려운 점이 많지만 기업들은 글로벌 마켓으로 나가거나 신규 비즈니스에 투자하면서 성장을 지속해야 합니다.”

▷밸류업 정책은 어떤 점에서 의미를 지닐까요.

“일본과 한국의 공통점은 민간 부문, 기업이 국가를 성장으로 이끌었다는 겁니다. 밸류업 정책은 기업에 활력을 불어넣고 ‘코퍼레이트 코리아’를 만들기 위한 정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탄핵 정국으로 정책 동력에 대한 우려가 나옵니다.

“기업 가치를 올리는 정책은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계속해나가는 게 당연합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성장을 지속해야 정부가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정책이죠. 한국이 밸류업 정책을 흔들림 없이 지속해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일본도 해외투자 많지만 국내와 경쟁상대는 아냐"
야마지 대표가 본 '美투자 붐'…환율 리스크 노출은 약점

야마지 히로미 일본증권거래소 대표는 개인투자자들이 미국 증시로 자금을 대거 옮기는 상황에 대해 “일본에도 같은 현상이 있다”면서도 “환율 리스크가 있는 해외 시장이 국내 시장과 경쟁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야마지 대표에 따르면 일본에서 올해 1~10월 소액투자비과세제도(NISA) 통장에 들어온 신규 투자액 중 절반에 가까운 금액이 해외 투자 자금일 정도로 그 규모가 커졌다. 하지만 ‘일시적 현상’일 것이란 게 그의 주장이다.

야마지 대표는 “개인투자자의 환전이 ‘엔저’의 주요 원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해외 투자가 많다”면서도 “해외 투자는 어쩔 수 없이 환 리스크에 노출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엔화 약세일 때 미국 시장에 투자했다가 엔화가 강세로 돌아서면 수익이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는 “지금은 이런 해외 투자의 특징에 대해 개인투자자들이 학습하는 과정”이라고 진단했다.

다만 한국과 달리 일본 증시는 최근 5년간 두 배 가까이 오르는 등 장기 상승 추세를 보이고 있다. 국내 투자자의 미국 주식 보관액은 지난 26일 기준 1178억6832만달러에 달한다. 2022년 말 442억2872만달러, 지난해 말 680억2349만달러에서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박한신 기자 p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