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중재자' '미스터 픽스 잇'…'美 최고 전직 대통령' 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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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대통령'에서 품위 있는 전직 대통령의 귀감으로 재평가
카터센터 세워 폭넓은 국제활동으로 노벨평화상…사회봉사 매진
1994년 방북 김일성 주석 만나, 한반도 평화 중재 100세를 일기로 29일(현지시간) 타계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 시절보다 퇴임 후의 활동으로 더 많은 관심과 평가를 받는 대표적 인물이다.
카터 전 대통령은 경제난과 외교 악재 등으로 재선 문턱에서 고배를 마시면서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인색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퇴임 후 왕성한 사회봉사와 국제 평화에 대한 헌신으로 세간의 부정적 인식을 떨쳐내고 '성공한 전직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전직 대통령의 모범을 보였다는 찬사까지 받았다.
그는 민주당 소속으로 주 상원의원을 두 번 역임한 뒤 조지아 주지사를 거쳐 미국의 제39대 대통령으로 1977∼1981년 4년간 재직했다.
이어 1980년 대선에서 재선에 도전했으나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 후보에게 패해 단임에 그쳤다.
그는 공직 생활 이전에는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땅콩 재배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둬 '땅콩농부'로 알려졌다.
카터는 1924년 10월 1일 미국 조지아주 플레인스에서 대규모 땅콩 농장을 운영한 아버지와 간호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지아남서주립대에 1941년 입학했지만, 이듬해 조지아공대로 편입한 뒤 해군사관학교의 문을 두드렸고, 1943년 입학해 1946년 졸업했다.
잠수함 등에서 복무하다 1953년 부친이 숨지자 해군 대위로 전역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땅콩·면화 사업에 매진했다.
사업을 하면서 흑인 차별에 반대하는 인권운동 활동가로도 활약했다.
1962년 조지아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했지만 경쟁자의 부정선거가 드러나 당선됐다.
1963∼1967년 상원의원을 연임했다.
주지사 선거에서도 한 차례 떨어진 뒤 재도전해 1970년 당선됐다.
주지사 취임사에서 인종 차별 철폐를 선언해 주목받았으며 재임 기간(1971∼75년) 다수의 흑인을 공무원과 판사로 임용하는 등 개혁 성향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974년 대권 도전을 선언했을 때만 해도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다크호스'였으나 2년여간 선거운동을 통해 낮은 인지도를 극복하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됐다.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한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공화당 소속 제럴드 포드 당시 대통령과 1976년 대선에서 맞붙어 접전 끝에 승리했다.
카터의 돌풍에는 기성 정치에 때 묻지 않은 이미지가 도움이 됐다.
수년째 이어진 경기 침체와 베트남 전쟁 패배, 닉슨 전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 등이 겹치면서 정치 불신이 커진 미국인들에게 그의 참신한 이미지와 새로운 주장이 어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례로 그는 대통령 선거운동 유세에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거짓말을 한다면, 여러분을 오도하는 말을 한다면 나에게 표를 주지 말라. (만약 그렇다면) 나는 여러분의 대통령의 될 자격이 없는 것이다"라며 '정직'을 내세워 표심을 공략했다.
하지만 재임 기간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국내적으로 인플레이션과 싸워야 했고 대외적으로 '인권외교'를 내세워 긴장 완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어려움도 겪었다.
경제 부문에선 인플레이션과 에너지 위기 등이 발목을 잡았다.
물가상승률이 1977년 연평균 6.5%에서 1980년 13.5%까지 치솟았다.
이란의 정권 교체로 석유 수급에 차질이 생겨 고유가 문제가 불거졌다.
임기 말 100만 개가 넘는 일자리 창출, 재정 적자 감소, 사회보장제도 강화 등의 실적이 있었지만 빛이 바랬다.
외교 부문에선 국가 간 갈등과 분쟁 해결을 위해 평화와 인권을 강조한 '인권외교'로 나름의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정치·군사적 수단을 토대로 실리를 따지는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 속에서 한계에 부딪히기도 했다.
중동 평화 협상 중재는 그의 대표적 성과로 꼽힌다.
카터는 1978년 9월 안와르 사다트 당시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를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로 초청해 협정 체결을 주선했다.
이 역사적인 '캠프 데이비드 협정'은 이듬해 3월 양국이 적대행위를 끝낸다는 조약 체결로 이어져 중동 평화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전임 대통령들의 노력에 더해 중국과의 외교관계도 꾸준히 개선하는 성과도 냈다.
그러나 여러 현안에서 한계도 드러냈다.
카터는 중성자탄 생산과 신종 폭격기 개발 연기 등을 명령하고 소련과의 핵무기 제한 협상 서명을 추진했지만, 소련은 오히려 무기를 증강하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는 등 카터의 노력에 호응하지 않았다.
1979년 11월에는 이란 민족주의자들이 테헤란의 미 대사관을 습격해 1981년 1월까지 444일간 미국인 50여 명이 이란에 인질로 억류된 사태까지 발생해 여론이 급격히 악화했다.
특히 1980년 4월 이란 인질 구출작전에 실패하고 미국인 8명이 숨지기까지 하면서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재임 때 주한미군 문제로 한국과 관계에서 긴장이 높아지기도 했다.
카터는 대선 출마 때 당시 박정희 정권의 인권문제를 제기하며 주한미군 철수를 언급했고, 취임 후에는 자신의 소신인 주한미군 철수를 관철시키려고 해 적잖은 저항과 논란을 야기했다.
1978년 4월 21일에는 그해 연말까지 주한미군을 감축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지만, 의회의 지원 부족과 부정적 여론 등으로 성사되지는 않았다.
2018년 공개된 미 외교 기밀문서를 보면 카터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1979년 6월 청와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두고 격렬한 말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재임 기간 경제 부진과 외교정책 실패 등의 여파로 카터는 1980년 대선에서 '위대한 미국' 건설을 내건 공화당의 레이건 후보에게 크게 패해 재선에 실패했다.
카터가 1981년 퇴임할 당시 지지율은 역대 전직 대통령 중에서도 낮은 축인 34%에 그쳤다.
그러나 그는 이후 펼쳐진 '인생 2막'에서 완전히 달라진 면모를 보였다.
한창 일할 나이인 57세에 백악관을 나온 카터는 이때부터 세계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 개선, 보건·여성 문제 해결을 위해 뛰면서 각종 사회 공헌 활동을 통해 세간의 평가를 뒤엎었다.
부인 로절린 여사와 함께 고향인 조지아주로 귀향, 퇴임 이듬해인 1982년 애틀랜타에 세운 비영리기구 '카터 센터'(카터재단)가 그 기반이 됐다.
카터와 각별한 관계였고, 빌 클린턴 정부 시절 주한미국대사를 지낸 제임스 레이니가 총장으로 있던 에모리 대학이 도움을 줬다.
인권 증진과 인류의 고통 감소를 목표로 내건 카터 센터는 평화 달성과 질병 퇴치를 위한 활동에 나섰다.
전임자들이 퇴임 후 골프와 여행, 강연 등으로 시간을 보낸 것과 달리 카터는 전 세계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상당수의 전직 대통령 기념관·도서관이 사료 전시 등 소극적 활동에 그쳤지만 카터 센터는 '작은 유엔'처럼 운영되며 국제활동의 무대가 됐다.
그는 카터 센터를 발판 삼아 갈등 해결, 제3세계의 부정선거 감시, 인권과 민주주의 증진, 빈곤국 질병 예방 등을 위해 현직 시절만큼 헌신적으로 세계를 누볐다.
카터는 1989년 이래 수십 개 국가에 선거감시단을 파견해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
저개발 국가 질병 퇴치에도 앞장섰다.
발에 기생해 종양을 일으키는 아프리카 기니 벌레 박멸 운동을 1986년부터 펼쳤다.
카터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사태를 정리한다, 해결한다'는 뜻에서 '미스터 픽스 잇'(Mr. Fix it)이라는 애칭도 얻었다.
물밑이나 막후에서 이뤄지는 외교 협상에서, 외교 관례상 전면에 나설 수 없는 현직 대통령과 미국 정부를 대신해 그는 각종 국제 문제에서 '특사'이자 '해결사'로 활약하기도 했다.
조지 H.W.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 행정부 시절 국무장관을 지낸 제임스 베이커와의 인연을 바탕으로 카터는 평화사절단을 이끌고 분쟁 지역인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와 수단을 방문했다.
북핵 문제로 촉발된 한반도 위기 상황에서 평화의 중재자로 주목받기도 했다.
클린턴 대통령 시절인 1994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 이후 1차 북핵 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방북해 김일성 북한 주석과 회담하고 당시 김영삼(YS)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주선했다.
카터는 김일성 주석의 초청을 받아 서울과 판문점을 경유해 평양에 도착했다.
그는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비무장지대(DMZ)를 통해 평양 방문이 허용된 첫 미국인이었다.
그러나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면서 결국 카터 전 대통령을 매개로 하는 남북 정상회담은 무산됐다.
그는 같은 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라울 세드라스 장군의 자진 퇴임을 설득하고자 아이티를 찾았고,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전쟁 중단 협상을 위해 날아가는 등 1994년에만 세 번의 평화 중재로 종횡무진 세계를 누볐다.
2002년 5월에는 외교 단절 후 미 최고위급 인사로는 처음으로 쿠바를 방문해 피델 카스트로 당시 국가평의회 의장과 만났다.
카터 전 대통령은 수십 년간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과 민주주의 및 인권 신장을 위해 공헌한 점을 인정받아 200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열악한 주거 환경에 놓인 사람들의 주거 문제를 돕는 봉사단체 '해비타트 프로젝트'(사랑의 집짓기) 활동에 부인과 함께 30년 넘게 참여해 봉사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퇴임 후 회고록을 포함해 성경, 외교, 중동 문제, 미 독립전쟁 등 다양한 분야에서 20권이 넘는 책을 썼고 퓰리처상도 받았다.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최고 낭독앨범상'(Best Spoken Word Album)을 3차례 수상한 '이색 이력'도 보유하고 있다.
뇌로 퍼진 흑색종(피부암의 하나)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던 지난 2015년 망치와 톱을 허리춤에 차고 해비타트 현장에 나와 "나는 아직 상태가 좋고 일할 수 있다"고 말해 큰 감동을 주기도 했다.
이후 그는 기적적으로 암 완치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 흑색종(피부암 일종)이 간과 뇌까지 전이되면서 치료를 집중적으로 받다가 2023년 2월 여생을 고향 자택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기로 했다며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선택했고, 이날 눈을 감았다.
카터는 퇴임 후 가장 긴 은퇴 기간을 보낸 대통령이기도 하다.
1929년부터 4년간 재임한 허버트 후버 전 대통령은 1964년 숨질 때까지 31년간 전직 대통령 지위를 누렸다.
1981년 1월 퇴임한 카터는 약 44년간 전직 대통령의 시간을 보냈다.
카터는 92세 때인 2017년 1월 20일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해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최고령 전직 대통령이 됐다.
고령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사태로 2021년 1월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100일을 맞은 그해 4월 조지아주의 카터 전 대통령 자택을 직접 찾았다.
카터 전 대통령은 역대 미 대통령 중 최장수 전직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2018년 12월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이 그 다음이다.
카터 전 대통령은 자신의 장례 계획과 관련해선 워싱턴DC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애틀랜타에서 시신을 잠시 안치한 뒤 고향인 조지아주 플레인스에 있는 집 앞에 묻히고 싶다고 2006년 미 의회방송 C-스팬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고인에 앞서 지난 11월19일 96세의 나이로 타계한 부인 로절린 여사와의 평생에 걸친 사랑과 동역도 세계인에게 영원히 기억될 이야기로 남았다.
카터 전 대통령은 로절린 여사 별세 당시 성명에서 "로절린은 내가 이룬 모든 것에서 동등한 파트너였다"면서 "그녀는 내가 필요할 때 조언과 격려를 해주었다.
로절린이 세상에 있는 한 나는 누군가 항상 나를 사랑하고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고인의 독실한 신앙(개신교)도 그의 인생을 논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도덕주의를 강조하는 그의 외교에도 신앙이 영향을 줬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주일예배에 늘 참석했으며, 대통령직을 마치고 낙향한 후에도 고향의 교회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활동을 인생의 최후반부까지 이어갔다.
/연합뉴스
카터센터 세워 폭넓은 국제활동으로 노벨평화상…사회봉사 매진
1994년 방북 김일성 주석 만나, 한반도 평화 중재 100세를 일기로 29일(현지시간) 타계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 시절보다 퇴임 후의 활동으로 더 많은 관심과 평가를 받는 대표적 인물이다.
카터 전 대통령은 경제난과 외교 악재 등으로 재선 문턱에서 고배를 마시면서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인색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퇴임 후 왕성한 사회봉사와 국제 평화에 대한 헌신으로 세간의 부정적 인식을 떨쳐내고 '성공한 전직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전직 대통령의 모범을 보였다는 찬사까지 받았다.
그는 민주당 소속으로 주 상원의원을 두 번 역임한 뒤 조지아 주지사를 거쳐 미국의 제39대 대통령으로 1977∼1981년 4년간 재직했다.
이어 1980년 대선에서 재선에 도전했으나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 후보에게 패해 단임에 그쳤다.
그는 공직 생활 이전에는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땅콩 재배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둬 '땅콩농부'로 알려졌다.
카터는 1924년 10월 1일 미국 조지아주 플레인스에서 대규모 땅콩 농장을 운영한 아버지와 간호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지아남서주립대에 1941년 입학했지만, 이듬해 조지아공대로 편입한 뒤 해군사관학교의 문을 두드렸고, 1943년 입학해 1946년 졸업했다.
잠수함 등에서 복무하다 1953년 부친이 숨지자 해군 대위로 전역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땅콩·면화 사업에 매진했다.
사업을 하면서 흑인 차별에 반대하는 인권운동 활동가로도 활약했다.
1962년 조지아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했지만 경쟁자의 부정선거가 드러나 당선됐다.
1963∼1967년 상원의원을 연임했다.
주지사 선거에서도 한 차례 떨어진 뒤 재도전해 1970년 당선됐다.
주지사 취임사에서 인종 차별 철폐를 선언해 주목받았으며 재임 기간(1971∼75년) 다수의 흑인을 공무원과 판사로 임용하는 등 개혁 성향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974년 대권 도전을 선언했을 때만 해도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다크호스'였으나 2년여간 선거운동을 통해 낮은 인지도를 극복하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됐다.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한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공화당 소속 제럴드 포드 당시 대통령과 1976년 대선에서 맞붙어 접전 끝에 승리했다.
카터의 돌풍에는 기성 정치에 때 묻지 않은 이미지가 도움이 됐다.
수년째 이어진 경기 침체와 베트남 전쟁 패배, 닉슨 전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 등이 겹치면서 정치 불신이 커진 미국인들에게 그의 참신한 이미지와 새로운 주장이 어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례로 그는 대통령 선거운동 유세에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거짓말을 한다면, 여러분을 오도하는 말을 한다면 나에게 표를 주지 말라. (만약 그렇다면) 나는 여러분의 대통령의 될 자격이 없는 것이다"라며 '정직'을 내세워 표심을 공략했다.
하지만 재임 기간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국내적으로 인플레이션과 싸워야 했고 대외적으로 '인권외교'를 내세워 긴장 완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어려움도 겪었다.
경제 부문에선 인플레이션과 에너지 위기 등이 발목을 잡았다.
물가상승률이 1977년 연평균 6.5%에서 1980년 13.5%까지 치솟았다.
이란의 정권 교체로 석유 수급에 차질이 생겨 고유가 문제가 불거졌다.
임기 말 100만 개가 넘는 일자리 창출, 재정 적자 감소, 사회보장제도 강화 등의 실적이 있었지만 빛이 바랬다.
외교 부문에선 국가 간 갈등과 분쟁 해결을 위해 평화와 인권을 강조한 '인권외교'로 나름의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정치·군사적 수단을 토대로 실리를 따지는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 속에서 한계에 부딪히기도 했다.
중동 평화 협상 중재는 그의 대표적 성과로 꼽힌다.
카터는 1978년 9월 안와르 사다트 당시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를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로 초청해 협정 체결을 주선했다.
이 역사적인 '캠프 데이비드 협정'은 이듬해 3월 양국이 적대행위를 끝낸다는 조약 체결로 이어져 중동 평화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전임 대통령들의 노력에 더해 중국과의 외교관계도 꾸준히 개선하는 성과도 냈다.
그러나 여러 현안에서 한계도 드러냈다.
카터는 중성자탄 생산과 신종 폭격기 개발 연기 등을 명령하고 소련과의 핵무기 제한 협상 서명을 추진했지만, 소련은 오히려 무기를 증강하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는 등 카터의 노력에 호응하지 않았다.
1979년 11월에는 이란 민족주의자들이 테헤란의 미 대사관을 습격해 1981년 1월까지 444일간 미국인 50여 명이 이란에 인질로 억류된 사태까지 발생해 여론이 급격히 악화했다.
특히 1980년 4월 이란 인질 구출작전에 실패하고 미국인 8명이 숨지기까지 하면서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재임 때 주한미군 문제로 한국과 관계에서 긴장이 높아지기도 했다.
카터는 대선 출마 때 당시 박정희 정권의 인권문제를 제기하며 주한미군 철수를 언급했고, 취임 후에는 자신의 소신인 주한미군 철수를 관철시키려고 해 적잖은 저항과 논란을 야기했다.
1978년 4월 21일에는 그해 연말까지 주한미군을 감축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지만, 의회의 지원 부족과 부정적 여론 등으로 성사되지는 않았다.
2018년 공개된 미 외교 기밀문서를 보면 카터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1979년 6월 청와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두고 격렬한 말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재임 기간 경제 부진과 외교정책 실패 등의 여파로 카터는 1980년 대선에서 '위대한 미국' 건설을 내건 공화당의 레이건 후보에게 크게 패해 재선에 실패했다.
카터가 1981년 퇴임할 당시 지지율은 역대 전직 대통령 중에서도 낮은 축인 34%에 그쳤다.
그러나 그는 이후 펼쳐진 '인생 2막'에서 완전히 달라진 면모를 보였다.
한창 일할 나이인 57세에 백악관을 나온 카터는 이때부터 세계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 개선, 보건·여성 문제 해결을 위해 뛰면서 각종 사회 공헌 활동을 통해 세간의 평가를 뒤엎었다.
부인 로절린 여사와 함께 고향인 조지아주로 귀향, 퇴임 이듬해인 1982년 애틀랜타에 세운 비영리기구 '카터 센터'(카터재단)가 그 기반이 됐다.
카터와 각별한 관계였고, 빌 클린턴 정부 시절 주한미국대사를 지낸 제임스 레이니가 총장으로 있던 에모리 대학이 도움을 줬다.
인권 증진과 인류의 고통 감소를 목표로 내건 카터 센터는 평화 달성과 질병 퇴치를 위한 활동에 나섰다.
전임자들이 퇴임 후 골프와 여행, 강연 등으로 시간을 보낸 것과 달리 카터는 전 세계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상당수의 전직 대통령 기념관·도서관이 사료 전시 등 소극적 활동에 그쳤지만 카터 센터는 '작은 유엔'처럼 운영되며 국제활동의 무대가 됐다.
그는 카터 센터를 발판 삼아 갈등 해결, 제3세계의 부정선거 감시, 인권과 민주주의 증진, 빈곤국 질병 예방 등을 위해 현직 시절만큼 헌신적으로 세계를 누볐다.
카터는 1989년 이래 수십 개 국가에 선거감시단을 파견해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
저개발 국가 질병 퇴치에도 앞장섰다.
발에 기생해 종양을 일으키는 아프리카 기니 벌레 박멸 운동을 1986년부터 펼쳤다.
카터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사태를 정리한다, 해결한다'는 뜻에서 '미스터 픽스 잇'(Mr. Fix it)이라는 애칭도 얻었다.
물밑이나 막후에서 이뤄지는 외교 협상에서, 외교 관례상 전면에 나설 수 없는 현직 대통령과 미국 정부를 대신해 그는 각종 국제 문제에서 '특사'이자 '해결사'로 활약하기도 했다.
조지 H.W.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 행정부 시절 국무장관을 지낸 제임스 베이커와의 인연을 바탕으로 카터는 평화사절단을 이끌고 분쟁 지역인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와 수단을 방문했다.
북핵 문제로 촉발된 한반도 위기 상황에서 평화의 중재자로 주목받기도 했다.
클린턴 대통령 시절인 1994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 이후 1차 북핵 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방북해 김일성 북한 주석과 회담하고 당시 김영삼(YS)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주선했다.
카터는 김일성 주석의 초청을 받아 서울과 판문점을 경유해 평양에 도착했다.
그는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비무장지대(DMZ)를 통해 평양 방문이 허용된 첫 미국인이었다.
그러나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면서 결국 카터 전 대통령을 매개로 하는 남북 정상회담은 무산됐다.
그는 같은 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라울 세드라스 장군의 자진 퇴임을 설득하고자 아이티를 찾았고,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전쟁 중단 협상을 위해 날아가는 등 1994년에만 세 번의 평화 중재로 종횡무진 세계를 누볐다.
2002년 5월에는 외교 단절 후 미 최고위급 인사로는 처음으로 쿠바를 방문해 피델 카스트로 당시 국가평의회 의장과 만났다.
카터 전 대통령은 수십 년간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과 민주주의 및 인권 신장을 위해 공헌한 점을 인정받아 200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열악한 주거 환경에 놓인 사람들의 주거 문제를 돕는 봉사단체 '해비타트 프로젝트'(사랑의 집짓기) 활동에 부인과 함께 30년 넘게 참여해 봉사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퇴임 후 회고록을 포함해 성경, 외교, 중동 문제, 미 독립전쟁 등 다양한 분야에서 20권이 넘는 책을 썼고 퓰리처상도 받았다.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최고 낭독앨범상'(Best Spoken Word Album)을 3차례 수상한 '이색 이력'도 보유하고 있다.
뇌로 퍼진 흑색종(피부암의 하나)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던 지난 2015년 망치와 톱을 허리춤에 차고 해비타트 현장에 나와 "나는 아직 상태가 좋고 일할 수 있다"고 말해 큰 감동을 주기도 했다.
이후 그는 기적적으로 암 완치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 흑색종(피부암 일종)이 간과 뇌까지 전이되면서 치료를 집중적으로 받다가 2023년 2월 여생을 고향 자택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기로 했다며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선택했고, 이날 눈을 감았다.
카터는 퇴임 후 가장 긴 은퇴 기간을 보낸 대통령이기도 하다.
1929년부터 4년간 재임한 허버트 후버 전 대통령은 1964년 숨질 때까지 31년간 전직 대통령 지위를 누렸다.
1981년 1월 퇴임한 카터는 약 44년간 전직 대통령의 시간을 보냈다.
카터는 92세 때인 2017년 1월 20일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해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최고령 전직 대통령이 됐다.
고령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사태로 2021년 1월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100일을 맞은 그해 4월 조지아주의 카터 전 대통령 자택을 직접 찾았다.
카터 전 대통령은 역대 미 대통령 중 최장수 전직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2018년 12월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이 그 다음이다.
카터 전 대통령은 자신의 장례 계획과 관련해선 워싱턴DC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애틀랜타에서 시신을 잠시 안치한 뒤 고향인 조지아주 플레인스에 있는 집 앞에 묻히고 싶다고 2006년 미 의회방송 C-스팬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고인에 앞서 지난 11월19일 96세의 나이로 타계한 부인 로절린 여사와의 평생에 걸친 사랑과 동역도 세계인에게 영원히 기억될 이야기로 남았다.
카터 전 대통령은 로절린 여사 별세 당시 성명에서 "로절린은 내가 이룬 모든 것에서 동등한 파트너였다"면서 "그녀는 내가 필요할 때 조언과 격려를 해주었다.
로절린이 세상에 있는 한 나는 누군가 항상 나를 사랑하고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고인의 독실한 신앙(개신교)도 그의 인생을 논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도덕주의를 강조하는 그의 외교에도 신앙이 영향을 줬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주일예배에 늘 참석했으며, 대통령직을 마치고 낙향한 후에도 고향의 교회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활동을 인생의 최후반부까지 이어갔다.
/연합뉴스